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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어떻게 스스로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할것인가?[교회 다시 상상하기] (1) - 공적 신앙과 공동선의 추구로서의 교회
미주 뉴스앤조이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뒤돌아보고 그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을 찾고자, 특별 기획 시리즈 ‘교회 다시 상상하기’를 준비하였다. 칼럼과 인터뷰의 형식을 통하여 다양한 시각을 소개할 예정이다. 신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각각의 전문성을 통해 바라본 교회와 그 나가야할 방향에 대해 진단해보고자 한다. 이번 시리즈를 통하여 교회에 숨겨진 풍성한 의미를 다시금 되찾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미주뉴스앤조이=마이클 오 기자] 신학 영역에 있어 신앙의 공공성과 그 역할에 대한 재조명은 근래에 들어 가장 주목받는 주제중의 하나이다. 학계에서는 다양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교회와 세상을 단절을 회복하고 참된 신앙의 의미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일상을 바라보면 이러한 노력이 과연 얼마만큼 반영되고 열매를 맺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 및 미주의 한인 교회들의 현실은 갈수록 폐쇄적인 개인주의와 내세적 신앙에 빠져들고, 보다 넓은 시민사회로부터 고립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신앙과 교회의 공적 의미와 소명을 다시금 기억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공공신학자이자 교수로, 풀러 신학교의 코리안센터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창환 박사는 공적 신앙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간으로써 교회를 정의하며, 그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금의 교회의 폐쇄성과 그로 인해 함몰하는 신앙의 의미를 어떻게 복원할수 있는지, 공공신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교회의 공적신앙과 공동선의 추구

(The Public Faith of the Church and the Pursuit of the Common Good)

 

들어가는 

김창환 교수 <풀러신학교>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양극화의 문제라고 본다. 우리가 사회를 살면서 의견이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서로 건전한 비평을 하는 것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발전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심지어 적으로 여기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보며, 신학은 이점에 대해서 교회와 사회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성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자신이, 혹은 자신이 속해있는 위치나 생각이 중도에 서 있다고 자주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자리에 있는 자들을 진보, 보수로 여긴 다든지 근본주의 혹은 자유주의로 상대방을 몰아세운다. 어떤 이슈가 있을 때 마다 당신의 의견이 무엇이냐고 묻고. 누구의 편인 가라고 추궁한다. 그 의견이나 혹은 서는 자리가 자기와 맞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현실이다. 중도적인 입장에 서서 서로 다른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양극화 현상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고 본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로, 경제적으로는 가진자와 가난한 이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기득권을 가진자와 소외된 자들로 양분화가 지속되고 점차 심하게 되는 것을 본다. 고후 5:18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는 직분를 주셨으니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는 화목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우리가 분쟁의 문제를 대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가 항상 옳지 않다는 자기 비평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신학은 실제로 교회에게 사회에게 비평적인 날카로움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화해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때때로 내가 서있는 위치가 정의롭고, 내가 가지는 의견이 옳다고 생각한다. 정의가 사회를 묶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정의라는 개념은 항상 상대적일 경우가 많으며 기독교적 정의는 경직된 정의나와  그룹에 대한 정의우파나 좌파에 국한된 정의가 아닌 공동선 (common good) 이루는 공의 (common justice)를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화해자가 된다는 것은, 평화를 이루는 자 (peace-maker) 가 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자리에 서는 것이라고 본다.  글에서는 사회정의를 기독교가 실현함에 있어서 공공신학 (public theology) 이해하는 사회정의의 개념과 또한  실현 과정에 있어서 공동선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함에 대해서 토의 하고자 한다. 

 

공적신앙과 공공신학에 대해서

현대사회에 있어서 선지자의 역활을 담당해야하는 기독교는 사회의 공공영역에서 중요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과거와는 달리 개인적인 혹은 사적인 영역으로  영향력이 급속도로 축소되고 있다. 학자들은 이점에 대해서 주된 이유로 기독교인구의 감소로 보고 있다. 

