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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조, 근본적 화해 (Radical Reconciliation) - (전)킹덤 컨퍼런스 2017 설교문
지난 12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킹덤 컨퍼런스의 두 번째 설교자인, Colgate Rochester Crozer Divinity School에서 부교수로 신약성서를 가르치고 있는, 최진영 교수의 설교문이다. 최교수는 미국 성서학회(SBL)에서 인종적 소수학자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킹덤 컨퍼런스 최초의 여성 주제강사로 섬겼다. 본 설교문은 전체 설교의 절반에 해당하는 앞부분이며 뒷부분도 따로 게재할 계획이다. (편집자 주)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특징이 있다면,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이산자들, 즉 자신의 어머니 나라로부터 흩어져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이릅니다. 디아스포라로서 사는 사람들은 정체성에 대한 공통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이면서도 또한 미국 지배 문화에 잘 순응하여 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경험을 한국에도 미국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다른 어떤 이들은 한국도 미국도 아닌 그 틈새, 또는 제삼의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우리 부모님 세대, 즉 일세대 이민자들은 소위 어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이 미국 땅에 발을 딛었습니다. 자신의 자녀들이 한국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타국에서의 낯설고 고단한 삶을 마지 않으셨던 것이죠. 젊은 세대의 사람들은 좁은 한국 땅에서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계속하기보다는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꿈을 안고 미국에 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늘 바울의 십자가의 화해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바울 역시도 우리와 같은 디아스포라였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한 뒤 일부의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시작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이어지는 제국들과의 종속 관계 속에서 계속됩니다. 바울은 오늘날 터키에 있는 다소 (Tarsus) 출신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조상의 땅을 떠나 살던 이산자로서 로마의 코스모폴리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이었던 것이죠. 마치 오늘 우리가 한국말을 하고 한국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 또는 Kroean American이면서, 미국 사회와 문화에 속해 영어로 소통하는 것처럼요.

 

1. 바울의 십자가의 복음

열렬한 바리새인 바울

바울은 로마의 정치적 지배 아래 있는 식민지에서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지만, 그저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바울은 예수의 죽음 이후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유대인 가운데서도 열렬한 바리새인으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성서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신 21:22-23). 나아가 로마의 정치범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의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최초의 예수 추종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바울은 유대교에 대한 열심에 따라 이들을 극심하게 핍박한 것입니다(갈 1:13). 로마의 눈에,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반역자로 처형당한 메시야를 따르는 위험한 사람들로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 이후 일어난 예수 운동으로 인해 유대인 공동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했을지 모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계시

그런데 이러한 열렬한 유대인 바울의 삶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하신 사건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이 경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갈 1:15-16).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바울의 “회심”이란 말로 표현해왔습니다. 바울이 유대교라는 종교에서 기독교라는 또 다른 종교로 회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바울은 이전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믿고 섬겼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경험한 후에도 그가 믿은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의식과 삶에 어떤 급격한 변화가 생긴 것일까요?

바울의 종말에 대한 비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성서의 예언 전통을 확고히 믿었습니다. 그 전통에서 가장 대표적인 내용은 종말에 대한 것인데,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모여 그분을 예배할 것이라는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선택과 총애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율법의 계명을 따름으로 응답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계약 백성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한가지는, 이방인이 유대인이 됨으로, 즉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계약 공동체에 속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지막 날에 “모든 나라”가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모든 사람들이 유대민족에 편입되어 그 한 나라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열어주기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유지하는 길이었다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 공동체이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던 구원이 이제는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들에게 확장될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받은 계시와 사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메섹 도상 이전의 바울에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권세와 인간의 권세들을 심판하시고 모든 나라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경배를 받으실 그 역사의 마지막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종말의 비전을 완성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남으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나라를 포함하는 구원의 날을 앞당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열린 새로운 구원의 시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민족과 나라를 포함하는 예배 공동체,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새 창조입니다. 만물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구원 계획은 바울에게 개인 실존과, 사물과, 모든 관계들을 보는 렌즈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로마권력에 의한 폭력적 처형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반역자들과 식민지의 백성을 통제하기 위한 가시적 수단으로 십자가 처형이라는 가장 비참한 형태의 사형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온 세상을 구원하는 데 있어, 모든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에게 십자가라는 정치적 형벌을 지우셨을까요? 결국 하나님은 모든 세상의 권력을 심판하실 텐데, 왜 예수를 그 권력에 의해 희생시키심으로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신 것일까요? 그저 로마의 통치 아래 모든 민족을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모으시면 될 것을, 왜 십자가의 복음이 민족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통해 종말의 계획을 실현하려 하신 것일까요?

