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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는 자매가 스킨십을 너무 잘해서...

Q. 질문 드리기가 좀 민망합니다만, 저는 스킨십을 해보질 않아서요. 얼마 전 사귀는 자매와 키스를 한 적이 있는데 너무 잘해서 성 경험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매는 여러 남자와 교제했었다고 하더군요.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다 싶어서요. 만약 성관계를 했다 하더라도 교제를 기피할 사유는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좀 찝찝한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얘기를 더 늦기 전에 터놓고 해보는 건 어떨지요?

A. 양가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좀 '찝찝한' 느낌과 다른 한편 좀 구차하다는 생각이 공존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이는 결국 인간관계의 양대 요소가 지니는 역설성 내지 길항성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찝찝한 느낌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동인에서 나오는 "경계선" 수호(boundary closing/defense)와 연관된 문제로서 '혹시 내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아가서 '상대방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보호본능에서 비롯되는 의구심 내지 불신의 정서라 하겠습니다. 반대로 구차한 느낌은 상대방을 보호하고 품고자 하는 동인 곧 내 경계선을 개방하고 확장(boundary opening/expansion)함으로써 상대방과 "관계선"을 강화해 나가려는 노력과 연관된 문제로서 '내가 이 정도도 용납해 주지 못하는 존재이던가' 내지 '이 정도의 상처는 감수할 수 있어야 우리의 사랑이 여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등등의 당위(當爲)에서 비롯되는 자격지심 내지 미안함의 정서일 것입니다. 

(사진: SBS 드라마 '닥터스')

사실 자아 경계선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동인과 경계선을 허물어서 상대방과의 관계선을 강화해 나가고자 하는 동인은 인간관계의 필요불가결한 두 요소로서, 둘 다 모두 소중한 것이며 비난받아서는 결코 안 되겠지만, 이 둘이 서로 길항적이기에 불가피 야기되는 내적 갈등과 긴장을 여하히 조정하고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경계선'을 지키려다 보면 '관계선'이 위축되고, 관계선을 확장하려다 보면 경계선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 미성년의 자녀를 상대해야 하는 부모라면 자신의 경계선을 희생하더라도 자녀와의 관계선을 강화하여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나아가는 성장과 독립의 과정을 촉진시켜야 하는 것이 무릇 부모된 이들의 책무겠지만, 성년들 사이의 일대일(mutuality) 관계에서는 경계선과 관계선 사이의 긴장을 잘 다루지 않으면 오히려 관계의 진전이 멈추거나 어느새 관계는 일방적이 되어 무의미하거나 유지조차 하기 힘들어집니다. 빚을 지더라도 주거니 받거니 하고, 피차 은혜를 끼칠 수 있어야 우정이 오래 간다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고 봅니다. 더구나 결혼 관계와 같이 '흠없고 티없는' 순결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 상호신뢰를 의심하게 하는 조그만 조짐이라도 조기에 차단하지 않으면 후에는 신뢰를 완전히 금가게 하고 관계 전체를 균열시키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남녀 사이는 물론 제반 의미 있는 인간관계는 상호 신뢰의 기초 위에서 사랑과 우정의 구조물을 지어가는 건축 과정에 비교할 수 있을 텐데, 신뢰란 어느 정도는 일방적으로 믿어주고 들어가야 하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또 반대로 쌍방적으로 상호존중과 상호용납을 반복해서 실천하는 가운데 장애물들을 골라내고 물과 거름을 주면서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 양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남녀 사이의 데이트 관계와 그 절정에 해당하는 결혼 관계 역시 첫 눈에 반한다는 표현처럼 일순간의 선택으로 급친밀한 관계가 생겨나게 되는 선물과 같은 측면이 있지만, 일단 관계가 형성된 후 끊임없이 그 첫사랑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피차 용납하고 보듬어 주는 의지적인 과정을 겪으며 다듬어지고 완성되어 간다는 점에서는 노력의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할 요소가 바로 믿어주고 또 받아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서로 믿어주는 상호 신뢰가 사랑의 한 축이라면, 서로 용서하는 상호 용납은 사랑의 다른 한 축이라 하겠습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한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를 인정하고, 과거의 불가피한 상황을 헤아려 주며, 나아가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고 긍휼히 여기고 믿어주는 데까지 나아가야만 사랑은 온전해 집니다. 