한편 최근 남반구에서의 기독교 교회의 성장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은 기독교 교회 내부의 인구 변동 뿐 아니라 전세계의 종교적 그룹의 패턴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러학자들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하지만 이러한 학자들의 문제는 기독교를 다룰  역시 숫자적 확장 혹은 축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케네스 라토렛 (Kenneth S. Latourett) 은 그의 저서 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에서 기독교 확장에 대하여 3가지 관점으로 기술했다고 주장한다: 지리학적 확장 (기독교인과 교회의 숫자의 증가); 해당 지역에서 기독교의 활성화 (기독교 운동과 교파의 특징); 그리고 사회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이 그것이다. 하지만 라토렛의 연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독교회사 연구는 처음 두 가지 관점에 촛점은 맞추고 있으며 세번째 관점인 기독교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을 본다. 실제 교회의 규모와 사회적 위치에 관계없이 교회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예는 수 없이 볼수 있으며 이 점은 오히려 라토렛이 본 첫 두가지 관점보다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더욱이 교회의 공공권에서의 공헌은 기독교인의 숫자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보며, 공공권에 대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정립과 함께 사회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공적인 교회의 역활이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교회의 공적참여는 새로운 논제가 아니다.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교회는 끊임없이 사회에 기여했으며 특히 서구교회는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공적인 역활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서구사회는 교인의 급속적인 축소와 함께 교회의 영향력이 공공권에서 물러나게되며 촬스 테일러가 (Charles Taylor) 가 주장하는 secular age를 넘어서 프랑스의laïcité 를 비롯한 서구유럽에서 추진되는 과격한 세속화 시대에서 교회의 영역을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당하게 된다. 이 문제는 비단 서구의 문제만이 아니고 세계교회가 직면하는 것으로 교회의 공공성은 현재 신학계가 다루는 이슈이며, 특히 한국에서의 상황은 이와 더불어 교회의 공공성의 결여로 인한 여러가지 신뢰도와 투명성의 문제그리고 공인력의 상실에 대해서 토의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는 한국에서의 공공신학의 관심사가 된다.   

공공신학의 주요 담론은 기독교 신학의 토론장이 교회나 기독교인에 국한되지 않고 공공적인 모든 영역에 관여하는 을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인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분야에 참여하여 기독교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통해서 사회전반적인 관심사에 대해서 토론에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가 사회, 정치, 경제 전반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영적, 윤리적, 그리고 도덕적인 가치관을 절달함을 통해서 해결점을 비기독교인들과 상호 해결해 나가기로 하는 이다. 한편 기독교가 단지 윤리적 혹은 영적 우위적인 위치에서 비평하는 선지자적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비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겸손한 동반자의 위치에 서서 공동선 (common good) 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공공신학의 중요한 담론은 공적인 대화 (public conversation) 이라고 볼 수 있다. 

‘공공권’ 혹은 ‘공적영역’ 이라는 개념은 율겐 하바마스 (Jürgen Habermas) 에 의해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에서 학문적으로 제시되었다. 하바마스는 ‘공공권 국가  시장 경제가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대안으로 제기되는 공개 토론의 장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18세기 유럽에서의 상황을 연구하면서 공공권이 정부와 경제체제 그리고 법률체제가 주관하는 영역과 이에 반해서 가족과 소규모 사회공동체가 주 구성요원인 개인적인 영역 사이에 공공권을 형성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왔고, 특히 초기단계에서는 비 정규적으로 모이는 중산층 그룹들에 의해서 카페에서의 토론, 다양한 인쇄매체를 통한 의견교환 등을 통해서 사회, 경제 정치적 의견을 형성하고 정책에 반영하는 시도가 현대의 시민사회의 출발이며 이러한 영역을 공공권이라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공공권은 세가지 권리의 인식에 근거해서 형성되어 진다: 첫째, 연설 및 의견 표시의 자유, 자유 언론, 집회의 자유 등을 통한 비판적인 토론  정치적 표현; 둘째, 개인 자유  가정불가침의 권리; 셋째,  앞에 평등한 개인 소유의 권리이다. 더 나아가서 공공권의 개념은 보편적 참여 (universal access) 비평적인 문의 (critical inquiry)  근거로 하고있다. 

그는 이러한 공공권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 정부와 각종 정치단체 그리고 시장체제의 확장과 함께 대중 미디아의 발전으로 인해서 위축이 되었으나 한편 시민단체 혹은 자원봉사단체의 활성화를 통해서 지속되어진다고 보았다. 하바마스의 초기 이론적 체계는 남성 중산층 사회를 근거로 하고 자유민주체계 사회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이론은 페미니스트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고, 복수사회로 구성된 현대의 복잡한 상황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도록 그의 견해가 수정되어야 했다. 넨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는 하바마스에 대한 비평을 통해서 그의 논제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근거를 두고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회에 적용하는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하마마스의 문제점은 그가 공공권에서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보았고, 공공권이라는 개념자체가 단일적이지 않고 복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공동선 (common good) 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이며, 각 단체들의 이익추구로 인해서 항상 비평적인 견해를 통해서 수용해아 하는점, 그리고 하바마스가 주장하는 시민사회를 통한 공공권은 항상 정부와 정치권에 비해서 단지 의견을 제출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외 여러학자들의 비평이 있으며 특히 공공영역과 사적영역 사이의 양분을 야기하는 듯한 공공성의 담론에는 문제가 많을 수 있지만, 하바마스의  ‘공공권’ 이론이 주장하는 보편적인 참여 (universal access)  비평적 문의 (critical inquiry)  공공신학의 논제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본다. 

