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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아닌 "우리"로 존재하는 새 사람들
사진출처: YANA Ministry

요즘 정치인들의 발언을 보면서 내가 정치인이 아닌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물론 우리 사회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자한당 무리들의 발언을 보면 그들이 정말 어느 나라 국민인지 의심이 간다.

그들의 논리를 보면서 옛날 희랍의 아고라에서 토론을 하던 소피스트들이 연상된다. 그들은 대화를 위해 항상 반대 논리를 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게 다 말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을 소피스트라 부르지 않는가. 소피스트라는 말은 소피아로부터 유래되었고 소피아는 진리다. 그렇다면 소피스트라는 말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쯤으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피스트를 궤변론자들로 번역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아무리 궤변이라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그런 존재들이다. 저 유명한 성서의 가인을 보라. 그는 하나님과도 논쟁을 벌일 정도로 담대하다.

이런 인간들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 가운데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사건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앙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선천적으로 인간은 소피스트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이기적인 편향성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가장 먼저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이기적인 편향성에서 벗어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내게 있어 지옥‘이라고 말했다. 실존주의자다운 예리한 통찰이다. 그가 파악한 주체는 자기를 유지하고자 타자를 객체로 만드는 존재이다. 그런 주체에게 경쟁은 당연한 것이며 폭력은 불가피해진다. 결과적으로 타자들은 서로에게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곳, 세상은 더 이상 평화를 도모할 수 없는 곳, 냉랭하기 이를 데 없는 낯선 곳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에서 인간들은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한다.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지옥은 인간이 공들여 빚어 만들어내는 질서 있는 세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요즘 보고 있는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세상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에겐 다른 측면이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와 다른 인간관계를 제시한다. 그는 인간을 Mit-Einander-Sein으로 설명한다. 더불어 나란히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타인을 부정하는 순간 자신 역시 부정된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나와 함께 나란히 있어야 하는 존재, 다시 말해 나의 존재 조건이 되는 것이다.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도 이 내용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관계가 충족되고 완성되는 유일한 나라다. 그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은 단순히 더불어 나란히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하나 된 존재, 나의 존재 의미를 완성시켜주는 존재다.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존재한다. ‘나’의 의미는 ‘너’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너’가 따로 없이 ‘우리’가 되는 곳이다.

교회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아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교회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 아무리 오늘날 교회를 고치고 다시 고쳐보라. 그곳은 결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굳이 소강석 같은 인간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오늘날 교회는 정당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대결의 장이 되었다. 그 모습은 피를 흘리며 상대방을 케이오시키려는 UFC의 케이지와 같다. 

나는 처음부터 간판을 달지 않는 교회를 향해 달려왔다. 간판을 다는 순간 교회는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진다. 생존을 위해 싸우고 경쟁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이 말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었다. 주님은 오늘도 가인과 같은 우리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것은 내게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수사의문문이다. 나는 주님의 이 말씀을 알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오늘도 기다린다. 하나님의 백성은 ‘나’가 아니라 ‘우리’로 존재해야 하는 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태선 목사  tschoi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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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39.XXX.XXX.187)
2018-05-31 07:44:39
찬성:2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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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Z KIM (107.XXX.XXX.250)
2018-05-31 07:10:51
찬성:1 | 반대:1 찬성하기 반대하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자한당 무리라 단정지으시는 귀하의 영혼에도 참으로 어두운 그림자와 믿음의 영성으로로 치유될 수 없는 회복 불능의 깊은 상처가 있는듯 느껴집니다. 늘 귀하의 글에서는 매우 지나친 편견을 느끼곤 합니다. 어떤 상처들이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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