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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청소년들의 아버지 유낙준(모세) 주교대한성공회 대전교구장 유낙준 신부를 만나다

[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미국성공회 뉴욕교구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 중인 대전교구장 유낙준(모세) 주교를 맨해튼에서 만났다. 유낙준 주교는 “거리 청소년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대한성공회 사제이다. 유주교는 맨해튼 트리니티 교회와 성공회 뉴욕한인교회(관할사제 배요셉) 등을 방문했다. 뉴욕한인교회에서는 해금으로 찬양을 연주하며 감동을 주기도 했다.

 

유낙준 주교는 누구인가?

그는 2014년 전체 대의원 108명 중 95명의 지지를 얻어 대한성공회 대전교구의 주교로 선출됐다. 3대째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조모께서 집안 땅에다 감리교회를 건축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으며 감리교 신앙 전통을 무척 좋아했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충남대 농화학과를 졸업했고, 젊어서부터 민주화 운동과 빈민구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학부를 마친 후에는 3년간 노동운동에 몸담기도 했다. 그 후에 건강악화로 인해 노동운동을 그만 두고 1990년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본인은 쉼을 얻기 위해 신학교에 갔다고 고백한다. 성공회 신학대학원에서 이재정 신부와 신영복 교수를 만나게 되고, 가르침을 받았다.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견습사제를 끝낸 뒤, 1996년 대전 성남동에 ‘나눔의 집’을 설립한다. 세상의 약자들을 돌아보고 보살폈던 예수님의 삶을 자신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위에 언급한 두 스승으로부터 배운 “말씀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 사목”을 실천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주교님은 거리 청소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걸 인터넷 기사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나눔의 집’과 청소년 돕는 사목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사진출처: 성공회 뉴욕한인교회 홈페이지

1996년 IMF의 지원을 받던 경제 위기가 있었을 때였습니다. 당시에 경제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업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연구를 하고 있었죠. 그래서 프랑스의 실업정책을 많이 연구 했었습니다. 그리고 경제 위기에 대응할 대안을 가지고 있었죠. 예를 들면, 직업 안정 센터, 자활 지원 센터 등을 최초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최초로 만들어진 자활지원센터 5곳 중 4곳을 성공회에서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알기로 270여 개의 자활지원센타가 있습니다. 시군구에 최소한 한 개 정도는 있는 거죠.

생산적 복지 개념의 일자리 창출이 그 때 했었던 일 중의 하나입니다. 전국의 공공화장실 청소를 위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었죠. 성공회 신부들이 먼저 시작을 했고, 후에 타 종교, 타 교단 기관 및 단체들과 사회복지 쪽의 관계자들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IMF 때, 늘어나는 노숙자들을 보며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노숙자들이 자립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때문에 시작을 했는데, 그들에게 자립 대책은 마련해 주지 못하더라도 어려운 시간에 머물 곳이라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 쉼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노숙자 쉼터가 70-80개로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자리 지원을 위해서 시작한 것이 자활지원센터입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까 어른 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자녀들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일하러 가면 아이들이 방치되고, 집 나오는 아이들도 생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가출 청소년 센터를 동시에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하다보니까 청소년 문제는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청소년 사역을 좀 더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가출한 청소년들을 나눔의 집에서 재우고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보통 청소년 사역을 하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곤 합니다. 그게 보통 어려운 사역이 아닙니다.

 

가출 청소년 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운영하신 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네, 청소년 센터를 좀 더 발전시켜서 대안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위(Wee) 센터“나 ”로드 스쿨(Road School)등이 그 예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오면, 6개월 정도 같이 지내면서,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힘과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위센터는 한국에 여러 지역에 설립 되어 있습니다. 나눔의 집 산하에서 처음 시작을 했고, 나중에 대전시 교육청에서 이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보고 정부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국 13군데에서 나눔의 집을 모델로 위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퇴학 위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위센터에 데려와서 그 아이들에게 맞는 커리큘럼을 짜고 공부를 시켜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전에 정부가 어떤 교육정책을 발표했을 때, 교육부 담당 과장을 직접 찾아가서 정부가 발표한 정책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대안 프로그램으로 나눔의 집에서 하고 있었던 과정을 설명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부 지원을 받게 된거죠. 학교를 일탈한 아이들이 오히려 학교에서 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돌보는 프로그램입니다.