하바마스 이외의 다양한 학자에 의해 제시된 제안을 고려하여 저자는 사회의 공공권에서 주요한 역활을 하는 그룹에 대해서 여섯가지로 제안하고자 한다. 그것은 국가시장미디아학계시민사회  종교적 공동체 인 것이다. 신학은 학계 (대학과 신학대학그리고 교회공동체에 뿌리를 둔다. 

공공 신학은 종교적 공동체와의 연결을 유지하면서 사안에 따라 다른  그룹과 교류하며 공공권 내에서 신학의 역활을 신중하게 확장하는 역활을 담당한다. 이러한 신학의 확장개념은 아주 독특한 것은 아니며, 다양한 신학적 담론이 최근에 시도되었는데 정치신학  해방신학이 두가지 예라고 볼 수 있다. 사회윤리학과 기독교교육학에서도 공적영역에서의 신학의 역활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왔으며, 공공신학자들은 다양한 신학의 전공분야에 있으며 한편 본인의 전공분야에서 공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를 하기도한다. 신학과 타학문과의 교류를 시도할 때 어려운 점은 주로 신학적 상호작용의 근원과 청중이 일방적이었다는 점이며 신학이 다른 기관과 학교 학문으로부터 연구결과를 이용하는 반면 다른 학문기관은 신학의 연구결과와 연관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공공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모든 관련 학문과의 대화체적 공적 관계를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여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공공권내의 다른 단체의 공공권에서의 기여를 위하여 자신들의 독특한 유형을 유지하며 공통적 영역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공공신학의 신학적 근거는 여러가지로 볼 수있는데 화란학자 에드워드 스킬리빅스 (Edward Schillebeeckx) 의 논제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프랑크 프루트 학파 (Frankfurth School) 의 비판이론 (Critical Theory) 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신학을 전개하는데. 이론을 정립하는 목적은 단지 어떠한 논제에 대한 옳바른 이해만이 아닌, 사회 및 정치적 조건을 창조하여 종국적으로 인류의 증진과 사회개혁을 이루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스킬리빅스는 이러한 비판이론을 바탕으로 이론과 실천을 복합한 신학을 추구해야하며 더 나아가서 단지 순수한 철학적 신학적 해석학은 그의 현실적 적용이 따르지 않는한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았다. 그는 신학은 ‘ 세상과 교회에서 적용되는 비평적이고 자기의식적인 기독교인의 행동 이라고 보았다. 

율겐 몰트만 <한국 컴퓨터 선교회>

율겐 몰트만 (Jürgen Moltmann) 은 그의 저서 God for a Secular Society: The Public Relevance of Theology를 통해 공적 연관성 없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없으며 신학의 기독교인의 정체성 없이 공적 연관성은 없다고 선언한다. 또한 신학이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것과 같이 공적비평적예언적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학이 공적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은 주어진 사회안에서 소외된 존재와 가난한자들을 위해서 정치적이 됨으로써, 또한 존재하는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가치관을 비평적으로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보편적 관심을 표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공공신학은 신학이 특정한 영역으로 혹은 사적인 좁은범위로 한정될 것을 강요하는 세속주의의 경향을 거부하는 담론이라고 보았다. 몰트만이 주장하는 공공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빈곤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사회에서의 비평적이고 예언적이고반성적이며 논리적인 신학의 추구를 의미한다. 

