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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역사의 동반자인가? 반역자인가?[특별 대담] 4.27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본 신앙과 역사의 문제

[미주뉴스앤조이=마이클 오 기자] 역사적인 4.27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종일 모든 국민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흥분과 감동 가운데 두 정상의 움직임을 지켜봤고, 그 여운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 

대부분의 국민과 해외 동포들은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환영하고 다가올 평화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품었지만, 더러는 의심과 불만을 품고 이 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입장에 서있건 이 역사적인 순간을 무관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인 경험과 기대를 뛰어넘는 순간이 닥치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그 영향으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사 가운데 인간은 이처럼 변화무쌍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역사의 일부로 혹은 역사를 형성하는 힘으로 존재한다. 

대담을 나누고 있는 안태형 박사 (오른쪽), 허현 목사 (왼쪽) <미주뉴스앤조이>

미주뉴스앤조이는 이러한 역사적 순간 앞에 신앙의 의미와 오늘날 기독교의 현주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특별 대담을 진행하였다. 대담은 4월 28일 ReconciliAsian 사무실에서 열렸으며, 안태형 국제정치학 박사와 허현 목사(ReconciliAsian)가 참여한 가운데 미주뉴스앤조이 마이클 오 기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안태형 박사는 국제정치학 학자로서 지난 20여년간 북한 및 동북아 국제정치를 연구했으며, 학부와 대학원에서는 역사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현재 북한 및 대북정책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으며, 다양한 미주 한인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허현 목사는 미주 메노나이트 교단 소속 목회자로서, 한인 및 아시안 정의평화 운동 단체인 ReconciliAsian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 포럼, 정의 평화 학교, 북한 세미나, 갈등전환, 트라우마 세미나 등 미주 한인들 뿐만 아니라, 타인종과 미국 백인들을 대상으로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이클 오: 오늘 대담은 지난주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바라본 역사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기독교가 분명히 역사 가운데 세계와 호흡하며 존재해 왔지만, 개별적인 기독교인의 삶이나 교회의 행보를 보면 과연 기독교가 세계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지 불분명해지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특별히 한국의 근현대사로 시야를 좁혔을때, 한국 기독교의 역할과 기여를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면서 역사와 신앙이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또 영향을 주고 받을수 있는지를 나누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번 정상회담을 보신 소감과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허현 목사: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충격 혹은 압도적인 경험이었습니다. 특별히 남북 정상이 국경을 가로질러 서로의 영토를 넘나드는 장면은 짜릿한 감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외에도 하루종일 다양한 장면들이 펼쳐질때마다 미쳐 말로 담을 수 없는 감동과 흥분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 순간은 아마도 많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북미정상회담과 그 이후의 절차와 대화들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기뻐해야할 시간이며,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태형 박사: 저 역시 감동적인 순간들이었습니다. 학자로서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감정적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갈길이 멀고, 그 가운데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 완성, 리더십 교체, 그리고 북미의 극한 대치와 극적인 평화 국면 전환 등의 과정을 볼때, 이번 회담은 제 1차, 2차 정상회담과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번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근본적인 정세와 역학관계의 재편성이 이루어질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회담은 여러모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순간에 주변 반응들을 보면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를 겪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래의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갇힌 냉전적 사고로 이 변화를 이해하려고 할때 생기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북한의 행보 뿐만 아니라 남한과 미국의 행보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기존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 또한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기존의 닫혀진 시각으로 정세와 역사를 바라보지 않았나 반성해보기도 했습니다. 항상 열린 자세로 이번 상황 뿐만 아니라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구글이미지>

허현 목사: 저는 근래와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면서,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 같은 변화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10년 전만 되돌아가보더라도 과연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 내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회담이후 문재인 정부 국정 지지율이 70%이상 나온 사실이나, 남북정상회담을 이룰 수 있도록 여론적 지지를 만들어낸 한국 사회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변화 뒤에는 촛불이 있었고 세월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역사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서 주위 열강들을 이끌고 갈만큼 문재인 정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운전자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마이클 오: 두분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어떤 역사적 변곡점 혹은 변화 앞에 서 있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것은 종래의 이념적 틀로는 이해할수 없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요구하는 근본적인 변화이며, 그동안 한국 사회 및 역사 가운데 응축되어 왔던 변화의 가능성의 발현이라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를 초월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초월’이란 말 뜻은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절대타자로서 ‘미래’와 연관있는 개념(‘시간과 타자’, 86-87)입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으로 둘러쌓인 현재라는 시간과 완전히 다른, 인간이 거하는 현재의 저편에 있는 시간으로서 미래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타자로서 미래는 현재를 떠나있는 초월이며, 현재로 침투하여 현재의 전체성을 깨뜨리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초월적 미래의 현현을 무한(‘전체성과 무한’)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시점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초월적 미래의 순간이 현실에 도래하여, 현재의 전체성, 현재가 예상하고 기획하였던, 현재에 포섭된 미래 (레비나스는 이것은 진정한 미래가 아니라고 합니다)를 깨뜨리고 새로운 시간(진정한 미래)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이자 힘으로서 무한의 개념을 초월이라는 말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역사에 있어 이러한 초월이 현재로 침투하여 새로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많이 있어 왔습니다. 허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세월호나 촛불시위 또한 그런 의미에서 초월적인 측면이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런 초월의 개념으로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볼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태형 박사: 국제정치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때,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초월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국제정치학적인 측면에서 예상이나 분석 가능하지 않은 초월적 사건이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국제정치학적인 이론이나 분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회담은 그 이전의 사례와 당시의 정세와 각 나라들의 관계 등을 고려하였던 많은 국제정치학자들과 연구 결과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정상회담이 전혀 예상할수 없었던 초월적 사건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번째 관점에서는 이러한 시각을 조금 유보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4.27 남북정상회담이 이전에 수많은 학자와 연구기관들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결과를 확실성과 필연성의 영역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성급하고 경솔한 태도로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사건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적 순간에는 우연성이 개입되어 있으며, 그 우연성은 오직 사후적으로만 해석되고 분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월호와 촛불시위 <SBS뉴스>

