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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만 문제? 기성교회는?박진영 논란으로 본 기성교회의 구원론과 사회적 책임
디스패치 보도에 관한 박진영의 반박글. 사진출처: 박진영 인스타그램

[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박진영 구원파 전도 포착”이라는 디스패치의 보도에 관련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 국내의 수많은 언론들이 해당 기사를 인용해 재보도하고 있다. 박진영은 구원파와의 관련성을 강하게 부인하며 자신의 신앙 간증문을 공개하고 법적 대응을 시사하고 나섰다. 보도가 나간 후 JYP 엔터테인먼트 주식이 6-7% 하락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무엇이 문제?

박진영이 구원파인지에 관한 논란, 그의 지난 행적,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구원파 유병언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들은 다른 언론들에서 이미 많이 다루고 있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는 박진영이 올린 간증문을 읽으며 들은 의문과 생각들 그리고 기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은 박진영이 올린 간증문 전문 중 일부이다. “성경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성경책에 씌여 있는 수많은 예언들 중에 한 개라도 틀린 것이 있는 지 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유대인의 대한 예언들과 실제 유대인의 역사를 비교해보기 시작헀다. 각종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상과 단절한 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성경을 파헤치며 살았다. 집을 떠난 지 2달 후, 2012년 10월 나는 틀린 예언을 찾는 걸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틀린 걸 찾기는커녕 오히려 성경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짧은 형식의 간증문 만으로 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위 글로만 본다면 성경의 복잡한 문학적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말씀만 보아도 역사서, 예언서, 시가서 등 다양한 문학적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세기 동안 구전과 필사를 통해서 전해 내려오던 많은 문서들이 후대에 편집되어 완성되었던 특성을 고려하면 예언의 실현으로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성서 안에 포함된 그 다양한 양식과 내용을 오직 예언 하나로 진실 여부를 평가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의아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려고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누구와 무엇을 하며 예언을 증명하려고 했을까? 예루살렘에 가서 하루 10시간 이상씩 성경을 파헤치다가 두 달 만에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적었다.

그는 ‘웬만한 신학생 못지않게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신학교에서 배우는 기초적인 성서 해석 방법론도 숙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이렇게 적었다.

“2천 년 전에 셋째하늘에서 날 위해 내가 평생 지을 모든 죄를 위한 제사가 드려졌고 그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피로 드려진 제사였기에 내 모든 죄는 영원히, 완전히 처리되었다는 게 사실로 믿어진다는 것이 정말 정상적인 일일까? 이것은 절대 인간의 믿음으로는 믿어질 수 없다. 너무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 한 번에 드려진 제사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구원에 관한 교리는 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교리다. 다만 구원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 한 번의 회개로 미래 죽을 때까지 지을 내 인생의 모든 죄가 다 용서가 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의 기쁨과 확신을 주시는 것은 맞지만, 영접 후의 삶의 모습과 관계없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다. 칭의론과 구원론에 대한 오래된 논쟁의 재판이기도 하다. 박진영의 ‘내 모든 죄는 영원히, 완전히 처리되었다’는 고백은 구원파의 단 한번 회개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음 받았다는 주장과 동일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언급도 있다.

“히브리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등은 우리 이방인 주수신자로 위해 쓴 글이 아니라 7년대환란에 복음을 전할 유대인 144,000들을 주수신자로 해서 쓴 글임을 명심해야한다. 이 편지들도 우리가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하지만 여기에 구원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거나 우리의 잘못으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구절들은 예수님의 아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쓴 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와 달라서 구원에 관한 한 우리는 사도바울의 편지를 참고해야한다.”

그가 언급한 서신서와 계시록이 7년 대환란에 복음을 전할 유대인 144,000을 위해 쓰인 것이라는 고백은 위험해 보인다. 144,000이라는 숫자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계시록을 이렇게 말세의 관점에서만 읽는 것도 건전한 신학은 아니다. 계시록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과 비유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 있었던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전하고 인내를 권면했던 요한의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서의 구원론에 관해 나라와 민족의 상황에 따라 각자 자기에게 맞는 성서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정해진 구원의 길을 따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국인, 즉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위의 서신들이 아닌 바울 서신을 참고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는 극구 부인하지만 “구원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거나 우리의 잘못으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구절들은 예수님의 아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쓴 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문장은 교회의 정통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 성서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특정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역사 문화적 성격에 따라 특징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성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특정한 독자들이나 특정 신앙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보편적 관점에서 보면 성서의 어느 부분도 독자를 배타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한번 구원 받으면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교리가 구원파가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더 큰 문제는 우리 안에

우리는 구원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특히 세월호 사건 이후로 그들이 참사의 주범인 것처럼 비난해 왔지만, 정작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그들의 구원론은 경계하지 않는다. 이것이 더 큰 문제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구원파와 구별되는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는가?

일반 교회에서도 “구원 받았습니까?”라고 묻고, 그렇다고 답하면, “언제 어디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재차 묻는 일이 허다하다. 부흥회 참석할 때마다 듣던 단골 질문이었다.

인간의 구원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결코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강하신 능력 안에 살게 되었으므로 철저하게 보호받는 인생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회개하고 영접했을 당시의 감격과 뜨거움을 잊어버리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더구나 신앙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전혀 그리스도인답지도 않고 말씀대로 살지도 않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구원은 여전히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치 구원을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적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지 못하다.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으면, 구원하신 분의 뜻대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 어느 것도 구원을 무효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신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뜻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다 이루었다는 자부심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책임적 삶이나 성화의 과정이 생략된 채, 영접과 천국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오류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윤리적 삶은 간과되게 된다.

축자영감설로 대표되는 문자주의도 만연하다. 성경 전체에 대한 통전적 해석이 결여된 문자주의는 주요 이단 사상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성경 말씀의 한 구절과 단어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거나, 성경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신비적 미신적 해석도 경계해야 한다. 이단 사상뿐만 아니라 창조과학 같은 불건전 신학도 이런 현상을 보인다.

문제는 구원파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에도 이런 구원론과 불건전 신학 취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기성 교회들이 구원파의 신학을 비판하고 지적할 만큼 자유로운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심지어 구원파와 기성 교단의 구원론에 차이가 없다는 자조적인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개인의 성화에 대한 가르침이 결여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사회적 책임의 부재다.

신앙생활이 구원을 이미 받았는가 아닌가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어 있어서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는 데에는 그만큼 소홀하다.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 분의 나라를 만들라고 부르신 소명은 간과한 채 영혼이 구원받았는지, 언제 받았는지만 묻고 있는 꼴이다. 심지어 천국조차도 남보다 더 나은 상급을 받기 위해 각축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실현되는 곳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교회의 공적인 책임은 천국의 큰 상급을 바라는 개인 간의 경쟁에 밀려나 버렸다. 교회 밖의 세상을 섬기는 대신에 교회 내의 충성만이 신앙의 척도가 된 셈이다. 공동체를 향한 책임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구원파를 비난하듯, 세상은 교회를 비난할 것이다. 

신기성  shin@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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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107.XXX.XXX.11)
2018-05-05 18:25:14
찬성:1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이 글에는 맞는 말도 있지만 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붐들도 많네요. 뉴조가 자유주의 신학에 많이 물들어서일까요?
구원은 한번받고 하아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지키느뉴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이것은 구원받았으니 맘대로 살자는 뜻이 아닙니다 .

솔직히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글입니다. 여기 목사님들이 좀 반론을 써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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