공공신학 연구에 대한 글에서 헤롤드 브라이텐버거 (E. Harold Breitenberg) 는 학자들 사이의 여러가지 다른 견해를 지적하였다. 그는 한쪽에는 정치적 권력, 정부 및 사회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과 신성 사이의 관계와 연관된 시민종교 혹은 공공종교 (civil religion or public religion)와 공공신학의 유사성을 토의하는 반면에, 시민종교의 주요 관심은 국가와 국민에 있고 공공신학은 종교적 신념과 관습에서 시작함을 구분한다. 시민종교는 공적인 삶과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고, 특히 공적종교는 시민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종교적 지지자와 세속적 지지자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반면 공공신학은 종교적 공동체의 관점과 특별한 신앙전통에 바탕을 두고 신학적 개념의 공적 의미와 해설을 취급하여 종종 정부 정책에 비평적인 신학적 반영을 다루게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신학과 유사하지만 공공신학은 정치뿐 아니라 광범위한 공적 생활을 취급한다고 보았다. 브라이텐버거는 공공신학을 종교적으로 알려진 담론으로, 자신의 종교적 전통안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지지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으며 동시에 외부에서도 이해할 수 있고 설득력 있는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공공신학은 종교적 공동체 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사회에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논쟁의 근원, 언어, 방식이 모두에게 개방적이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은 종교적 공동체와 일반적 대중에게 대체적으로 사회에 설득력 있을  있고 평가되고 판단될  있는 방법으로 주장되는 공적주제에 대한 종교적으로 알려진 담론이라 본다. 그에게 있어 공공 신학은 중요성은 공적생활과 공익에 있어 기독교적 믿음과 관습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의 활동에 얼마나 이 것이 설득력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위의 학자들과 그외 공공 신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으로부터 제시된 논제를 반영하여 공공신학의 근거와 정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학은 본질적으로 공적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이 평가적, 비평적 본질을 가지고 그 맥락이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되기 때문에 신학연구의 결과는 기독교 공동체 외의 광범위한 대중에게 적용 가능하다. 던컨 포래스터 (Duncan Forrester) 는 ‘공적 논쟁을 중단하는 것은 [신학의] 심각한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고 언급한다. 둘째, 신학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공적 토의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의 독특한 관점 때문에 신학적 결과가 공적 주제에 사실상 깊이 공헌할  있는 것이다. 셋째 ‘공적’과 ‘사적’의 이분법은 공공신학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공신학은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단지 공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두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합치 않으며 ‘public’은 신학을 하는 장소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논쟁에 참여하는 모두를 위한 신학의 열림 (openness)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한 일반적인 접근과 열린 담론과 관련이 있다. 넷째, 대중 신학의 건전한 발전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신학의 공적 유용성에 대해서 기독교공동체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대중 담론에서 신학적인 시야를 활용할 필요성에 대해 일반적인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다섯째로, 공공영역에서의 교회의 진실과 지속가능한 참여를 위해서, 교회는 단지 실용적인 접근에 대한 유혹을 피해야하며외양이나숫자나 결과만을 추구하는 접근 방법을 지양해야한다. 교회의 공적참여에 있어서 단지 상황에 맞추어서 단순적인 시도가 아니고 보다 비평적이고 신학적인 원칙과 방법론 하에서 진행되어야 함에 공공신학의 연구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공공신학과 사회정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공공신학은 비평적 이론을 바탕으로 논제를 발전시키며 사회 정의 (social justice) 함께 공동선 (common good) 우선으로 추구한다고 본다. 첫째로, 공공신학은 공공영역 안의 다양한 대화 상대들과 함께 공적문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바탕과 방법론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기독교 정체성이나 특성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신학적 시야가 공적 대화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공유된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 한다. 둘째로, 신학적 문제와 주안점은 신학의 대중성 - 신학의 공공의미와 공공생활의 신학 -  추구하는데 있다. 현재 현대사회의 하나님 나라의 영향을 찾는 것, 그리고 대중참여의 신학을 촉진하는 하면서 ‘교회-학계-사회’ 의 역학과 함께 그외 공공권에서의 주 공동체의 연관성과 상호비평에 대해 계속 추구한다. 셋째로, 현재의 정치 체계를 향한 태도는 제도자체를 전적으로 부정이거나 악으로 보지 않는다. 공공신학은 혁명적이기 보다는 개혁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한편 모든 종류의 공공생활에서의 독점에 대한 도전하고 대화와 논쟁에 대해 지지함으로서 공평하고 열린 사회를 추구한다. 이런 이유로, 공공신학은 공적인 담론이 있기 위해서 토의가 가능한 민주주의 체제가 공공신학을 적극적으로 이론적으로 전개하고 실천할 수있는 보다 이상적인 장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체제에서도 공공신학의 발전을 보게된다. 특히 공공신학은 종교공동체와 함께, 연구결과의 이행 못지않게 신학의 실천을 위해서 시민사회와 긴밀하게 협조한다. 넷째로, 공공신학의 주요문제들은 공공생활에서 불평등, 종교의 배제정책, 정부의 독점성, 공공영역의 시장체제에서의 불평등이나 미디아의 문제, 생태계의 파괴 등 다양하다. 이 문제에 관해 공공권에서의 주체들과 상호비평을 통해서 공공신학은 적극적으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외부와 내부 모두 정책입안에 참여한다. 공공신학은 기존하는 체계 안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공공신학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사회정의와 공동선에의 추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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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의 개념에 대해서 철학자들의 논재들을 검토하게 되면,  롤즈 (John Rawls)는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이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공익을 위한 공리주의적 개념에 대한 접근 방식에 도전하였으며, 그는 혜택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분배 원칙을 결과로 하는공평한 환경에서의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에서 파생된 ‘공평으로서의 정의 라고 보았다. 그의 이론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조건하에), 사회에서 불우한 사람들에게 가능한 최고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두 가지 목표에 기초한다. 

