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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으로의 여정, 철학이 묻고 신학이 답하다.박성일 목사와 강영안 교수의 C. S. 루이스 대담

필라델피아 기쁨의 교회(담임목사 박성일)에서는 지난 9월 1일(토) 오후 7시에 박성일목사가 쓴 『C.S.루이스가 안내하는 순례자의 길: 본향으로의 여정』출판기념으로 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주제는 “본향으로의 여정: 철학이 묻고 신학이 답하다”였다.

철학자인 강영안 교수(현, 칼빈신학교 철학신학 교수)가 질문을 하고 신학자인 박성일 목사(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 겸임교수)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내용은 루이스가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의 본향의 개념, 희열(Joy)과 기쁨(Delight), 천국과 지옥, 사랑, 기도 등이다. 루이스의 저서들을 연구해 학위 논문을 받은 박성일 목사의 이번 신간은 인간의 궁극적인 종착지인 본향을 향한 인생 여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을 포함한 루이스의 전반적인 신학사상을 놓고 두 학자가 대담을 펼쳤다.

아래는 강영안 교수와 박성일 목사의 대담 내용이다.

순전한 기독교

강: 첫 질문으로 그 많은 신학자 연구주제 가운데 어떻게 C.S.루이스를 선택했고, 이 주제 "본향으로 가는 여정"을 택했는지 말해 달라.

박: C.S.루이스를 선택한 이유는 내 인생에서 루이스가 중요한 은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던 어머니가 중심이 된 가정에서 자랐고 청소년기에 교회 수련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하지만 대학시절에 홀로 힘들게 지적인 방황을 했다. ‘내가 믿던 것을 확인할 수 없던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란 책을 발견했다. 책 제목에 끌려서 읽다보니까 이 분의 논리에 의해 설득 된다는 것과 내 신앙을 대변해 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반가웠고, 그 분의 책이 나를 신앙의 지적 방황에서 빠져나오는데 도움이 되었다.

강: 내가 벨기에에서 공부할 때에 『Christian Reflection(기독교적 숙고)』이란 책을 만났고, 그를 신앙의 변증학자로 이해했다. 특별히 ‘신앙의 여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정한 이유가 있는가?

박: 처음부터 ‘신앙의 여정’이라고 정한 것은 아니고, 논문 작성을 위해 그의 책들을 주해하듯이 읽다가 루이스가 공통적으로 상용하는 패러다임이 ‘여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본향을 향한 인생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앙의 여정’이 그것을 연결하는 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 박 목사가 쓴 책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이 루이스의 글들을 여정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 방 저 방을 거처 가는 방식으로 집이 잘 지어진 탁월한 건축가라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용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면서 루이스의 여러 작품들을 여정이라는 주제로 잘 꿰었다. ‘왜 본향인가?’ ‘우리는 항상 고향을 생각하는데 왜 본향인가?’

박: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데다 몸도 불편했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불행한 인생이었지만 사색이 깊은 아이였고 독서를 많이 했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가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라는 자각을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욕망에는 세상에 답이 있다. 배고프면 먹을 대상이 있고, 목이 마르며 마실 것이 있는데 루이스는 어느 것도 채워줄 수 없는 욕망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결론을 내기를 ‘우리가 현 세상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닌가 보다.’라는 것이었다. 세상적인 것, 인간적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채워진다’는 어거스틴의 말과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Joy vs Delight

강: 그 주제와 관련되는 것이 ‘죠이(joy)’, 이것과 관계되는 것이 ‘기쁨(delight)’인데 joy를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본향에 대한 것을 그리워하는 심적인 상태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 영어로 쓰인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joy’를 ‘기쁨’이라고 표현하지 않기 위해 ‘희열’로 번역했다. 천국은 컵이 차서 거품이 흘러넘치는 것과 같고, 넘쳐서 뚝뚝 떨어지는 그 방울을 받아먹는 순간은 마치 말씀을 들을 때의 기쁨인데 문제는 아직은 거기에 가지 않았다.

