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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사랑 보다 더 어려운 일
사진: 유튜브 갈무리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런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과연 가당한 일인가. 오래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에겐 가당치 않다.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원수는 싫다. 밉다. 경우에 따라서는 죽이고 싶다.

그런데 나에게 원수는 누구인가. 도대체 누가 내 원수인가. 원수의 사전적 의미는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우리지만 나에게 원한이 맺힐 정도로 해를 입히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고 미워해도 되는 것인가.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이 늘 있고 그런 사람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 것처럼 사람은 많고 미워할 사람 역시 많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맞는다면, 당장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어도 미워하는 사람의 수를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원수 사랑과 관련하여 나는 아미시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다. 미국 아켈마인의 한 아미시 학교에 괴한이 총을 들고 침입하여 열 명의 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하다 열 명의 아이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섯 명의 아이가 죽었고 다섯 명의 아이가 큰 부상을 입었다. 아미시 사람들인 아이들의 부모에게 범인은 분명 원수다. 그런데 아미시 사람들은 범인의 가족을 찾아가 자식과 형제를 잃은 그들을 위로했다. 범인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여 범인의 가족들을 안아주며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목격하고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을 그들에게도 똑같이 나누어주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미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원수를 사랑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실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범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사소한 이유로 다툼이 있는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기가 더 어렵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이나 말씀 앞에서 절망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우리도 아미시 사람들처럼 원수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IMF때 부도를 맞은 우리 교회 한 집사님에게 내 집을 담보로 사업자금을 빌려 쓸 수 있게 해주었고, 자기 이름을 사용할 수 없던 그에게 내 이름으로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잘못되어 나는 졸지에 모든 재산을 잃고 신용불량자까지 되었다.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성공하여 잘 살고 있고 기독교 tv에 출연하여 간증까지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는 그에게 그런 나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흥분하지만 나는 그 집사님과 그분의 가족들이 밉지 않다. 오히려 그분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다만 그분들이 내가 왜 그분들에게 내 재산을 사용케 하고 내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분들과 유무상통하는 진정한 교회를 이루고 싶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애를 실천하고 싶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일을 통해 나는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나는 극한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것은 성경공부나 말씀 연구로 배울 수 없는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었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전 재산을 다 투자한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귀중한 보배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원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나는 수시로 아내와 싸운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밉다. 어떤 때는 그런 내가 싫어 죽고 싶을 때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원수로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무한한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나와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그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관계를 끊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원수는 늘 내 안에 나와 함께 있다.

그렇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말씀을 내게 들려주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주어진 이 새로운 정체성이 나와 사소한 일로 마찰을 빚는 가까운 사람들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런 내가 되기를 기도한다.

최태선 목사  tschoi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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