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그의 책 ‘이단의 시대’를 통하여 현대사회의 획일성을 비판한다. 종교적 이단은 이런 획일성에 저항함으로써 소외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순기능이 있다. 예수도 유대교의 입장에서보면 이단아였고, 개신교도 가톨릭의 이단이었다. 이러한 이단들은 초기에는 순기능을 하지만 제도 종교가 되면서 기득권을 대변하게 된다. 토마스 뮌처의 농민혁명에 반대 입장을 가졌던 루터가 대표적인 경우다.한국 사회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이단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통일교, 천부교(박장로교) 등이 초기에는 반짝 민중들과 함께 하는 듯 했으나 결국은
안산에서 열리는 세월호 10주기 예배에서 참여 했다 ‘바람의 세월’을 감독한 문종택 씨를 오랫만에 만났다. 문종택 씨는 딸 지성이를 바다로 보낸 후 ‘4.16TV’를 만들어 지난 10년 동안 카메라를 들고 기록을해왔다. 그런데 나보다 10 여살이나 젊은 그의 너무 변해 버린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2017년 지성이 부모를 시드니에 초청해서 여러 가지 추모 행사를 가졌을 때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간담회에서 어려서 이민을 와서 한국말이 서툰 한 여성이 눈물을 씻으며 유가족의 손을 잡고 “세월호를 축하할게요.”라고 해서 순간적으로 어리
사람들은 내가 노숙자 선생님들이나 구걸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쓰면 그것을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듣는다. 어떤 사람은 그까짓 노숙자에게 오만 원 준 것이 무슨 대수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내용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이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리고 궁극적으로는 설득하는 것이다. 특히 내 일을 소재로 삼는 것은 내가 쓰는 글이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불행은 말로만 떠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닌가.나도 안다. 한 손이 하는
드디어 한국 총선이 끝났다. 범 야권 세력의 압도적인 승리다. 윤정권 2년 동안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이 압도적인 승리의 기쁨도 뭔가 아직도 좀 손해 본듯한 묘한 느낌도 든다. 그래서인지 주위 사람들 반응에서 이 결과에 대한 아쉬움도 많이 느껴진다.이번 총선을 지켜보면서 수 틀리면 그동안 들어간 판돈 따윈 상관 안 하고 판을 엎어버리는 한국 사회의 에너지 넘침에 다시 한번 매력을 느낀다. 이런 넘치는 에너지와 흥이 한국 사회를 더더욱 활발하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함과 부러움(?)이 동시에 든다. 아마도 내가 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예레미야 5:22).한계를 마주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통과하는 문은 좌절이다. 한계가 좌절로 들어서는 입구라면, 좌절의 출구에는 자유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시공간의 순서로 묘사하다 보니 이 세 가지의 경계가 또렷한 듯하지만, 사실 ‘한계, 좌절, 자유’의 경계는 수채화로 채색된
목사가 가지는 가장 잘못된 사고는 자신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 교회를 잘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생각을 해보라. 이렇게 하지 않는 교회가 과연 있는가?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사고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 역시 없다. 그래서 교회의 불행은 반복된다.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라는 사고가 불식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질 기미도 없다.나는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요리를 하고 아내는 그것을 먹은 후 뒷정리를 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뒷정리가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비교의식에 절어 있는 것이다.
어제 갑자기 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갑작스런 만남이었다. 대화 중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목사가 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목사는 유학을 마친 후 모진 고생을 했다.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목사의 고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잘 된 일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일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부러움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청빙을 받을 때가 지났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
#명성 새벽 회동 후에 혹시 의대 정원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닐까#윤석열은 지난 3월 31일 명성에서 모인 부활절 새벽 집회의 축사를 맡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갈라디아서를 인용하며 ‘자유’를 말했다고 하는데 이승만 이야기도 나왔다는게 전언이다. 동영상이 돌고 있지만 차마 볼 비위가 없어 시청 안했기에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다. 전제 왕조 시절을 포함해 제 백성을 가장 많이 학살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이승만은 최근 ‘건국전쟁’을 통해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관람 독려가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고
‘파묘’(장재현 감독)는 오컬트 영화의 문법을 따르지만 두려움만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 초반 LA사는 한인 부자의 요청으로 무당 이화림(김고은 분)과 법사 윤봉길(이도현분)은 미국으로 향한다. 이화림과 윤봉길은 모두 독립운동가의 이름으로 역사 속 두 사람은 윤봉길의 훙커우 거사 당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활동했었다. 영화에서도 이 둘은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준다.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의 숭현학교에서 공부한 이화림은 중국으로 건나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조선 공산당에 가입한 것을
여당인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가 추락하고 야당인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에 대한 지지의 상승세가 뚜렷한 추세다. 그만큼 총선의 정권 심판 열기가 뜨겁다. 이 같은 열기가 지난 2년간의 윤석열 정권 국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심판의 표출 현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그런데 분출하는 국민들의 심판 기세를 다른 어느 언론보다도 제대로 전해야 하는 매체로 기대되는 한겨레의 일부 칼럼들은 그 같은 열기를 비이성적 광풍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대중들을 불나방처럼 뛰어들게 하는 비정상적인 불길을 꺼야겠다는 의도가 보인다.이 신문에는 대중들의 열기에