은혜가 오래 가지 않는 것이나 은혜를 받을수록 이면의 공허함이 클 수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은 장차 우리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완전한 기쁨의 그림자로 일종의 서글픔이다. 아직 내가 거기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을 기억하면 아름답지만 한 편으로 슬픈 것이 이 joy 안에 들어 있다.

강: 칸트가 ‘향수’를 풀면서 특별히 알프스 산록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로 나와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쓰는데 잘 사는 곳에서는 향수가 안 생긴다고 한다. 어떤 결핍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고향에 대한 마음, 즉 과거의 좋은 시절에 대한 경험인데 독특하게도 루이스의 joy라는 개념, 동경의 마음의 독특성은 가보지 못하고 이르지 못한 고향에 대한 향수이다. 세상에 있지 않는 것이다.

트로이 목마를 만든 오디세우스가 자기 집을 떠나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품은 마음이 ‘향수병’이라고 말한다. 루이스의 고향은 어렸을 때 잘 살았다. 그런데 ‘루이스의 본향’은 살았던 고향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곳이라고 보면, 이것은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삶과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박: 다른 하나는 ‘장소의 개념’도 있지만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존재적 상태,’ 즉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우리 존재 안에 있어서 우리 자체에게 힌트가 주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joy이고 도덕성, 자연의 웅장함, 또 인간 자기 내면에 그려져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래서 이미 있는 이 퍼즐이 다 맞춰졌을 때에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다.

깨어진 실낙원을 퍼즐처럼 맞춰나가는 상태, 즉 우리의 존재 가장 깊은 영원 속으로 점점 더 들어가는 것이다.

강: 그런 마음의 진공을 채우고자 하는 갈망들이 우리 속에 있는데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다른 어떤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하고, 그런 대용물로 가득 차게 되는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박: 루이스가 쓴 『Mere Christianity』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것을 끝까지 시도하면서 갈 때까지 가는 것,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그의 마음을 채울 수 없고, 회의주의는 그냥 다 포기하고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 쾌락이 주어졌을 때에 거기에서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하지 않고 장차 우리에게 올 것에 대한 샘플로 충분이 누리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서 신앙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그 날을 기대를 하고 사는 것이다.” 그 순간을 기쁘게 받고 완성된 약속의 나라를 더 갈망하게 된다.

강: ‘여정이 끝나는 그 순간에 만나는 장소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본향이다’라고 동의한다.

박: 이것을 우리는 ‘Already But Not Yet’으로 표현한다. 루이스는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내용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자연 속에서 찾는 아름다움과 문화 추구를 루이스는 귀하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도 크리스천이라 훨씬 더 깊이 누릴 수 있는 존재이고, 루이스가 이런 부분을 많이 고민한 것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강: ‘향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우리가 타향살이라는 것인데 ‘그 타향살이를 루이스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박: 내가 쓴 책 3장에 보면,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본향을 떠나 살고 있는 삶, 타향살이에서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도 본향에 대한 싸인이 많이 들어있다. 그것은 ‘방황’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첫 번째, 회심의 단계는 본향을 향해서 우리의 삶을 돌리는 것인데, 복음을 접하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home away from home’이다. 교회, 성경,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과 우리를 이탈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있다. ‘final home’은 한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에 대한 것을 성경과 연결해 설명해준다.”

지옥도 본향이 될 수 있는가?

강: 우리가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질문을 하는데 루이스 관점에서 지옥도 본향이 될 수 있는가?

박: 루이스는 죽는 순간에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지옥에 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이미 천국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나누어지는 단계가 되지만, 지금은 이 두 가지가 섞여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천국이 시작되었고, 영속성이 있어서 점점 더 높아지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옥의 자물쇠

강: 천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곳이 천국이고 없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은 하나님이 없는 삶이다.

박: 루이스는 ‘지옥은 안에서부터 잠겨 있다. 지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무런 완충장치(buffer)없이 나타나서 태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지금이 지옥인 것이고, 안에서 잠겨 있는 것이고, 자기의 뜻대로 고립되는 것이지, 타인에 의해 고립되는 것이 아니다.

