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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섬김이다?가난과 가난한 자의 기준에 관한 최태선 목사의 답글
사진출처: 네이버 포스트(도서출판 동녘)

"가난이 섬김이다!" 라고 선포하셨는데... 묵상하시면서 가난한 자 또는 가난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이 평강이 목사님께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제 글을 읽고 Boaz Kim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단 댓글입니다. 먼저 진지한 댓글을 달아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빌어주시는 평안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가난은 재물을 미워하는 일에 해당합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재물을 미워해야 하고,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재물을 경히 여겨야 그것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올곧은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옛 이스라엘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명확한 주님의 말씀을 에둘러가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느낌표까지 찍어가며 가난이 섬김이라는 선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와 가난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가난의 기준 역시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래 전 자끄 엘륄로부터 성서가 말하는 가난의 정의를 배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성서가 말하는 가난을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로 정의했습니다. 저는 그 상태를 짐작하지도 못하면서도 그의 말에 동의하고 가난하게 해주십사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매우 진지하게 그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대로 저는 가진 재산을 모두 잃고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기도를 해왔으면서도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진 가난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가난은 격렬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한 5년 쯤 지나자 제 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일어난 상황이 바로 기도의 응답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가난이 이런 것인 줄 미리 알았다면 가난하게 해주십사는 기도를 감히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난은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 무서워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대인기피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런 기간들을 간신히 감내하고 조금씩 내게 닥친 상황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깨달음이 시작되자 모든 것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난이 늘 가져오는 불편함과 다른 이들의 무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가난이란 참혹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저는 조금씩 정신을 차릴 여유도 생겼습니다. 가장 현저한 변화는 저도 모르게 제 안에서 이루어진 존재의 변화였습니다. 저는 저의 필요보다 다른 이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이의 아픔을, 권정생 선생님 만큼 절절하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전과 다르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생겨났고, 무엇보다 가진 자들의 오만함과 사회의 구조 자체가 얼마나 불의한 희생의 체제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공평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배우고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왜 예수님께서 복음이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다고 말씀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냥 은혜가 아니라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가난이 제게 준 가장 큰 믿음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이 하나님 섬김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선포했던 것입니다.

제게 가난의 기준은 둘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에서 보는 것처럼 그분은 모든 것을 비우셨습니다(케노시스). 그것은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났는데 그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어 그분의 마지막 살 한 조각, 피 한 방울까지 다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 가난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가난의 기준은 그래서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 역시 제 가난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리스도인이 과정적인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 역시 과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표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향점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저를 쳐서 복종시키며 부 하려는 저의 마음을 다스립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작게라도 그분과 내가 가진 것을 나눕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제가 아직도 얼마나 부자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저를 부끄럽게 여기며 다시금 지향점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날마다 내려가는 저의 삶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저의 하나님 섬김으로서의 가난입니다. 저는 다만 아직도 내려가는 중일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가는 길을 걷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날마다 감사를 드립니다.

졸글을 보시고 진지하게 질문해주신 Boaz Kim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노파심-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최태선 목사  tschoi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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