# 정말 패트릭 성자가 위스키를 처음 만들었을까? #Whisky와 Whiskey, 그리고 와인의 차이는?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성 파트리치오(386년 ~ 461년)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가 별세한 3월 17일을 축일로 지키며 온갖 초록색으로 이날을 축하한다. 아일랜드 계열이 많은 지역에서는 성대한 축제가 행해지지만 대개의 지역에서는 무심히 지나가는데 의외로 한국에서도 지난 2001년부터 생패트릭 행사를 갖는다.성 파트리치오는 16살에
요즘 불교적 방법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방법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고 있다.한 고승이 토굴에서 도를 닦고 있는데 똑똑한 사람이 찾아와서 ‘그렇게 수행만 하는 것은 인생 허비 아니냐?’고 묻자 “왜 길고 큰 살림을 금생(이번 생)의 살림으로만 한정하느냐? 성불해서 중생을 도울 지혜만 갖출 수 있게 된다면 천생 만생을 들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고해 중생들이 있을 것이다. 남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느냐?”고 했다고 한다.참! 여유 있어 좋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옆에
얼마 전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출교 시켰다는 뉴스를 보았다. 교파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흑역사를 갱신해 가는 한국 개신교계의 꾸준함에 새삼 감탄할 뿐이다. 다양함이, 다름이 아직도 존중받지 못하고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전락하는 이런 사건들이 지금 내가 사는 이 시대에 아직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이런 사건들을 접하다 보면 너무 사랑해서 미워한다거나 너무 좋아해서 멀리 한다는 역설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마치 어느 순간 ‘하늘’이
최근 나는 이라는 글을 쓰고 그에 따른 글을 연속적으로 쓰고 있다. 최근 우리는 JMS나 얼마 전 죽은 이재록이나 아가동산과 같은 이단들의 이야기를 넷플릭스를 통해 확인하고 이단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넷플릭스도 신천지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아마도 그들이 가진 힘과 영향력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천지라는 이름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의 입구에 명시되어 있다.“신천지인들의 출입을 금합니다.”나는 이런 글을 써 붙여야 할 만큼 신천지가 골칫덩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올해 2월, 한 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유명 연예인이 연사로 나섰다.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 말라. 인생은 독고다이다.” 개인의 추구를 관계 단절과 함께 선언한 그녀의 말은 현대성의 얄팍하고 무책임한 신화를 여실히 보여 준다. 타자와의 관계를 떠나 제 인생을 영위하라는 교훈을 수많은 매체를 통해 듣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균일화된 문화를 뚫고 나갈 힘이 없다.파편화된 개인들은 서로를 가리고 있는 파티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남몰래 갈망하지만, 공공의 돌파구를 발견할 수 없는 현실 난관에 쉽사리 봉착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
2011년 초판이 나온 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그 해 창비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2024년 김희진 감독에 의해 연출된 넷플릭스 영화 ‘내 이름은 로기완’은 소설과 많은 부분 다르다. 소설에서는 다규멘터리 작가 ‘나’가 로기완의 일기를 추적하면서 난민 즉 한 탈북민 청년과 그가 마주친 사람들의 관계를 다룬다. 반면 영화는 ‘마리’라는 인물을 추가해 두 사람이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낯선 나라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완성을 두고 영화가 난민 문제보다는 판타지로 흘렀다고 보는 비판들이 많다.하지만 영화는 장르적 특징
성서에서 야곱은 교활한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가 세상과 먼저 만나는 것을 질투해 발꿈치를 잡았고, 사냥에서 돌아온 형에게 팥죽을 대접하면서 장자권을 갈취했으며,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까지 받아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까지 주며 축복한다. 도대체 왜?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된 뒤 가인은 죽음과 경쟁이 없던 낙원의 이야기를 부모에게 들으며 그곳을 이상향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들어 알고 있던 낙원과 달리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며 아벨과 경쟁구도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믿어왔던 것이
나는 최근 미래 교육비전이 지향해야 할 과제의 하나로 행복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행복 교육의 실현을 위해 지금까지 한국교육이 바탕으로 삼아왔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학생들을 교과성적 등 한 두 가지 요소로 평가하여 서열화하는 체계를 극복하고, 학생 주도로 자존감을 바탕으로 다양한 능력과 관심, 꿈이나 끼를 살려 나가도록 지원해야 한다. 학생에게 지식이나 기능만 채워 ‘산업인재’를 공급하는 것으로 교육이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 이웃과의 관계, 세계에 대한 관심과 참여
오래 전 일이다. 한 수도원에서 가톨릭대학 교수인 신부님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나를 초대했던 신부님이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주셨다. 유무상통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결과적으로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설명을 듣고 교수 신부님은 “그러면 교단에서 목사님 월급을 주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개신교의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그분에게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리고 사실 그런 위험이 없이 가톨릭교회라는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신부님들이 부럽기도 했다. 실제로
최근에 나보다 나이가 좀더 있으신 지인으로부터 그분 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었는데, 이민와서 교회를 한번도 안나가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위급하셔서 병원에 계신동안, 연락할 별다른 사람이 많지 않아 지인분에게 연락이 왔고, 내 지인은 친구에게 각종 죽과 음식을 만들어 병원으로 갖다주었다. 장례에 올만한 지인들이 많지 않아 가족장으로 작게 장례식을 치렀다고.아마도 오랜 이민생활을 하셨을 그분은 그 세월간 어떤 이들과 마음을 나누셨을까. 비지니스를 하면 그 네트워크가 필요해서, 그렇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