의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팩트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거리낌이 확실한 정보나 증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일단은 믿어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심증이란 어디까지나 마음 안에 담아 두어야 하는 것이지, 물증이 없는 채로 의심을 마음 밖으로 쏟아 놓게 되면 해결책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혼란이 가중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관계란 쌍방적인 것이어서 내 안에 거리낌이 생기면 [둘의] 관계에 거리낌이 생긴 것이며, 상대방 안에 의심이 있으면 [둘의] 관계 역시 의심스러운 관계로 변해 가게 마련인 점을 감안하면 어떤 식이든 이런 부정적인 정서를 걸러내지 않으면 자칫 관계가 소강상태로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심의 작은 구름은 때로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의 큰 광명 앞에 맥을 못 추고 사라지는 법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체, 들어도 못 들은 체 넘어가 주는 것이 내 자신의 경계선을 고집스레 고수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상대방을 용납하는 효과적인 통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반대로, 상대방에게 의심을 살만한 거리낌의 요인이 내 안에 있을 경우, 먼저 나서서 고백함으로써 불신의 구름을 미리 걷어 내는 것 역시 내 경계선을 자발적으로 허물고 내어줌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용납하기 용이하도록 도울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스킨십 "문제"는 신체적인 접촉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기초석인 신뢰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기에 더욱 부담스럽고 또 때로는 즉각적인 위기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사실 스킨십이란 바로 결혼관계의 핵심인 상호 간의 신뢰와 헌신을 신체적인 행위로 전달하는 것이기에 이런 의심 내지 불신은 본질적이고 즉각적인 위기상황을 야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스킨십이란 육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결국은 관계의 문제, 그리고 신뢰와 헌신의 크기를 나타내는 지표이자 상징이기 때문이지요. 과거 스킨십의 경험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죄책 내지 가책으로, 상대에게는 불신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음을 당시에는 아마 감안할 수도 또 감안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스킨십이란 조심 또 조심하지 않으면 나의 미래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미래를 가로막는 먹구름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소위 "잘 쓰면 약이지만 잘 못 쓰면 독이 되는" 것 가운데 인간의 섹스보다 더 보편적이고 치명적인 것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성적 경험이 지금의 결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하는 문제는 오래 전 소설 "테스"를 위시하여 인간 사회에서 줄기차게 다루어 온 보편적인 주제인 셈이지만, 그 해결책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특히 고도의 친밀한 관계인 한 몸 관계(결혼 관계)에서 신뢰와 사랑이 지니는 쌍방적이고도[/쌍방적이기에] 미묘하고 섬세한 속성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즉 신뢰란 일방적인 믿음만으론 불안정하며 쌍방적인 고백과 용납이 수반되어야 완전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매한가지로 사랑 역시 일방적인 긍휼과 자비만으론 불완전하며 때로는 과거를 묻지 않고 대담하게 믿어주어야 하지만 또 때로는 미래를 향해 한 마음으로 걸음을 내어 딛기 위해 담대하게 과거를 털고 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쌍방적인 내어줌과 받아들임을 위해서는 때로 수치스러움과 구차스러움을 넘어서서 용기를 내어야 하며, 그런 용기는 어떤 맥락에서든 일단은 격려를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관계 내지 인격적인 사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결혼관계의 아름다움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한 마디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서로 내어 보이고 그리고 그 있는 그대로를 [보고서도] 하나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관계, 그런 투명한 용납이 바로 "순결"한 관계입니다. 인간에게만 독특한 고상한 정서를 꼽으라면 아마도 "수치스러움" 또는 가책, 죄의식 등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 때로 후안무치(厚顔無恥) 또는 파렴치(破廉恥)한 인간을 금수보다 못하게 취급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수치심은 그에 상응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고행을 한다고 해서 상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은폐하거나 망각함으로 치유되거나 회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적어도 나의 분신이라고 할 만큼 지근거리에 있는 그 한 사람만은 나의 수치를 알고도 나를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용납할 때에야 비로소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용납과 용서가 한 순간에 일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아무리 바둑 고수라 하여도, 대국의 종료 후 자신의 실수 지점을 찾기 위해 우선 복기(復棋)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쌍방적인 신뢰의 기초를 다지고 사랑의 구조물을 쌓아올리는 데에 수고와 시간이 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은 결혼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상호 신뢰와 용납을 통해 기초를 다지는 것이 도리어 완전한 결혼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사실 결혼 관계란 바로 이 한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에 다름 아니라 하겠습니다. 적어도 그 한 사람에게는 나를 부끄럼 없이 다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반대로 그는 또 내게 부끄럼 없이 뭐든 다 내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서 일생 해로할 때까지 피차 반려자가 되고 분신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결혼이 아니겠습니까? 결혼의 개념이 이러할진대, 뭔가 찜찜함을 안고 신뢰의 기초가 충분히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하고 심지어 자녀까지 출산한다면, 이는 무늬만의 결혼, 주객이 전도된 결혼, 뭔가의 수단으로 전락한 결혼이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결혼의 개념상, 그런 관계는 진정한 의미의 결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본질인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투명한 친밀함이 확보되지 않은 채 결혼의 외현 내지 결과물에 해당하는 기능만 그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질문하신 분 안에 생겨난 의심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데이트를 넘어 결혼으로 들어가기 위한 중요 준비작업인 셈이며 결코 공연히 끼어 든 걸림돌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주지하는 데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스킨십이란 이처럼 결혼관계의 배타적인 속성과 직결되어 있으며, 섹스란 그저 일시적인 쾌락의 스캔들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감히 비교가 안 되는 숭고한 차원에서 관계 전체의 맥락과 맞물려있는 상징적인 행위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성적인 영역과 연관된 의심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며, 두 사람의 관계 곧 "우리"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센 표현인 듯합니다만, 이렇게 보면 "찝찝함"이란 정서적인 거부감의 촉발은 관계의 본질을 오히려 들여다보게 해 준다 하겠으며, 데이트와 결혼 관계의 정곡을 드러내 보이는 기회일 수 있겠습니다. 

