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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조, 근본적 화해 (Radical Reconciliation) - (후)
지난 12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킹덤 컨퍼런스의 두 번째 설교자인, Colgate Rochester Crozer Divinity School에서 부교수로 신약성서를 가르치고 있는, 최진영 교수의 설교문이다. 최교수는 미국 성서학회(SBL)에서 인종적 소수학자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킹덤 컨퍼런스 최초의 여성 주제강사로 섬겼다. 본 설교문은 전체 설교의 후반부이다. (편집자 주)

 

4. 바울의 권위와 약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 한 바울은, 그 메시지에 부합한 삶과 사역의 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로서의 권위에 부합하지 않은 약함에 대해서도 자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그가, 고린도인들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편지는 그리스 로마의 수사학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의 언변은 매우 약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육체적인 면에서도 연약했고 외모도 볼품 없었다고 합니다. 영광과 기적이 아닌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메시지와 메신저 모두, 어떤 신자들에게 무능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바울의 낮아진 지위는, 다른 사도들과 비교될 때 더욱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두 번이나 자신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육신의 기준을 따라서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며, 자신도 육신의 혈통과 영적인 능력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고후 11:5; 12:11).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면, 사람들이 나의 인격을 고매하다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족하고 못난 사람인 줄 알지요. 반면에,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잘 포장하고 자랑하며 높이는 이들에게 모여들곤 합니다.

고린도교인들도 바울의 십자가의 복음과 그 복음을 반영하는, 즉 스스로를 낮추고 희생하는 모습을 도리어 무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도 약함을 감추고 사도의 권위로 고린도교인들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는 권위가 없는 줄 아느냐?”라고 반문합니다(고전 9; 고후 10:8; 13:10). 하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계시하셨고, 고린도교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도록 그를 택하셨습니다. 사도로서의 권위는 분명 주께 받은 것이나, 그는 그 권위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힘/능력/권위/강함/약함 등 파워에 관련된 단어들만큼이나 고린도전후서에서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덕을 세우는” (building up)는 것입니다. 제국의 중요한 도시들에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은,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그 마지막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너무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섬김의 본, 그리고 십자가의 연약함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는 심지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갈 6:17).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그리고 자신의 약함과 낮아짐을 통해 화해의 사역을 합니다(고후12:9-10). 그리고 고린도교인들에게도 소위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의 입장이 옳을지라도, 약한 자들을 늘 배려하고 우선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해의 사역이고, 또한 구원의 사역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요약하자면, 첫째, 하나님의 새창조는 모든 인간 사이의 경계와 장벽을 허무는 것이고 온 피조물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를 지키는 유대인이든 할례를 지키지 않는 이방인이든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지요. 그것은 바울에게 육신의 기준일 뿐입니다. 둘째,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그 아들 안에서 친히 죽으신 사건만이 세상의 모든 장벽을 허물고 하나 된 인류를 하나님께로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새창조는 시작되었으나 아직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종속되지 않았으므로 피조물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깨어지고 불의한 현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런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낮아짐과 약함을 통해 이방인을 섬기며,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가르침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지를 고민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살지만, 또 한편 힘의 논리가 여전히 지배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과 피를 지닌 우리가 물질적인, 제도적인 이 시대를 살아가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도래한 새 창조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나아가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화해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5. 새창조에서 화해의 실천

특권을 인식하고 내려놓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저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힘/능력/권위 등의 어휘를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말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그리스어는 “뒤나미스”입니다.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란 말의 어원도 이 단어와 관련있지요. 바울은 24절에서 다시금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집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하는 제국의 형틀에 달리신 그 예수, 그의 죽음이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가장 래니컬한 화해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과 화해하신 것은, 화해란 힘 있는 자가 강자의 위치에서 내려와 약한 자와 동등한 위치에 놓일 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화해의 사역은 힘의 문제, 불균형의 현실을 다룰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해의 사역은 정치적입니다.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로 고백되고 숭배되는 상황 속에서, 제국의 권력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무참히 처형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 제국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강자의 위치에 내려와 가장 약한 자의 위치에 내려오심으로 죽음의 동력을 사용해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자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고 구원의 문을 모든 이들에게 여신 것처럼, 화해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의 위치에서 가장 처참한 십자가 형틀의 죄인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화해는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어떤 특권을 가지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일이 먼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은 내려놓을 특권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많은 분들이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매일 매일 힘들게 살아갑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위 면에서 불안정한 것을 압니다. 미래가 불투명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침에 열린 패널에서 언급 된 것처럼, 많은 백인들은 자신들의 피부에 칼라를 가지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인됨” (whiteness)이 특권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특권입니다. 돈이 없으면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 속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지식을 가지고, 학위를 가지고, 자신의 파워를 좋은 방법으로든 좋지 않은 방법으로든 행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보다 문명화된 종교라는 서구의 문화적 신념 속에서 이슬람 등 타종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비해 기독교인들이 특권을 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젊다는 것, 건강하다는 것도 특권일 수도 있습니다.

