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8.2.22 목 07:39
상단여백
HOME 목회/신학/설교 권영석의 복문단답
인간관계의 왕도는 없을까요?[권영석의 복문단답] 인간관계와 신앙

Q. 인간관계의 왕도는 없을까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식상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서 정말 사람다운 정리를 서로 주고받고 싶어요.

A. 각종 성범죄나 테러, 묻지마 살인 등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입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인간만큼 유능한 존재를 [이 세상에서는] 달리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정교하고 빠삭하며 [범죄에 있어서도] 뛰어난 존재라는 반증인 셈이겠지요. 

문제는, 인간은 각각 독자적인 존재인 동시에 그런 독자적인 개별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면서 서로를 지켜 주고, 또 서로 서로 인정해 주고 격려하는 가운데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고상함을 고양해 가도록 되어 있는 존재라는 데에서 야기한다 하겠습니다. 아무리 뛰어난들 [외딴 섬에서] 혼자 산다면(살아남는 것조차 쉽진 않겠지만) 그것이 무슨 큰 의미와 보람이 있겠습니까? 나무가 알아주겠습니까? 짐승들이 인정해 주겠습니까? 그리고 흉악한 범죄자들 역시 그 저변에는 왜곡된 모양새이긴 하지만 '함께하고픈'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지 않습니까?! 

인간은 반드시 다른 인간과 함께 있어야만 그 위대함이 드러나는 법이며, 또 인간으로서 자긍심과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애완용 동물이 일면 위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을 대체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인간을 서로 무서워하고 멀리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어 있는, 오히려 그것이 더 안전한 세상이 되어 있는 현실은 참으로 역설이자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태생적이고 구조적인 세상에 태어나서 그 모순을 삶의 일부로 [지혜롭게] 체화하여 살아가야만 하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각종 상처와 트라우마의 질곡을 견뎌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는 안전한 관계를 염원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경계하고 견제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미워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언제나 예의주시하며 사랑할지 미워할지를 그때그때 [눈치껏] 결단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런 위험부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해보려다 보니 기껏해야 개인적으로는 혼밥이니 혼술이니 비혼이니 하는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며, 집단적으로는 혈연 지연 학연의 동아리(갱) 같은 집단이기주의적인 양상의 극단적인 병폐들을 고안해 내게 되었다 하겠습니다만, 사실 그럴수록 인간은 자기 안에 그리고 이기적 집단 안에 갇혀 오그라들게 되었고, 오히려 소심하고 왜소한 인간이 되거나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셈이지요. 

해서 "비인간적인 인간"들끼리 부대껴서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 긍지와 보람을 느끼기란 결코 녹녹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자칫하면 상처를 받거나 아니면 상처를 주어야 하는 관계, 그래서 관계 자체를 아예 두려워하는 사회, 그러면서도 또 서로 인정받고 격려 받고 싶은 관계를 그리워한 나머지 뭔가를 시도하였다가 '혹시나 했더니 역시'를 더욱 확신하게 되고 도리어 더 큰 상처만 떠안고 마는 세상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친구 관계도, 형제 관계도, 심지어 부모-자녀 관계도 살얼음을 딛는 것처럼 늘 깨어지지 않도록 조마조마해야 하는 관계, 그 긴장이 너무 힘들어서 아예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것이 속편하다 할 정도로 빈궁해진 현실이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니던가요? 

현대인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그토록 열중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상처받을 걱정 없는]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벌충해 보려는 심산이 깔려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가끔씩은 휴먼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송곳 같이' 이 암울한 사회를 뚫고 삐져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지게 보이는 특별한 경우로 치부되고 말지 않습니까? 

