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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요?[권영석의 복문단답] 꼭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요?

Q. 절대자가 있다는 것은 믿어집니다. 그러나 그 절대자가 꼭 기독교의 하나님일까요?

A. 기독교가 얼른 믿기지 않는 데는 이 논리도 한몫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이 물음은 사실 적어도 3가지 질문이 합성된 것입니다: 기실 절대자가 있다는 것이 절대자 같은 것은 없다는 것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1)절대자는 과연 있을까? 2)있다 하더라도 그 절대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3)기독교의 계시/경전만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일까?
기독교의 신빙성 문제(#3)를 차치한다면, 이 질문에는 사실 한편으로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 metaphysics, theory of being)이라고 하는 해묵은 과제와 다른 한편 인식론(= epistemology, theory of knowing)이라고 하는 복잡한 철학적 과제가 함께 응축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인간 너머의 존재에 대한, 그리고 '실증적 인식'의 한계 밖 존재들에 대한, 나아가서 절대자 내지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또는 존재 자체의 '존재'에 대한 물음들은 대답하기가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니, 유사 이래 동일한 질문에 골몰해 왔음에도 철학자들마다 여전히 의견이 각각이라 하겠습니다. 
형이상학(#1)이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면, 인식론(#2)은 이 절대자의 자기-계시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 두 물음은, '계몽된' 인간 편에서 보자면, 결국 동일한 물음의 양면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만물을 창조한 능력자 곧 절대자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절대자는 우리 피조물들이 [창조]주인을 알아보기 바랄 것이며(절대자로 알려지셔야 하기에) 따라서 그분은 또한 이 사실을 우리로 알아먹게 할 수 있을(그분은 절대자이시기에) 것이라 전제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이런 일련의 전제를 받아드리는 것이 신-지식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만일 절대자의 존재와 자기계시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진다면 존재론과 인식론 둘 다 모두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1)만일 절대자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없는] 절대자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며 또 알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무신론자(Atheism)들이 믿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그러나 신은 없지만, '우연'이 장기간에 걸쳐서 형성되는 '합리'적 우연 같은 것이랄까 뭔가 일정한 규칙/법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을 ['무신론'자 중에서도] 이신론자(Deism)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신(理神)은 일종의 가상의 존재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절대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반대로 절대자가 존재할 것 같긴 하나 만일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없다고 하면, 이런 '알 수 없는' 절대자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존재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이들을, 이런 것도 '믿음'이라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불가지론자(agnosticism)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절대자를 결국 알 수 없다면, '절대자'라는 말은 혹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분이 실제 절대자인지 아닌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으며, 기껏해야 우리의 주관적 관념 안에서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런 절대자는 존재하든 안하든 우리에게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며, 자칫하면 허상을 좇아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만드는 궤변적인 대상으로 희화화되기에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그 결과 불가지론은 결국 무신론으로 귀결되든지, 아니면 그야말로 "궤똥 철학"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철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신-지식은 이정도입니다. a)무신론 아니면 b)불가지론, 기껏해야 c)이신론에 불과합니다. 결국 '없다' 내지 '모른다', 아니면 기껏해야 '있을 것도 같다'에 그치고 말 뿐입니다.
[그래도] 절대자는 "있어야 하겠다" 해서 이번에는 종교가 나섰습니다: 우선 1)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신이 내재한다고 믿는 범신론; 2)모든 존재하는 것의 바깥에 존재하는 신적인 존재는 그 어떤 비신적인 존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자라고 믿는 유일신론이 그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힌두교나 불교는 전자에 해당하며, 이슬람교는 후자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근대 이후 철학에서 이 둘 사이의 통합을 시도하기 위해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이란 개념을 도입한 후로 각 종교마다 초월과 내재를 함께 동원하여 교리들을 설명하려 들지만, 관념 내지 도그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 강조점은 내재 아니면 초월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신은 인간과 별도로 존재하는 신이라기보다 인간이 곧 신이며, 해탈이란 곧 신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영겁에 걸쳐서 마침내 인간으로 윤회되었을 그 시점에 성불하지 못하면 기회는 또 언제 다시 올는지 알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지요. 무릇 만물 안에 다 신이 내재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신들은 무능하여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며 결국 구원이란 자력구원을 의미할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알라는 유일한 절대자로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은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세계 저 너머에서 '독야청청'하는 '거룩자'이므로 우리 인간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두 차원이 서로 섞인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알라 신은 너무 멀리 있어서 우리가 알 수도 없으며, 또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해서 여전히 인간의 구원은 "아르칸"(5행)을 통한 자력구원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전자의 신-이미지가 "안"의 이미지라면, 후자의 신-이미지는 "밖"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 두 차원은 물과 기름 같아서 서로 섞일 수 없는 셈이지요. 