남북정상회담 이전의 북한 정권 교체와 핵무기 실험 성공, 남한의 세월호 사건과 촛불시위, 문재인 정부의 출범,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집권 등 수많은 변수들이 이번 정상회담의 성공요소로 설명될 수 있지만, 왜 이 모든 변수와 또 그 저변의 또 다른 미세한 변수들이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연성, 혹은 현재의 지평선 너머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요소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이자 학자로서 이러한 초월적 요소를 너무 성급하게 하나님의 역사나 기도의 결과라는 등의 신앙적 수사로 환원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적 분석과 연구와 역사적 우연성, 양자를 다 붙들지 않고 한쪽만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또 다른 전체성, 혹은 획일적 사고로 빠져들기 쉬우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경우를 역사적으로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허현 목사: 현재의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일어나 현재의 사고방식을 바꾸었다는 측면에서 초월을 이해한다면, 이번 회담에는 분명 초월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예로 김정은 위원장을 목격한 경험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래에 메스컴을 통해 비추어진 김정은 위원장은 분명 폭군이며 정상적인 사고와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닌, 비정상적이며 우리와는 다른 범주에 있는 존재로 비춰졌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악마화된 존재(Demonized)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회담을 통해 비추어지고 경험된 김정은이라는 인물은 분명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습니다. 그 진위여부 이전에 그가 한 말과 행동들 가운데에는 진정성을 느낄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며, 인간으로서 이해 가능하였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자면 De-humanized된 존재를 Re-humanized한 사건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Re-humanized되는 사건으로서 이번 정상회담은 단순히 김정은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70여년 동안의 단절과 대결로 생겨난 적대와 갈등의 현재를 평화의 미래로 바꿀 수 있는 화해의 가능성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은 이러한 화해와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만남과 대화를 만들어 낸 계기로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회담 이전의 시간에 있었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평화와 화해의 미래를 도래시킨 이번 정상회담은 분명 초월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태형 박사: 북한 사회를 비정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회로 보지 않고, 나름의 방식과 일관성 있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보는 시각은 이전에도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지금까지 묻혀지고 축소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 사회 자체를 악마화(Demonized)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취급함으로서, 적대와 대결을 합리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우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북한 사회의 악마화와 잘못된 정보의 지속적인 주입은 결국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편향된 대북관과 통일관을 가지게 하고, 적대와 대결로 가득한 현실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스스로 깨우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 가운데 외부로부터 침투한 사건으로서 나타났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얼굴의 현현과 두 정상이 만들어낸 모습들이 그 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간과 미래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분명 초월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구글 이미지>

마이클 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현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신앙은 이러한 초월적 역사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초월이 현재의 한계로서 전체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래를 불러온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이 전혀 새로운 현재와 미래 앞에 서 있게 되며, 나아가 이 새로운 현재와 미래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부름을 받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은 이러한 역사의 부름 앞에, 초월의 부름 앞에 신앙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안태형 박사: 이런 역사적인 사건, 외부로부터의 깨어짐으로서의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 개개인의 선택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초월로서의 충격이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윤리적 호소로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윤리적 호소 앞에 있는 개개인은 분명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 앞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기독교인이라면 윤리적 호소 앞에 책임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 드러나고 있는 예언자적 소명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적 소명은 다름아닌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적 컨텍스트 가운데 드러나는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 사회적 컨텍스트를 잃어버린다면 예언자적 소명은 상실되는 것이며, 결국 자기 자신에게 안주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중요하게 드러나는 메세지 중의 하나는 화해와 평화의 하나님으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게 되면, 당연히 새롭게 다가온 북한이라는 이미지와 역사적 순간 앞에 윤리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응답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응답이란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구체적인 역사 앞에 새롭게 열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책임을 의미할 것입니다. 

허현 목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초월이란 말을 기독교적으로는 종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종말에 대해 당시의 유대인들과는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종말이란 한 시대가 끝난 뒤 다가올 새로운 시대, 현재의 종결 이후에 올 새로운 시간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특이하게도 종말의 시간은 현재가 끝나기도 전에 침투하여, 현재와 미래가 겹쳐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미래인 하늘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현재에 침투하는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죠. 

