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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사용 설명서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적 회개를 회복할수 있을까?

[미주뉴스앤조이(LA)=마이클 오 기자] 최근 불거진 현직 여검사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전 검사의 회개가 이목을 끌고 있다. 끔찍한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그에 대한 뉘우침이나 책임있는 행동없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회개의 의미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오늘날, 과연 회개는 무엇이 되었으며, 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다시 한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안태근 간증 영상 <유투브 갈무리>

헷갈리는 회개

회개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중요한 관문이자 선언이라고 할수 있다. 신앙의 여정에 나서기 위해, 이전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으로 삶을 전환하기 위한 변화와 다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회개는 단순히 윤리적 영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 삶을 추동하는 욕망과 삶의 방식 등, 한 사람의 삶에 있어 전반적인 영역에의 성찰과 전환을 의미한다. 

이 말은 회개가 단순히 사변적이거나 개인적인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주변 세계와 사람들과의 관계 위에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삶이란 세계내 존재로서 타자와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개는 본질적으로 지극히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교회 내에서 경험하는 회개는 매우 사변적이고 감상적일 뿐만 아니라, 틀에 박힌 형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번 안태근 전 검사의 회개 내용만 보더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과거사와 좌절된 욕망 가운데 엉성하게 엮인 신앙 체험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깊은 내면적 체험을 통한 세계와 타자로의 이행을 그리기 보다는 지극히 사변적이고 폐쇄적인 경험의 나열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회개는 반 공동체적이며 반 사회적인 특징을 띄고 있다. 안태근의 경우에서 볼수 있듯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그 희생자를 생각조차 할수 없을 만큼, 그의 회개는 자기애로 가득차 있으며, 타자가 결여된 폐쇄적인 독백이다. 

자기희생과 타자와의 연대를 전제로하는 기독교 신앙을 배경으로 이러한 회개의 현실을 겹쳐보면, 참으로 이질적이고도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게 된다. 어떻게 타자를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지독한 자기애를 고백할수 있는 것일까? 

 

회개의 사회학

그 해답은 회개 이후 교회의 반응을 보면 쉽게 찾을수 있다. 보통 회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들어가거나, 적어도 공동체와의 결속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는 누구든 공동체의 일원이 되거나 그들과의 결속을 원한다면 회개는 어떤식으로든 거쳐야 하는 절차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공동체가 보장하고 제공하는 유익을 위해 회개를 한다는 것은 억측일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로부터의 유익을 얻기원할 때, 회개는 넘어가야할 절차가 될수 있다. 

공동체의 유익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일수 있다. 공동체가 제공하는 내면적 안정감과 교제, 그리고 종교적 자기실현의 기회와 만족감 등은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대상이다. 

나아가 대형 교회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이룰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흔한 예로 선거철만 되면 후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미주 이민교회에서도 시챗말로 장사나 사업을 하려면 교회의 장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회개를 통해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이며 동질감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회개는 매력적인 수단인 것이다. 

 

회개의 심리학

한편 회개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공개적인 회개를 통해 흔히 얻게되는 공동체의 동정심이, 과오에 대한 죄책감이나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회개는 공동체적 면책을 통해서, 피해자를 오히려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사태까지 만들어 내기도 한다. 

최근에 일어난 멤피스의 대형교회 목회자의 성추행 사건이 이러한 회개의 심리학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수 있다. 과거 성추행을 당한 피해여성이 사건을 폭로하자, 가해 목회자인 엔디 세비지는 재빠르게 자신의 교회 회중 앞에서 회개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회중은 즉각적으로 기립박수와 격려, 그리고 지지를 보내줌으로서, 가해자의 죄책감을 들어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를 소외시키고 그녀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일으켰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과거 조폭두목 출신들의 회개와 목회자 전향 또한 이러한 회개의 면책효과를 이용하는 예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앤디세비지 고백<유투브 갈무리>

회개의 경제학

신앙의 본질적인 의미의 회개와 현실의 회개 사이에 이 광대한 계곡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한편으로는 회개가 보장하고 제공하는 듯한 사회적, 심리적 효과에, 굳이 신앙적 전회를 결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얻기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 조차도 서비스 소비재로 유통되는 오늘날, 회개는 자신이 얻기를 원하는 서비스를 획득하기 위해 지불하는 가격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로서 행하는 신앙의 소비행위만으로 오늘날의 회개에 얽힌 모순을 설명할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자와 함께 반드시 생산자도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손쉬운 공산품으로서의 회개를 생산,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생산 주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은 그리 새쌈스러울것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종교소비센터로서의 교회의 풍경을 보면 이러한 설명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교회가 손쉬운 상품으로 회개를 진열해야 하는가이다. 

교회를 자본주의 사회 가운데 서비스 생산자로서 정의하게 되면,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온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혹은 생산의 목적은 자본의 영원한 확대 재생산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자본, 혹은 영향력과 생명력을 확대재생산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재화를 소비자의 욕망에 맞추어 매력적이고도 간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고유한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회개를 소비자의 욕망에 맞게 가공해야 할때 생기는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재화가 소비를 위한 상품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재화가 지닌 고유한 가치 대신 유통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재화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버리고 상품가치를 획득해야하는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해야하는 기독교적 회개는 더이상 회개의 고유한 가치와 신성을 가지지 못하고, 껍데기만 남은 회개로 변신하고 만다.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회개는 괴물과 같은 껍데기에 갖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그레고르 잠자가 된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그래고르 잠자  <출처:https://debatingday.com/14563/변신/comment-page-1/>

회개 사용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괴물이 되어버린 회개를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킬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전도된 질문 일것이다. 회개를 둘러싼 모순이 결코 현재의 교회와 기독교의 역사적, 구조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해 둔다면, 이 질문은 개별적인 문제로서 회개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가진 모순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것이다. 

따라서 회개의 회복은 기독교 전체의 모순의 해결이 전제되어야 하며, 이 거대한 작업은 현재의 기독교적 모순이 처해있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맥락 가운데에서만 이루어질수 있다. 

부족하나마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현재의 문제는 기독교가 처해있는 자본주의적 상황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가운데에 위치한 기독교는 결코 그 체제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교회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하려는 욕망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이룰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소외시키고 파괴시키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이 충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정신병리학적인 강박증처럼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충동은 결국 교회의 파괴, 즉 본질적 의미로서의 공동체와 신앙,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거룩한 인간이 완전히 파괴될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이 현재의 기독교 모순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해 회개는 그 본질을 잃고 상품으로 둔갑되어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적 모순이 오늘날만의 독특한 문제가 아니라, 전 역사에 걸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와 특별히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끊임없이 증거되었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러티브, 즉 이땅의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을 둘러싼 세상 권세와의 투쟁과 궁극적인 승리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에 맞서 싸워 이기는 방법,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회개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시대의 욕망과 공격에 무릎꿇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는 무기로써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외쳤다. 

이 회개는 더이상 사변적인 윤리나 감상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시대의 모순을 깊이 이해하고, 세상이 심어놓은 욕망으로부터 떠나오는 것이다. 또한 그 가운데에서 이미 승리하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삶과 길을 따라 사람들과 연대하며 공동체 가운데, 시대가 감당할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꿈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회개는 회복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에 저항하고 하늘나라를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개를 통해 신앙과 교회를 회복하고, 예수님의 복음이 나누어지는 세상이 올수 있도록, 우리는 올바른 회개의 사용법을 고민해야 할것이다. 

마이클 오  michaeloh@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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