즉 내재하면 초월을 상실할 수밖에 없고, 초월하게 되면 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여기까지가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신-지식인 셈이니, '안'과 '밖', 범신론과 유신론 둘 사이에 끼어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인 셈이지요. 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생겨난 샤머니즘 역시, 실은 이런 틈바구니에서 절대자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매개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만, 이 역시도 인식론적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혼란만 더욱 가중시키는 미신(迷信)의 일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신-이미지에 굳이 갇혀서 시달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가 생겨난 것이고, 어차피 절대자란 우리 인간의 앎의 범위를 벗어나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알 수 없으며(불가지론), 나아가서 절대자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무신론)라는 반동이 요즈음 복고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결국 '모름'이 지배하고 좌우하는 것이며, 기껏해야 그 '모름'은 그래도 뭔가 일관성 내지 진화성을 지향하[면 좋]지 않겠냐 하는 '희망'을 붙잡으려는(이신론) 정도로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그나마 차선으로 생각하게 된 셈이지요. 
이처럼 '모름'이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인간의 지식에서 더 이상 선한 것이 나올 개연성이란 희박해 보입니다. 개미 쳇바퀴 돌 듯이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 한계 안에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피조물이란 반증이오, 뭔가 절대적인 존재가 존재하리라는 추정은 무성하지만 철학도 종교도 이런 '초월'과 '내재' 사이의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지요.
바로 이 지점이 기독교가 끼어 들 수 있는, 그리고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기독 곧 그리스도 예수란 인물이 바로 이 '밖'과 '안'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실제로 감당하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 보여주는 바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바로 이 절대자가 개입하셨다는 것이며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이 절대자의 선택받은 백성이오, 팔레스타인 땅은 약속의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지막 때(종말 또는 새 시대)에는 절대자 자신이 친히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며, 실제로 BC 4년에 이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초월과 내재가 접합하는 일이 절대자 자신에 의해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주도되었고 또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초월과 내재의 통합이 이토록 중요한 까닭은 초월자의 존재 자체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초월자와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만이 아니라, 절대자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이 함께 일괄 타결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의 존재가 뭔가 확실해 보인다면 창조주인 절대자의 존재는 더더욱 의심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문제는 그 절대자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에 결국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인데, 이제 이 종말의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는 그 절대자를 보고 듣고 만져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절대자의 존재는 물론 나아가서 장차 그 절대자가 이 세상을 향해 무엇을 의도하셨는지 그분의 의지까지도 알 수 있도록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초월자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나 초월자의 내재 또는 내재자의 초월이라고 하는 역설적인 자기 현시가 필요 불가결하였던 셈이지요. 예수의 탄생이 기점이 된 기독교의 이런 역설적인 역사가 아니었다면, 우리 인류는 여전히 무신론-불가지론-이신론이라고 하는 인식론의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기 힘들며, 인식론이 한계에 부딪쳐 있는 이상 범신론이든 유일신론이든 혹은 또 다른 무엇이든 이는 다 그저 공허한 추측이나 독단적인 주장 이상을 넘어설 수 없게 마련입니다.
해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공허한 추측 내지 독단적인 주장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존재론과 인식론을 통합하신 이 그리스도에게 곧바로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피조물 가운데 오신 창조주요, 모든 피조물에 앞서서 선재(先在)하신 절대자로서 우리에게 절대자 하나님을 계시해 주시고자 오셨으며,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절대자를 만날 수 있으니, 그분 스스로가 바로 절대자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인물이 우리와 동일한 차원 곧 피조자의 차원을 뛰어넘는 존재, 곧 창조자 내지 절대자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는 단서는 신구약 성경에 가득하며, 당시의 로마를 포함한 인간의 역사도 여러 가지 정황적인 방증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물론이거니와 선재하셨던 그분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역사 속에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만큼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분에게로 곧장 가서 인식론의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계시의 비밀을 발견하든지, 아니면 인식론의 쳇바퀴를 또 다시 공회전 시키든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구도자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스스로 존재론-인식론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주장하신 이 그리스도를 독단적이라 단정 짓기 전에 일단 그분에 관한 증거들을 살펴 볼 것을 강추하는 바입니다.

권영석  youngseokw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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