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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메일(Alpha Male)의 정글 교회, 폭풍을 맞다미투운동의 폭풍, 새로운 교회를 몰고오나?
교회 내의 미투운동 <출처: 카톨릭 프레스>

[미주뉴스앤조이=마이클 오 기자] 폭풍이 낡은 권력과 야만의 문화 위로 맹렬히 불고있다. 권력이 떠받치고 있던 궁궐들은 하나씩 무너지고, 폐허 사이로 알파메일 (Alpha Male)의 주검들이 발견되고 있다. 

안태근, 이윤택, 조민기, 고은, 그리고 안희정 등 제각기 자신만의 왕국에서 군림하였던 알파메일의 야만과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우월한 권력과 폐쇄적인 권력 구조를 바탕으로 희생자들을 유린하고 철저하게 억압해 왔다.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구조적인 권력의 억압이었으며, 그 억압의 궁궐 가운데 이들은 야만의 남성을 마음껏 휘둘렀다. 

이러한 알파메일의 궁궐은 결코 고상하고 질서있는 문명의 나라가 아니라, 철저한 약육강식과 야생의 본능이 지배하는 정글이었다. 이들이 각기 가면처럼 뒤집어 쓰고 있던 정의, 아름다움, 진리, 혹은 민주의 이름은 그저 야만을 숨기는 유치한 위장막일 뿐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미투운동으로 드러난 성폭력 가해자들 <한계레 신문사>

알파메일 (Alpha Male) 목회자

교회에도 이 맹렬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성폭력에 희생당하고 억압되었던 수많은 이들에게는 구원이자, 교회 내에서 알파메일을 자처하던 이들에게는 심판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미투운동의 폭풍이 교회에도 상륙했다는 것은, 이 공간도 결코 신성과 거룩으로만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어쩌면 교회 밖보다 더욱 심각한 야만과 모순이 깃들어 있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교회가 이런 정글과 같은 야만과 모순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투의 폭풍이 불어닥친 교회들과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교회들을 이러한 시각으로 볼 이유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미투운동으로 드러난 수많은 권력형 목회자와 야생의 알파메일은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닮아있기 때문이다. 

알파메일은 동물사회학에서 야생의 무리지어 살아가는 동물들중에 우두머리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알파메일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무리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구성원들 위에서 군림하며 무리를 이끄는 존재로 인식된다. 무리의 보호와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한편,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님으로서 먹이와 짝짓기 등에 있어 특권을 누린다. 

현상적 관점에서 교회의 권력형 목회자들을 바라볼 때 알파메일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는 경우가 많다. 소위 메시아 컴플랙스라고 불리우는 망상에 가까운 자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역할이 공동체에 필수적이며,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서 공동체를 이끌수 없다는 망상이다. 마치 알파메일처럼 공동체의 안위와 운명이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는것처럼 여긴다. 

이러한 메시아, 혹은 알파메일의 자의식은 자신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합리화로 이어진다. 자신의 역할이 중요한만큼 그에 상응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전횡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착각이 자신의 권력과 통치를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알파메일로서의 목회자는 정복과 군림 이외에는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한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소통과 대화를 불편하게 여기고, 이에 서툰 이유도 알파메일로서의 리더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성폭력 <YTN>

알파메일의 십자가

목회자가 알파메일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나면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거룩한 부담감이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어려움이자 불가능성이다. 자신이 감당할수 없는 공동체의 안위와 운명을 스스로 떠맡음으로서, 한편으로는 그것에 짓눌리는 고통과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괴감 가운데 점점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감당할수 없는 십자가를 진 알파메일 목회자는 돈, 권력, 혹은 섹스 등의 유혹에 쉽게 빠질수 밖에 없다. 무너져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울길 없는 이가 자기자신을 확인할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알파메일의 상급

알파메일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될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양심과 공감능력의 상실이다. 자신만의 특별한 십자가와 그에 상응하는 권력과 위치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뒤틀린 인식은 곧장 자신의 거룩한 부담감을 경감할수 있는 수단이자 대상으로서 오메가 (Omega), 즉 공동체의 구성원중 가장 연약한 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결과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희생된 구성원을 향한 최소한의 양심이나 그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전혀 찾아볼수가 없게된다.  