마이클 샌달 (Michael Sandel) 은 이에 대해 비평하면서 정의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세 요소는 사회복지에 극대화개인자유의 극대화 그리고 덕을 배양하는 이라고 하면서 특이 세번째의 요소에 대해서 강조한다. 하면서 광범의 한 문제에 대해서 도덕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도적인 변화만이 아닌 개개인의 마음과 심성이 바꿔야한다는 이다. 그러면서 종교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정의에 대해 관여하고 세상을 바꾸었는가 강조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이 같이 추구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기독교가 깊이 공헌 할 수 있다고 본다. Compassionate Justice 라는 책을 통해서 크리스토퍼 마샬 (Chrstopher Marshall)은 기독교가 기여할 수 있는 영적인 요소를 다루면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화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과 ‘탕자의 비유’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를 긍휼 (compassion)  중심이 되며 사마리아인과 탕자의 아버지로 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함에 근거한 정의 구현을 주장하고있다. 즉 성경이 이야기 하는 정의 구현은 하나님의 깊은 자비를, 그분의 사랑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이어서 던컨 포레스터 (Duncan Forrester) 는 남아공에서 진행되었던 진리와 화해 위원회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에서 나타난 데로 용서가 정의를 이루는 근원이라고 하며, 정의의 실현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문제가 어떤 철학이나 신학의 이데올로기적 견지 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정의와 평화의 통합적 접근을 강조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이 접근방식이 현 상태 유지를 지지하는가 혹은 불의한 권세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는가, 아니면 소수, 빈곤자, 억압받은 자들의 관심을 대변 하는가? 이에 대해서 성경은 보다 깊은 차원의 정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정의라는 개념은 단지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뿐만이 아니라약자억압받는 사람그리고 빈곤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이다.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난 정의는 단순히 법적으로 공평한 대우나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내용을 넘어서, 적극적인 긍휼의 적용으로 나타난다. 월터 짐멀리 (Walter Zimmerli)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 요구되는 정의는 단지 법률적으로 악과 선을 구별하는, 저스티티아 (Justitia : 로마신화에 나오는 눈을 가린 여신으로, 공정한 법의 적용을 상징) 가 아니고 오히려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하는긍휼을 가진 정의로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compassionate justice).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는 소수자약자와 빈곤자들을 향한 긍휼에 대한 하나님인 요구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긍휼은 로잔 대회의 “케이프 타운 서약”이 말한 대로 긍휼에 가득찬 정의를 요구하는 것인데 빈곤자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긍휼과 긍휼의 행위를 사랑할  아니라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억압하는 모든 자들을 폭로하고 반대하는 것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화정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앞에서 지적한데로 급진적인 혁명적인 접근 방식이 아닌 개혁을 통한 서로의 정의를 추구하며 의견의 일치를 추구하면서 공동선을 이루게 하는 이 공공신학적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정의와 공동선