특권과 파워를 소유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필요할 때 자신의 파워를 자랑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특권을 내려놓는 일은 현실적으로 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바울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처럼, 우리는 새로 지음 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원을 완성하시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또한 여전히 피조물이 신음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해의 사역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Me Too 운동

나는 화해의 영역에 있어서 이번 패널에서 또는 선택식 강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과연 성의 평등이 그리스도인의 화해에 있어서 이슈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최근 소셜미디어의 뉴스 피드를 한동안 휩쓸었던 운동이 있습니다. MeToo 운동입니다. 지난 10월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Harvey Weinstein)의 성추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죠.  웨인스타인 뿐 아니라, 트럼프, 그리고 최근엔 앨라배마 주대법원장까지 지냈던 상원의원  공화당 후보 로이 무어 (Roy Moore)에 이르기까지, 파워를 소유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하고 성희롱, 추행과 폭력을 행했는지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한 여배우가 여성들에게 “me too” 라는 말로 해시테그를 달며 자신이 당한 성희롱을 알리기 시작했습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도 성희롱과 성폭력을 경험했습니다”라고 공적인 공간에서 선언하는 운동이 번져나갔습니다. 내 소셜미디어 사이트에 저와 연결된 거의 모든 미국 여성들,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MeToo” 한 마디를 쓰는 이들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스러운 경험을 당했는지를 기술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포스팅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여성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제가 이런 요청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남성이나 파워를 가진 어떠 사람에 의해 성적으로 모욕적인 언사, 시선, 터치, 성적인 괴롭힘과 폭력을 당한 적이 있는 여성분들 (또는 남성들도) 손들어 보시지요.”

수없는 포스팅을 보면서 많은 여성들이 “아 나만이 아니었구나, 우리 모두는 함께 고통을 겪었구나” 알게 되고, 따라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사회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여성,” 이 그룹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세계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깨어진 인간성, 상처 입은 존엄성으로 고통 받아 왔고 오늘도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 운동이 지속되는 동안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저 “MeToo” 한마디만 쓰면 될 일이었습니다. 아니면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 사람들의 동참도 이끌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미국의 여성들에게도 “나도 성폭력의 희생자”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겠지만, 한국의 여성들에게는 더욱 힘든 일일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목회자의 성범죄의 예들은 이미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사례들이 있을 것입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여성 비하와 혐오적인 언사들을 교회 강단에서 듣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아무 의식 없이 여성에게 폭력적인 내용을 담은 성서 구절들을 설교하고, 거룩한 말로 여성을 대상화하며 여성을 희롱할 때, 이러한 행동들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회에서의 여성 차별과 혐오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교회 안에서 여성의 침묵을 강요하고 정당화하는 메시지들이 여전히 선포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Me too”라고 공적으로 또는 마음으로 부르짖는데, 우리는 화해라는 신앙의 주제를 다루며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입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받으며 고백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차별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라는 새 창조의 비전을 2000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와 교회 속에서 차별과 희롱, 혐오, 폭력을 경험하는 현실 속에 어떻게 실현할 것입니까?  왜 미국에서는 Me too 운동이 가능한데 한국 커뮤니티 안에서는 더 어려울까요?

만약에 남성됨을 특권으로 인식한다면 남성들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어떤 남성들은 “I believe you,” 나는 당신을 믿는다는 말로 나는 당신의 편이라는 말을 대신하였습니다. 보통 여성이 폭력의 경험을 이야기 할 때 사회는 그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네가 스스로를 보호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느슨하기 때문이다, 네게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더 상처를 가하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믿는다, 네가 말한 내용을 믿는다, 너는 그 폭력을 경험하지 않아도 됐다, 미안하다, 용서를 구한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나 자신부터 노력하겠다, 그런 사회를 만들도록 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화해와 회복의 몸짓입니다. 물론 이것은 시작의 시작에 불과할 뿐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고, 그것도 그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을 고려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는 화해의 영역에 있어서 젠더를 특별히 언급했습니다. 이제 피조물이 여전히 신음하는 이 세계 속에서 모든 사람이, 모든 피조물이 포함되고 회복되는 새 창조의 비전을 어떻게 사회 곳곳에서 실현해 나가야겠습니까?

먼저, 나의 꿈을 새창조의 비전 아래 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의 그 꿈을 이루어드려야 되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좀더 높은 지위와 경제적인 안정을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꿈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꿈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창조의 비전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의 지위와 힘을 향한 욕구를 모든 이를 품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비전 아래 둘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약자의 편에 서십시오, 고통 받는 자들과 연대하십시오 라는 부탁을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느 만큼의 힘과 특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그 권리를 가지지 않은 사람, 또는 박탈당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억압받고 소외된 자와 약자의 편에 서고 함께 하는 것, 사실 이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입니다. 화해란 타인과 위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화해란 자선도 아니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거짓된 평안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정말 화해하기 원한다면, 화해의 과정에서 힘과 기득권을 내려놓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원하는 방향과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불의를 바로 잡는 것, 그리고 그 뒤에 용서가 필요하고, 용서는 위로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과의 사이에서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방문도 하고 편지도 수차례 보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은 먹혀들지 않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바울은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해와 불신과 적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고린도교인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바울은 교회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치리하고 문제도 해결되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잘못한 이들을 벌주고, 용서하고, 위로했습니다(고후 2:6-7). 고린도후서에만 “위로하다”라는 말이 15번 나타납니다.

진정한 화해는 정의를 세우고, 용서하고, 위로에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우리와의 화해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되,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의 짐에 눌려 있던 우리에게 위로로 넘치게 하시는 데까지 이릅니다. 

우리는 소수 인종으로 미국 사회에 살면서 좌절과 분노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의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되, 지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직 새창조의 실현이 되지 않아 좌절과 슬픔 가운데 있는 서로를 위로하는 사역, 용서를 선언하는 사역도 중요합니다. 저는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 가해자에게 적용되는 용서와 위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사역을 하며 정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지친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화해자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에게 이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3-4 ).

참고서적

N. T. Wright, Paul: In Fresh Perspectiv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Neil Elliott, Liberating Paul: The Justice of God & the Politics of the Apostle, Fortress Press, 1994

Allan Aubrey Boesak & Curtiss Paul DeYoung, Radical Reconciliation: Beyond Political Pietism and Christian Quietism, Orbis, 2012

최진영 교수  newsnjoy@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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