이렇게 보면 우리가 초월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래가 현재 속으로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것을 기독교적으로는 종말이 현재로 들어온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이 종말의 시간앞에 어떻게 서있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언자적 종말론으로서 다가오는 종말,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기독교인의 소명과 역할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묵시적 종말론으로서 역사 앞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재의 모순과 한계는 결국 초월적인 신적 개입을 통해서만 해결할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상호보완적인 관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두 가지 종말론이 만들어내는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가 결국 이 두 가지 종말론의 긴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우리는 이제껏 평화를 위해서 일해 왔습니다. 역사에 걸쳐 수많은 교회들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많은 희생을 치루어 왔습니다. 예언자적 종말론을 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한계 앞에서 쓰러져 왔으며, 오직 묵시적 종말론을 품고 초월적 개입을 기다리며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 순간들을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앞에 우리가 할수 있는 대답은 무엇일까요? 현실적으로는 한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언자적 종말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야말로 예언자적으로 살아가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노력을 해야 하며,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가야 할 예언자적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한국일보>

마일클 오: 우리가 초월적 역사 앞에서 책임있는 존재로, 혹은 예언자적 소명을 가진 존재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정리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당위를 두고 그 동안의 기독교 역사 혹은 일반적인 기독교 경험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러한 역사적 책임과 예언자적 소명 앞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야기 해주십시요. 

안태형 박사: 그 동안의 한국 기독교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두 가지 슬픈 모습이 떠오릅니다. 첫번째는 유독 강자에게 약한 모습입니다. 이는 우월한 권력과 무력 앞에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은 커녕, 오히려 강자의 권력을 옹호하고 지지함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확보하거나, 교회 성장에 이용하는 장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와 상반되는 경우로서 약자에게는 무관심한 모습입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부족했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 있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강조와 명령들은 이러한 현상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자들과 항상 함께 하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 앞에 오늘날 한국 교회와 미주 한인 교회들이 다시 되찾아야 할 교회의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 또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반공 이념과 결부된 북한의 악마화, 이슬람 및 타종교에의 혐오와 배제, 지식과 과학을 향하는 반지성주의 등으로 나타난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타자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 때문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마이클 오: 현실의 기독교가 성경 뿐만 아니라 역사적 요구에 응답하며 이어졌다기 보다는, 때로는 그와 반대방향이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비판은, 결국 역사 앞에 선 신앙이 반역사적이거나 비역사적(a-historic)이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의 반역사성 혹은 비역사성을 극복하고, 현실로 침노하는 초월의 역사에 합당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안태형 박사: 레비나스는 ‘진리는 저편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속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한것이 생각이 납니다. 진리라는 것이 초월적이라 할지라도, 결국 이 땅에서 역사 가운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과 우리, 혹은 진리와 우리의 관계는 계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즉 사회와 역사를 떠나서 존재하거나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역사 가운데 의미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뜻도 그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역사 가운데 주어진 신앙의 상황과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항상 새롭게 해석하고, 평가하고, 자기 성찰을 하는 과정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허현 목사: 역사를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형성하고 알려주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초대교회의 세례과정이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의 삶을 이루고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오랜기간 동안 살펴보고 세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의 삶과 정체성의 이야기가 로마 영웅전과 같은 것에 근거하고 있다가, 구약의 이야기 등으로 옮겨가는 시점을 눈여겨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한 사람의 삶의 이상과 방향이 구체적인 이야기, 혹은 이야기로서의 역사 가운데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우리 안에 있는 이야기, 역사와 전통에서 뿌리쳐져 나오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와 상황 가운데 재해석되고 정립되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재해석과 정립이 신앙의 생명력이 될것이며, 그러한 생명력을 통해 역사 또한 새롭게 쓰여져 갈것입니다. 

 

마이클 오: 마지막으로 남북정상회담 이후 기독교인들은 어떤 자세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해야 할까요? 

안태형 박사: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화해와 평화의 메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 나아가 계속 평화를 정착, 지속시키는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본 기사는 특별대담의 내용을 간추린 요약본입니다. 실제로 나눈 대화 가운데 반영되지 않거나 축약된 내용이 있을 수 있으며, 원래 대담자의 의도와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주)

마이클 오  michaeloh@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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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7.XXX.XXX.191)
2018-05-13 20:55:39
찬성:0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기독교는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국이 기독교에 끼어든건 200년이 안된다. 기독교의 핵심은 약자에 대한 배려 평화 화해이다. 법도 강자의 법과 약자가 쓰는 법이 있듯이 기독교도 강자가 휘두르는 채찍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는 원리이다.
리플달기
진실 (97.XXX.XXX.133)
2018-05-08 06:02:40
찬성:0 | 반대:2 찬성하기 반대하기
아무리 현란하고 현학적이고 신앙적인듯 말해도 기사내용은 한마디로 종북적인 주장일 뿐이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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