공동선 (common good)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들의 공공 생활 신학의 정치적 경제적 측면을 상당히 형성 시켰다. 공동선이나 선한 사회 (good society)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이 이론은 기독교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공동선이 상호 책임성 및 고정된 원칙보다는 과정으로서 함께 묶여 있음을 보는데서 출발한다. 학자들은 그것이 개인주의에 도전하고 사회 전체의 복지와 성취를 촉진하는 사회 질서에 대한 필수 비전이라고 보며, 정치권력을 가진자와 일반인들과의 관계는 항상 민주주의 이론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교회의 역할은 권력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동시에 약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권한을 부여하는 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 신학은  민주주의 체제가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시민을 형성 할 것이라는 견해에 도전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형성되고 권한이 부여된 인물들로 부터 공동선에 대한 성취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공동선의 의미에 대한 학자간에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 또는 정부의 목적을 공동의 추구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 소수자 들을 들을 돕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정치 공동체는 그 공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공공의 선'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정의가 다소 일반적이고 모호하지만,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또는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거부하는 교회의 접근 방식을 강조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누어 지고 공유된  추구로 묘사 될 수 있다. 셋째, 공공의 선은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정치 생활을 조직하기위한 포괄적인 수단으로 간주된다고 본다. 촬스 코랜 (Charles Curran)에 따르면 공동선의 개념의 발전은 몇가지로 보눈데, 이것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람들의 참여를 강조하고, 인권을 공익의 이해에 통합시키는 것이고, 일시적인 공동선과 영적 공동선 (종교적 자유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과 일시적인 공동 선과 공공 질서 사이의 구별하는 것이다. 셋째, 이 개념은 상호 작용의 차원을 강조하고 그 적용을 지역 및 국가 경계를 넘어서 확대해야한다고 본다. 개인의 행동을 다루는 데있어 법과 도덕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는 공익과 공공 질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공익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핵심적인 문제로 보인다. 넷째, 공동선은 가장 큰 수의 가장 큰 행복에 대한 다수 주의적 관점의 실용 주의적 접근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정부와 다수를 위해 개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장려한다. 공평성 또는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해, 합의 통치의 정치는 법치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의 이익을 향한 최대한의 합의에 도달하는 데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공동선을 추구하려면 당사자들이 공통성과 관계를 추구해야한다. 이것은 복지 국가의 가정이라는 개인적인 이익의 합의 이상의 것 이며, 인간의 본성에 뿌리를 둔, 공유 된 문화와 본질적인 가치의 추구를 의미한다. 여섯째, 공동선은 단순히 정의 될 수있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모든 것이 공유되는 프로젝트와 관련된 책임 집합과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프로젝트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선의 개념에서 문제점을 본다면, 이를 추구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에서 대두되는 것과 같이 공동선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현대 다원주의와 세속적인 상황에서 누가 공동선을 정의하는가? 또 누가 주장하는가?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선의 신학은 소수인과 약자의 문제에 대안적인 접근법을 제공하고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의미있는 대화를 보여준다. 공동선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된 인간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바탕을 둔 인간 존재의 존엄성의 개념에 기초한다. 이 존엄성을 계속 증진시키기 위해 모든 민주 국가는 개인의 평등과 자유를위한 메커니즘을 제공하고 공동선에 대한 최대 합의를위한 공동체를 창설해야 한다. 이 접근법의 핵심 쟁점은 특정 집단, 더 넓은 사회 또는 국가에 공통된 이익이 무엇인지를 어느 힘을 가진 소수가 단순히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정을 중요시 하고 오히려 공통의 이익을 결정하는 것은, 소수인들을 보호하면서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진행되는 프로젝트이며 이는 지속적으로 협상되고 개정되어야 하는 이다. 

 

나가는 

공공신학이 추구하는 공동선의 이론은 자유 민주주의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소수계층,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개인주의와 다수주의의 약점을 지적하고, 자본주의 시장모델이나 정부 제도의 지배의 독점주의적 엄격한 적용에 대한 대안을 찾는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법의 지배는 인간 사회가 번성 할 수있게 해주는 근대 민주국가가 이룬 성과이다. 그러나 사회는 또한 소수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깊이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기득권을 가진자로 부터의 자선이나 동정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체계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  지극히 작은자 대한 제도적 장치를 제공해야 한다. 말틴 루터 킹 목사는 그의 연설 중에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들면서, 강도를 만나서 다친 이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러나 그는 궁국적으로 여리고로 가는 길이 안전하게 되어서 강도를 만나는 일이 없는 날을 꿈꾸며 추구한다고 하였다. 그는 개인의 긍휼과 자비로 제한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양극화의 시대에 살고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서로 합쳐서 나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주장과 견해에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 화해자로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진보보수를 떠나서 약한자와 가난한자소수인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의로운 자들이 되기를 제안해 본다. 상대방을 대할 때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이 서로 공통적인 정체성을 세워 나가야하는 동역자로동반자로 보아야 하리라 본다. 더 나아가서 서로를 단지 현상태 유지하는 타협과 수용의 상대가 아닌, 적극적으로 공동선을 추구하게 화해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게 되기를 제안한다.

 

김창환교수, Professor of Theology and Public Life, Fuller Theological Seminary

 

마이클 오  michaeloh@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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