IMF때 가출 청소년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단기 쉼터였지만 나중에 중장기 쉼터로, 최장 2년까지 머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단순히 먹고 자는 쉼터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학습권을 보장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운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청소년 사역을 강화하고 집중했습니다.

또 하나가 로드 스쿨입니다. 지금도 매년 실시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구속이 되어서 형을 살게 되면, 출감한지 3개월 내에 재범을 저지르는 비율이 50%가 넘습니다. 문제가 심각한 거죠. 로드 스쿨은 아이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 걷기’ 프로젝트입니다. 하루 20km 정도를 걷습니다. 12일간 270km를 걸으며, 생각할 기회를 줍니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날씨와 관계없이 계속 걷죠. 무척 힘듭니다. 다리에 물집이 생기기도 하고 발톱이 빠지기도 합니다. 특히 초기에 많이 힘듭니다. 초기에는 불평도 많이 하고 힘든 내색도 많이 내지만 5일 정도 지나면 대체로 조용해집니다. 욕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되죠.

선생님들과 일대일로 같이 걷습니다. 아이들은 상담치료 과정을 다 이수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안고 있습니다. 침묵 가운데 걸으면서 가끔 속에 있는 얘기를 조금씩 꺼내 놓습니다. 자신에 관한 짧은 이야기나 가정사를 털어놓기도 합니다. 이런 얘기들을 진지하게 들어주죠. 그리고 제가 사제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얘들을 대하는 걸 아이들도 압니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도 많이 했죠. 줄 수 있는 건 다 주고 모든 정성을 다 해서 보살핍니다. 아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부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에만, 아이가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아이들을 대하는 건 죄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270km 걷는 걸 포기하면 원래대로 감옥으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로드 스쿨을 다 마치면 감옥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전과를 면하게 되는 것이죠. 부모님들이 다 울면서 맞아 줍니다. 로드 스쿨을 마칠 때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발을 닦아주는데 다 함께 웁니다. 매일 저녁에 모여서 하루 동안 걸었던 소감 나누는 시간이 있는데 그 때 많이 위로 받고, 성찰하게 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의도적으로 기도 제목을 공유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조용히 눈 감고 떠오르는 한마디씩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힘들 때 한 마디 기도에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덩치가 크고 문신을 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로드 스쿨은 올해 10회째 실시합니다.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이 변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많은 해답을 거기에서 얻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나 선생님들에게나 힘든 과정입니다. 일대일로 함께 걸어야 하니까요. 지리산 둘레길이 힘들고 험한 길입니다. 아이들이 보통 7-8명, 많은 땐 10명이 같이 걷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3개월 간 1,850km를 걷습니다. 그래서 거기 참여한 아이들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범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길게 걸을 만한 길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로드 스쿨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기 성찰을 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유낙준 주교(우)와 성공회 뉴욕한인교회 관할 사제 배요셉 신부(좌). 사진출처: 성공회 뉴욕한인교회

