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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광해, 의자, 그리고 정조

우리는 흔히 로마제국 제5대 황제였던 ‘네로’를 백성을 괴롭히고 기독교를 탄압하며 로마시를 불태운 무자비한 폭군 내지 정신이상자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귀족세력의 횡포에 맞서 민중의 권익을 도모한 개혁가요, 로마의 문화를 융성시킨 인물이라는 평가가 근래 들어 주를 이루고 있다. 네로 황제는 공화정 시기부터 로마의 권력을 좌지우지해온 원로원 세력을 약화시켜 황제권을 강화하며, 일반 시민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며 식량공급을 원활히 하는 등 서민 지향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고 한다. 또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며 웅변가였던 ‘세네카’의 도움을 받아 문화를 발전시키는 등 로마제국 초기 정치, 사회질서를 안정화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도 네로의 치세기간 동안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그가 로마서 13장에서 ‘권위에 순종하라’고 권면한 것도 이러한 네로의 민중친화정책을 높이 평가해 그 영향력으로 기독교 선교를 확장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가 분한 로마제국 제5대 황제 네로

그러나 네로의 개혁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적들과의 싸움에 휘말려 그는 점점 독선적이고 파괴적으로 변해갔다. 시시때때로 저항하고 도전하는 원로원, 귀족세력에 맞서 그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공포정치를 단행하여 이복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제거하고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와 아내 ‘옥타비아’마저 살상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아울러 64년에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인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소수 종교인 기독교에 책임을 뒤집어 씌워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일찍이 네로의 선정에 호감을 느꼈던 바울사도도 이때의 박해로 순교를 당한다. 결국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반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고 얼마 후 자살로 최후를 맞게 된다. 외부의 압력과 본인의 역량 부족으로 원래 갖고 있던 선한 의도를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자신의 굴레에 갇혀버려 몰락을 초래한 안타까운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집권 초기에는 과감한 개혁 정치를 추구하지만 주변의 반대와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린 사례를 역사에서 또 찾는다면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이 대표적인 케이스일 것이다. 광해 역시 비주류 출신으로 왕위에 올라 백성을 위한 개혁정책을 펼치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견디지 못해 실정을 일삼다가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것이 네로 황제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선조의 서자 출신으로 임진왜란의 와중에 세자로 책봉되어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인정은커녕 부왕과 중신들로부터 견제와 냉대를 받아야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왕위에 올라서도 전후복구사업에 집중하며 호패제도 정비, 대동법 실시 등 민생안정에 주력하였다. 또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펼쳐 국가안위를 도모하는 등 여러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서인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적절히 대응치 못하고 당쟁에 휘말려 자신의 왕위를 보전하기에 급급해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다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연산군’과 함께 조선의 최악의 군주라는 오명을 남기게 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배우 ‘이병헌’이 분한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도 위의 두 군주와 비슷한 인생, 정치역정을 밟았다. 변방 출신의 ‘무왕(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온갖 고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사비성의 정통귀족관료들로부터 심한 질시와 견제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비주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치세 초기에는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고 신라를 자주 공격해 삼국통일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차츰 자기도취와 안일주의에 빠져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하고 국방을 소홀히 하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다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나라가 멸망하는 치욕을 맛보게 된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광해군이나 의자왕, 네로황제 모두 국가와 국민을 위한 선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현실정치에 적용시키려 노력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과 이들에 대한 투쟁, 그리고 거기서 파생돼 나온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 등으로 초심을 잃고 방황과 갈등을 반복하다가 자신도 망가지고 국가와 백성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끼치는 지극히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전혀 다른 길을 간 한 위대한 군주가 있으니 바로 조선 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11살 때 당시 극심한 당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자신 역시 생명의 위협을 무수히 당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마음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입어 불면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조’의 강력한 후원과 보호 하에 보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정체성과 앞으로 나아갈 바를 분명히 명시한다. 정조의 이러한 일성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 세력에 대한 처절한 응징과 일대 파란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그는 결코 복수의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정적들을 모두 포용해 국정의 동반자로 삼는 과단성을 발휘했다. 2009년에 발견된 ‘정조서찰’은 그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서며 자신의 왕위계승을 끝까지 방해한 노론의 영수 ‘심환지’와도 긴밀히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영화 <역린>에서 배우 ‘현빈’이 분한 조선 22대 왕 정조

이처럼 모든 당파세력과의 화해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룬 정조는 ‘규장각’을 설립해 학문을 발전시키고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하여 시전(市廛) 상인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 자유시장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등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또 비록 당대에는 실시되지 않았지만 서얼간의 차별금지와 노비제도철폐를 주창하여 모든 만민이 평등한 근대사회로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18세기 후반은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 등 전세계적으로 민주, 민권의식이 크게 고양된 시기였는데 극동의 변방 조선에도 정조 같은 개혁군주가 있어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파를 초월해 정적까지 포용하고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는 항상 병마에 시달렸으며 특히 종기를 심하게 앓아 죽음에까지 이르게 됐다. 일각에서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노론세력에 의한 독살이라 보고 있으나 오랜 마음고생과 격무로 인한 심한 스트레스가 정조의 사망원인이라는 것이 역사의 정설이다.

이와 같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외부의 저항이나 압력에 직면해 이에 적절히 대응치 못하고 자신의 주관과 감정에만 매달려 첨예한 대결과 갈등만 일삼는다면 지위를 보전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와 국민에 크나큰 피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반면에 정조처럼 자신의 한과 상처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감싸 안고 정적까지 용서하며 함께하는 큰 정치를 펼칠 때 백성이 행복하고 나라가 융성하며 그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는다는 사실 또한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 15장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처럼 꺾기 힘든 자존심을 꺾고 죽기 힘든 자아가 죽을 때, 모든 수치와 모욕을 철저히 인내하며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마침내 하늘 문이 열려 간절했던 바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모든 이성과 감정을 초월하여 나 자신을 겸손히 낮출 때 하나님은 나를 높이셔서 당신의 위대한 사업에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이준수 목사 / 남가주밀알선교단 영성문화사역팀장

이준수  newsnjoy@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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