해서 당면한 상황에서 질문자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떳떳하고 또 긴장을 줄이는 방법일지 선뜻 결론을 내리기란 쉽지 않아 보이며, 또 어떤 쪽을 선택하든 갈등과 위험 요소가 불가피하게 수반할 것으로 보입니다. 직접 직면하여 사안을 거론한다면 신뢰 회복을 위한 의심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관계를 다시 쌓기 위해서는 훨씬 더 긴 과정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의심을 안고 관계를 쌓아올리기로 한다면 후에 신뢰의 기초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위험을 감수해야할 것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 곧 '벌거벗는'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리고 바로 그 '부끄러움 없는'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 스킨십의 참 의미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지 이보다 더 대략난감한 상황도 드물 것입니다. 

원론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보자면, 경계선을 지키려다 관계선이 위축되어선 안 될 것이며 반대로 관계선을 강화하려다 경계선이 허물어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불신을 걷어내려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관계가 위축되다 못해 파탄에 이르는 역효과가 나선 안 되며, 그렇다고 불신을 묵혀 두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결국 감당 못하고 [내 편에서] 나가 떨어져서도 안 될 일입니다. 결국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연합이란 목표는 동일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은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종합해 보자면, 결혼과 섹스에 대한 두 사람의 관점이나 이해의 차이 그리고 두 사람이 느끼는 친밀함의 정도와 보조, 또한 기질차나 소통 방식의 차이 등을 고려하여 대처 방안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간에, 결혼 서약을 앞 둔 어느 시점에선가, 적어도 결혼 초야 촛불을 끄기 전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불신을 잠재우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모멘텀을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디테일을 다 건드릴 필요까지는 없을지라도, 과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고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하고 다짐하는 사랑의 고백에 진정성이 담길 만큼은 서로를 '벌거벗겨' 내놓는 '역사적' 분기점을 만들어 두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혹 이후에 또 불신과 오해의 소지가 생겨날지라도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되돌아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데이트와 결혼의 과제가 이와 같은 인생의 배수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조건 없는 사랑의 원천(源泉)을 함께 마련하는 것일진대, 무엇이 그리 '찝찝하고' 또 무엇이 그리 '구차하다' 하겠습니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결국 결승선을 통과할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권영석  newsnjoy@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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