신영복 선생님과 가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제자로서 바라봤던 선생님의 모습이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신영복 선생의 『함께 읽기』라는 책의 한 챕터를 제가 썼습니다. 제가 노동 운동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가 신영복 선생이 첫 강의를 했던 해였습니다. 그 때 만나서 매주 3시간 정도씩 대화를 나눴었습니다. 이른바 ‘청구회 사건’으로 유명한 청구초등학교 학생들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서오릉길을 오르다가 같은 방향으로 오르던 초등학생 6명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말을 걸고 싶으셨지만, 평범하게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어디 가니? 하는 식의 식상한 질문으로는 아이들과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이들이 경계심을 풀고, 관심 있게 대답할 만한 질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이 길이 서오릉길로 가는 길이 틀림없지?”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아이들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답을 해줬고, 나중에 그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가기 전까지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장충단 체육관 앞에서 만나서, 책도 읽고, 생각도 나누고, 거리 청소도 하곤 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는, 당시 가난한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선후배 관계를 이루고, 친밀감을 만들어 가는지 관찰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감옥에 있을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청구회 추억”이라는 글을 쓰셨습니다. 선생이 감옥에서 나온 후 30년 만에 자신이 썼던 ‘청구회 추억’을 발견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개정판에 추가 했습니다. 훗날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당할 때, 국가 변란과 혁명을 획책한 조직으로 추궁당하기도 했던 웃지 못 할 일도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만나서 얘기할 때면 청구회 추억을 비롯한 감옥에서 썼던 글들의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검열이 심할 때라서 속 얘기를 쓰지는 못하고, 다른 얘기를 돌려쓰면 읽는 사람들은 선생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도 애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조금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언젠가 방학 때, 신영복 선생께서 충남대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남대 병원에 22년간 감옥생활을 한 최인정 선생이 암 투병 하느라 입원해 계셨습니다. 암에 걸리셔서 석방이 되신 거죠. 그분을 간호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 보니까 혼자 계셨었죠.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가져다 드리기를 3개월 정도를 했습니다. 그 후 5개월 정도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치르고 묘지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인정 선생과 관계가 있었던 장기수 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영복 선생이 쓴 글씨 50점을 팔아서 주신 돈으로 사랑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집에 장기수 들이 모이게 되었고, 나눔의 집 산하에 형제의 집을 만들어서 장기수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최수일 선생 등 여러 분들이 오셔서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진보정권이 들어선 후 63분이 북으로 갔습니다.

해마다 6,25가 되면 전쟁의 어두운 기억이 굉장히 강하고 호전적인 구호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좀 더 평화를 위한 날로 만들어 보려는 취지에서 6월 24일을 “평화의 날”로 선포하고, 평화 행사를 주관했었습니다. 대전의 가장 번화가인 은행동에서 한반도 지도를 놓고 빵을 나눠 주면서 평화와 통일을 외치곤 했습니다. 아내 유학 때문에 영국에 가기 전, 7년 간 했습니다.

유낙준 주교와 부인 허성우 교수

마지막으로 주교로서의 마음가짐이나 사목 방향 등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나눔의 집에서 빈민 사목을 많이 하고 그 분들과 주로 주일 미사를 드렸습니다. 노숙인들 하고 같이 미사를 드리기도 하고, 가출 청소년 쉼터에 있는 아이들도 같이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개척한 성남동 달동네 교회가 지금도 있습니다. 장기수 분들이 북으로 떠나고 난 후에 남겨진 형제의 집이 바로 그 성남동 성공회 성당이 된 거죠. 성남동 서울 가는 기찻길 옆에 있습니다.

2012년에는 유성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나눔의 집을 하면서, 성남동 성당과 유성교회 등 두 성당을 개척 해서 사목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에 대전 교구 주교로 선출이 되게 되었습니다. 보통 주교는 큰 교회를 맡으시던 분들이 주로 선출이 되었었는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사목보다는 빈민 사목을 주로 했기 때문에 기존 선교 보다는 새로운 선교 방향을 회중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주교의 역할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주교의 길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주신 이유를 찾아 가려고 합니다.

세대 간 갈등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주교로서 보니까 요즘도 세대, 계급, 이념, 성별, 소수자 등 여러 갈등 요소가 있죠. 우리 사회가 주류에 속하지 않으면 배제시키는데 익숙한 사회 같습니다. 뭐든 주류가 안 되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주류가 되기 위해 모든 걸 쏟아 붓죠. 하지만 주류가 안 되면 어떻습니까? 기본적으로 이런 갈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주교로서 교회에서는 정점에 서 있는 입장이지만, 주교가 과연 뭐하는 사람일까 하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제 생각으로, 주교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선과 악은 자기 속에서 용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힘든 일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은 갖고 있지만 이것을 자기 속에서 용해시켜서 더 나은, 말하자면, 이 갈등들을 속에서 용해시켜서, 뭔가 더 나은 것을 해야 되는 자리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 길을 가르쳐 달라는 기도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교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해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죠. 주교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습니다. 

신기성  shin@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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