수많은 목회자가 파렴치한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침이나 사죄 대신에 뻔뻔한 변명과 은폐, 그리고 희생자를 향해 더욱 잔인한 폭력을 가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일단 알파메일 목회자가 되고나면, 더이상 그 구성원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 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욕망과 필요를 채우기 위한 먹이감 혹은 상급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베타 메일 (Beta Male)

정글에서는 알파메일과 그의 희생양이 되는 오메가만으로는 무리를 이룰수 없다. 알파메일의 무소불위의 권력만으로 오메가들의 고통과 눈물을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무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알파메일의 통치를 효과적으로 실행하고 유지시키는 또 다른 존재들이 필수적이다. 베타메일이라고 불리우는 계층이다. 

이들은 알파메일의 권위와 통치 아래 있으면서도, 그들의 생존과 안위를 보장하는 알파메일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는 계층이다. 

이들은 비록 알파메일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통치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 댓가로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이득에 만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권력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알파메일의 폭력과 부조리를 눈감고, 나아가 희생양이 되는 오메가를 만들어내고 또 억압하기도 한다. 

베타메일은 알파메일이 권력에서 이탈하는 순간에도, 새로운 알파메일을 찾아 무리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권력의 정점인 알파메일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베타메일은 계속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며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리는 알파메일 보다도 그를 떠받치는 베타메일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유지된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권력의 정점에 서서 알파메일에 상응하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름의 권력과 특권을 누리며 무리의 권력구조를 실질적으로 지속시킨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알파메일의 폭력과 부조리를 생각할때 반드시 염두해야할 계층도 바로 이 베타메일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세력일 것이다. 

거듭 강조하는 것은 모든 교회에 이러한 부조리한 권력구조가 숨어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알파메일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반드시 베타메일에 상응하는 무리도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알파메일의 존재는 베타메일 없이는 성립하기 힘들며, 많은 경우에 악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은 이 베타메일 속에 숨어 있다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미투운동 <http://scjbible.tistory.com/5192>

교회는 정글인가?

목회자를 알파 메일로 규정하고, 그에 희생당하는 오메가와 이 부조리한 권력구조를 유지시키는 베타 메일을 중심으로 교회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 비극을 직시하지 않고, 교회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야만에 눈을 감는다면, 누구도 이 폭풍의 목소리 앞에 자유롭지 못할것이다. 결국 이 폭풍은 그동안의 짖눌리고 희생당하였던 자들의 눈물과 분노로 일어난 것이며, 그들의 역사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 자유로울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지 이 부조리를 강화시키는 자와, 이에 맞서 싸우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다시 물어보아야 한다. 교회는 과연 정글인가? 교회내 미투운동을 통해 현상적으로 접근하였을때 내릴수 있는 답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다. 현재의 교회는 야만이 가득한 정글이며, 심판의 폭풍 가운데 미래가 사라져버린 암흑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역사에 걸쳐 지속되어온 투쟁의 장소로서 교회를 다시한번 기억하고 상상해보아야 한다. 인류 역사와 함께 교회 안밖에 만연했던 야만과 모순을 향해 피를 뿌리며 싸워온 곳도 교회이기 때문이다. 

창조 가운데 심겨진 신비와 고귀함을 담은 인간에 대한 믿음, 그것을 존재케한 신성을 믿는 신앙의 터전으로서 교회는 결코 야만의 정글이 될수 없다. 교회는 오히려 이러한 야만에의 저항이며 투쟁이다. 

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교회의 정의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언이며, 실천으로 다시 태어나야하는 소명이다. 

 

정글을 벗어난 교회

교회로 번진 미투운동은 정글로서의 교회에 대한 승리의 서곡이다. 알파메일이 호명한 오메가로서의 인간을 분연히 벗어버리고, 온전한 아름다움과 고귀함의 결정체로서의 인간이 정글로서 교회에 전하는 심판의 메세지이기 때문이다. 

이 승리의 서곡은 눈물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슬픔과 분노가 노래가 되어 다가왔다. 따라서 교회는 이 눈물의 노래를 부르며, 권력과 폭력에 중독된 야만의 정글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그동안 눈물 흘린자들을 회복시키려는 노력과 억압받는 정의의 실현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나아가 폭력과 부조리를 양산하는 권력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권력의 욕망과 중독 벗어난 자유로운 교회를 꿈꾸며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할것이다. 

마이클 오  michaeloh@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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