이렇게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세상이 된 것을 오로지 개인의 이기심이나 부도덕의 소치로만 돌리는 것은 더 이상 궁극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소심함 내지 용기 없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여전히 '인간, 너희들이 뭘 할 수 있겠어?'하는 오만한 태도를 조금치도 바꾸거나 양보할 생각이 없이 점점 더 거만스럽게 폭압적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인간 사회의 에토스/스피릿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없이 개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게 되면, 개선을 위한 운신의 폭은 참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거대한 구조물 속에 갇힌 개인이란 기껏해야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과 같이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본/맘몬을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사회-경제 시스템이나, 힘/권력을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정치 시스템, 인간[과 인간의 성]의 가치를 그저 소유/소비 품목의 하나로 저락시키고 있는 삐뚤어지고 뒤틀린 인간 이해를 그대로 두고 있는 이상 거대한 세속적 뷰로크러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세상은 몇몇 '송곳' 정도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비인간적인' 뷰로크러시를 만든 장본인 역시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반복되면 자연히 잘못된 행동으로 표출되게 마련이고, 잘못된 행동이 재연(再演)하다 보면 잘못된 습관이 형성되어 나중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 결국 이런 잘못된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태동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우리의 처방은 당연히 양면적/전방위적 접근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삐뚤어진 생각과 믿음을 바루어나가야 하며, 시스템에 배어 있는 뒤틀리고 전도된 가치들을 통제/억제하고 제대로 된 인간-이해에 기초한 착함과 아름다움을 고양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정착되도록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리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말끔히 정화시키거나 리노베이션할 수는 결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가까운 주변(local)에서부터 멀리는 인류 사회 전체(global)를 향해 우리의 믿음과 헌신을 우리의 언행으로 드러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관계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인류 사회/역사 전체의 가치관 내지 세계관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그저 인간관계/대인관계의 기술(技術)을 넘어서서 삐뚤어진 인간관 자체를 바루고 새로이 정립해야 하는 철학적 사상적 신념/신앙과 밀접히 관련된 과제이며, 나아가서 인간 사회의 체제나 제도 나아가서 습관이나 관행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삐뚤어진/경도된 인간관/가치관을 찾아서 바로잡아야 하는 포괄적인 과제로 연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해]에 대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관점이나 가치는 무엇이며,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기본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나 동물과 동물의 관계와는 달리 그야말로 유기체적인 생명력 내지 교감력이 작동하는 관계입니다. 인간 개인이 그토록 지엄/존엄하고도 정교한 존재이기에, 인간과 인간이 합쳐지면 그 고상함과 숭고함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증폭/배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2.0의 관계는 일방적인 '줌'이나 일방적인 '받음'의 차원을 넘어서서 서로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그 관계 자체 내에서 아름다움을 배가해 내고 축적해 나가는 생장/성장/창조가 가능한 관계입니다. 아마도 무엇보다도 이런 2.0 관계가 가능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은 가히 창조주 우리 하나님을 닮은 존재요, '하나님의 형상'이란 별칭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독립한 개인으로 성장/성숙하기까지의 발달 단계를 의존(Dependent) - 독립(In-Dependent) - 상호의존(Inter-Dependent)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텐데, 마지막 단계인 상호의존은 단순히 독립 단계의 연장선이거나 결과물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히는 최고의 단계, 곧 간-인격 관계(inter-personal)의 차원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면 인격과 인격이 서로 서로 의존하는 측면이 없진 않지만 그보다는 두 인격이 하나로 연합하여 서로 서로를 고양하는(empowering 내지 enliving하는) 차원으로 연결되는, 그래서 그 자체 안에서 의미와 보람을 생성/생산해 내는 유기적 [관계의] 울타리(autonomous fellowship unit)를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각 개인은 그 울타리(fellowship)를 구성하는 상호-주체(mutual fellow/friend)라고 하는 2.0인간으로 등극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인간 말고는, 육체를 가진 그 어떤 피조물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펠로우십과 커뮤니티가 탄생/형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한 인간의 독립은 그저 독립된 인격으로 홀로서기 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2.0 관계(relationship/being of