강: 그럼 “하나님을 떠나 있다”와 “인간의 죄를 이해하는 방식”이 직접 연관이 안되지 않는가? 내가 나쁜 짓 한 것이 아니라도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면 천국을 맛보지 못하는 것인가? 예수 안 믿는다고 지옥을 가는가? 그 배경에서 보면 하나님과 떨어진 삶에 대한 이해가 달라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행위 보다는 관계, 존재를 더 중요한 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박: 루이스는 자기에게 완전히 치중되고 집중된 것을 죄의 모습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되어 있었다.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강: 죄는 나쁜 일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이다. 그래서 죄의 원인은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교만은 다른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것 정도가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너에게 좋은 것과 악한 것’을 하나님이 결정해주시겠다는 것인데, ‘그 결정권이 내게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회심이 어떻게 가능한가?”

박: ‘회심은 죽음이다.’ 루이스는 “선한 죽음(good death)”이라고 말한다.

사랑도 죽어야 한다

강: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죽고 다시 산다’라고 보면, 우리의 삶의 동기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내가 더 나아가는 것인가?’

박: 루이스는 사랑이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자유함과 인격적 해방감이 있는데 끊임없이 얽매려는 집착으로 결국은 내가 사랑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결국은 사랑도 죽어야 한다.”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루이스는 사랑은 ‘스톨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로 표현한다. 루이스는 아가페가 이것을 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스톨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면 아가페가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에로스도 십자가를 통과하면 아가페가 된다고 한다.

강: 우리의 삶은 고향으로 걸어가는 여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걸어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수단이 있다. 교회, 성경, 기도, 헌신 등인데 그 가운데 각종 유혹이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왜 중요한가?

박: 이 질문이 목회자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라서 마치 “공기가 무엇이냐?”는 질문과 같다. 루이스는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리더십을 말하는데 정치적인 개념 및 사고까지 포함한다. 그는 ‘교회는 내 자신이 원해서 하고 싶은 것을 구현해 내는 현장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변화를 경험하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성화를 많이 강조한다.

산을 옮길 만한 기도

강: 기도는 어떤 것인가?

박: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동시에 체험하는 장이다. 기도는 단순한 행위 같지만, 아버지께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것이기에 하나님과의 가장 깊은 연합을 경험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응답 받는 기도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깊이 고민한다. ‘산을 옮기는 믿음의 기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루이스는 ‘동역의 기도’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루고자 하시는 기도에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동역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기도는 여전히 어렵다고 말한다.

강: 우리는 대부분 청원기도를 하는데 기도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런 기도를 저급하게 여기는데 이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박: 루이스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말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 ‘실제로 거리가 가깝다(교통)’라고 양면을 다 말하고 있다.

강: 루이스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예수 잘 믿으면 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가?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있겠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가?'라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박: 루이스가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은 자이다. 생물학적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은 자이다

강: 루이스는 본향 쪽에서 우리를 이끄는 목적론적인 생각을 말한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생각을 하는 것에 익숙한데, 루이스는 목적론적 생각이다. 목적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은혜이다. 그러나 이것을 표현할 때에는 ‘성례전적’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대속의 위대한 목적을 성례로 이끌어 준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느냐?’는 것도 하나님이 목적론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청중질문: 본향으로 가는 길이 길고 위험하고, 어려웠고, 돌아가게 하고 그래서 힘든 삶을 즐기자고 했는데 하나님의 조건과 방식을 내가 통과해야 갈 수 있는 것인가?

박: 루이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고, 이것은 새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은 여러 가지 환란으로 잠시 근심하지만 우리는 더욱 기뻐하도다’라고 베드로가 한 말이 있다. 결국은 믿고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다. 그러면 ‘뭔가 우리를 붙들어주는 하나님의 실제가 있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라고 믿고 가는 것이다.

강: ‘믿음’은 히브리어로 ‘아무나’이다. ‘단단하다.’, ‘견고하다.’의 의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땅이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삶이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본 글은 필라델피아 기쁨의교회 손갑원 장로가 대담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손갑원 장로  newsnjoy@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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