mutuality)를 위한 준비작업인 셈이며, 마지막 고지는 바로 이런 상호 연합의 관계(autonomous fellowship of mutuality)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간-인격(inter-personal) 호상(互相)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블리스는, 한 번 맛보고 난 이후에는 쉽사리 그 이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고 놀라운 것으로서 가히 그 차원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비유컨대 스마트 폰을 쓰다가 유선전화로 되돌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과 같다 하겠으며, 더욱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도스에서 윈도우로 바뀐 다음에 도스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에 방불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선전화기의 매뉴얼과 스마트 폰의 매뉴얼은 서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원이 달라지듯이, 또 도스 시스템의 매뉴얼을 가지고는 윈도우 시스템의 컴퓨터를 작동할 수는 없듯이, 인격과 인격 간의 상호연합 관계를 위해서는 이 관계의 기본 사양(仕樣)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사양을 규정하는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라는 대전제일 것이며, 그 인간들 사이의 관계 곧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바운더리 곧 인격의 경계선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인격과 인격을 이어주는 신뢰 곧 관계선의 문제라 하겠습니다. 전자가 [호상]관계의 필요조건이라면 후자는 충분조건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1)경계선: 소위 바운더리 이슈라고 하는 경계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함부로 침범하거나 유린하지 말아야 할 인격[의 존엄성]의 마지노선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환자나 장애우는 물론 재소자/재감자나 전쟁 포로들이라 할지라도 기본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를 만드신 주인(창조주)이 따로 있기에, 그분을 존중한다면 당연히 그에게 속한 피조물 역시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입니다. 심지어 내 인격의 바운더리가 침해받았을 때에도 상대방의 인격의 바운더리를 넘어가서 함부로 복수해서는 안 되며, 그를 창조한 주인에게 먼저 호소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사실 함부로 경계선을 넘나드는 사람과 진솔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은 법입니다. 한 두 번은 참아줄 수 있겠지만, 언제 또 다시 나를 침범해 올지 알 수 없기에 언제나 방어 자세를 취한 채로 그를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가능하다면 관계를 피하려 들 것입니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을 열어 보인다는 것은 의미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위험을 자초하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관계의 기본은 이런 인격의 바운더리에 대한 상호 존중이 우선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신도 귀하지만 상대방의 인격도 그에 못지않게 귀하고 소중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해]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관점을 내재화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배타적인 일대일 관계(예컨대 결혼과 같은)에 들어갈 경우 그야말로 빼박이 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무엇보다 이 기본 원칙을 무시한 결과로 야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관계선: [그러나] 관계란 이런 경계선을 건드리지 않는 소극적인 노력만으로 형성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피차간의 경계선을 존중하여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안전한 대상이라는 기본 신뢰가 확보되고 난 다음에는 인격과 인격 간을 연결하는 관계선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계선은 함께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나 이런 저런 모양으로 접하게 되는 지인들 사이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어느 한 쪽이든 관계를 유지할 의지가 없는 이상 그 선은 조만간 고사하거나, 기껏해야 명멸하는 점선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관계란 유기체이기에 마치 물을 주고 돌보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화분 속의 식물과 매한가지로 관계 역시도 돌보고 가꾸면 튼실하게 자라겠지만, 만일 가꾸지 않는다면, 어느새 기억/추억의 편린에 불과한 관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관계를 가꾸어 가는 노력 역시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선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피차의 경계선을 허물거나 함부로 유린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마지노선이라면, 반대로 피차의 경계선을 강화하고 북돋우어 줌으로서 관계를 튼튼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강한 사람은 사귀기 힘들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자신의 인격의 경계선[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인격의 경계선을 함부로 넘나들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자-인식은 인간관계의 전제 조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인격의 경계선을 세워주고 튼튼히 할 수 있을까요? 서로[의 자아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그의 존재를] 인정해 줌으로서 그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귀히 여기고 [존재 자체를] 고마워하고 칭찬(appreciate)해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의 인격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 예컨대 달란트나 특기할만한 생래적인 것들(given things)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2)반대로 그의 안에 없는 것 또는 부족한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 채워주고, 격려해 주고 돌봐줌으로써 관계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됩니다. 소위 보은(報恩)의 정서란 일종의 거울 효과(mirror image)와 같아서 은혜를 입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호상적이고 투명한 관계라면, 시은(施恩)과 보은의 관계는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반대로 보은은커녕 배은(背恩)하는 것이야말로 관계선을 한꺼번에 절단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인격선의 마지노선이 어떤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면, 관계선의 마지노선은 뭔가 크레딧을 더 쌓지는 못할지라도 그 간의 관계에서 쌓인 신뢰를 결단코 배반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각자의 경계선과 상호간의 관계선은 결국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계선을 강화하고 북돋우어 줄수록 관계선도 튼튼해 질 것이며, 관계선이 강화될수록 경계선이 허물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는 이런 것입니다. 피차가 경계선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으면서 관계선을 강화하는 관계, 달리 표현하자면 피차의 관계선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경계선을 강화해 주는 관계가 곧 진정한 간-인격적인 관계의 바른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상대방을 내게로 예속시키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관계, 또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의 어떠함 또는 상대방의 반응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상대방의 경계선을 지켜 주고, 관계선을 소중히 여기려 애쓰는 관계가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이 아가페적인 사랑은 일면 각자의 인격의 경계선이 확립되어서 안정한 정체감이 확보되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아가페적인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감으로서 각자의 인격적 경계선이 확립되고 안정한 정체감이 확보되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발달심리학자들이 정체감 확립 다음에 친밀감 형성의 단계/과제를 두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신비스러운" 작용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셈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불순한 동기나, 이해관계를 따져서 여차하면 경계선을 유린하거나 아니면 관계선을 끊고 '잠수 타는' 관계는 거짓된 사랑이며 안전하지 않은 관계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습니다. 짐짓 하는 체하거나, 시늉으로/무늬로만 하는 것으로는 경계선도 관계선도 강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것에 궁극적인 관심이 없었던 사랑이기에, 소기의 목적만 달성되면 경계선을 애써 지켜주거나 관계선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고 마는 진정성 없는 사랑으로 판명 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2.0 관계, 2.0 사랑이 모든 인간관계에서 호상적인 열매로 나타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 관계, 가족 관계, 형제 관계, 친구 관계, 동료 관계 등등으로 점점 더 이런 간-인격(inter-dependent) 호상-관계를 확대해 나가십시오. '뿌린 만큼 거둔다'는 원리는, 우리네 인간사가 운행되기 위한 보편적 기초 원리라 하겠습니다만, 특히나 그 어느 것보다도 부가가치가 높은 이 간-인격 관계에서 우선적으로 유념하고 적용해야 할 원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을 뿌리면 사랑의 알곡을 거두는 인생이 되겠지만, 거짓된 사랑을 뿌리면 쭉정이 사랑만 거두는 공허한 인생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서로 간의 인격적인 경계선을 지켜주기 위해 상호 존중하고, 나아가서 두 인격 사이의 관계선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의 연약함을 감싸주고 상호 긍휼을 베풀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남녀노소 그 누구하고도 2.0 관계의 블리스를 맛보고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음악가나 미술가로 부르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빚어내는 예술가(artist of love)의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핑계할 수 없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안에서 우리는 그 어떤 매뉴얼보다 더욱 밝고 환한 실물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성령께서 사랑의 열매가 충만히 맺히도록 노심초사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입니다!"(요일 4:7)

권영석  newsnjoy@newsnjoy.us

<저작권자 © M 뉴스앤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권영석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의견나누기(0개)
코드를 입력하세요!   
0 / 최대 3200바이트 (한글 1600자)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상세보기]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