통치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파워를 행사하기 위해, 형벌과 처형이라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동력을 사용하여 피지배자들을 통제하고 다스립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강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가령 억압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심으로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소유하신 무소불위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 권력과 폭력의 희생자로서 삼으심으로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통해, 세상을 그분께로 화해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화해는 강자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강자의 위치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 화해라는 것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지위나 파워를 가진 사람이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억누르고 착취할 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도록 압박하면서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화해가 아닙니다. 백인들이 백인우월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인종간의 화해가 일어나기를 바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해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해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힘 있는 자가 힘을 내려놓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게 하셨다는 오늘 본문 말씀 (고후 5:18-19) 전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급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는 그분의 강자의 위치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셨습니다. 죽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빌립보서 2:6-8에서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죄를 모르는 이를 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고후 5:21).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화해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회복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의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씀과 18절의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말씀 사이에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17).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모든 피조물이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신자들은 “화해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2. 새창조의 비전: “차별이 없다.”

할례 또는 무할례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이방인들 가운데 이 복음이 전해지면서, 지역과 인종과 계층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그리스도의 공동체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모두를 포함하는 공동체였지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든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비전과 경험을 세례 받을 때의 고백에서 표현합니다. 이 내용이 갈라디아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열었는데, 이 새로운 창조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인간관계와 제도에 존재하는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인종과 계층과 성별 간에 존재하던 구별과 차별이 사라졌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비로운 체험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경험하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교회에서 이러한 인종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도, 이방인의 입장에서도 실제적으로 어려운 이슈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장 최초의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지요. 이 첫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구약성서에서 예언한 메시야, 즉 그리스도임을 믿고 따르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예수를 따르겠노라고 고백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계약 백성인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해 표시되었기에,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에서 이 질문은 핵심 사안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방 지역으로 뻗어나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할례도 요구해야 하는가? 바울의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그는 할례 없는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듭 주장합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 하다고 선언합니다(갈 6:15). 즉 할례받음 없이도 이방인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창조의 현실인 것입니다.

제국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런데 할례를 면제 받더라도,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될 때 여전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의 토착 종교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스-로마의 신들과 무엇보다 황제를 숭앙하는 예배를 병행한다면, 자신의 종족의 신을 함께 예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경우가 달랐지요. 로마는 예외적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에 참여하지 않아 박해와 순교를 당한 것은 훨씬 더 이후의 일입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살생을 율법으로 금지하는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었으며, 안식일에는 일터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헌금을 걷어 그들의 모교회인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것도 허용했습니다. 이러한 예외적 특권들로 인해 제국 전역에서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의 혐오와 적개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의 원칙을 따라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유대인의 특권은 포기하면서, 로마제국 내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수 종교인이 되는 것이죠. 예컨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황제 숭배 예식에서 면제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생각해보십시오. 로마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받은 유대인 메시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유대인” 메시야, 예수를 믿음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로부터 소외를 당했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지위의 역전 또는 하강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3. 고린도교회에서 힘과 특권의 딜레마

고린도 교회에서 지위와 힘에 대한 인식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조금더 특별했습니다. 로마는 지중해 곳곳의 도시들을 식민화 하고 퇴역한 군인들과 해방된 노예들을 이주시켰는데, 고린도도 그러한 도시들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는 좁고 길쭉한 지형의 양쪽에 항구를 만들고 양 쪽을 도로로 이었습니다. 즉 한 쪽 항구에서 내린 선원과 화물은 육로를 통해 다른 쪽 항구의 배로 옮겨질 수가 있었습니다. 아니면 아가야 지방을 주욱 돌며 지중해를 항해해야 했겠죠. 이로 인해 고린도는 무역과 상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기회와 성공과 부를 추구하던 새로운 인구가 계속 유입되었습니다. 

신분의 상승은 시민들에게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황제의 친애를 받아 지위를 상승하고자 하는 큰 도시들끼리 가운데도 치열하게 이루어졌지요. 그렇다면 고린도와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지위를 중요시하는 그들에게, 스스로 낮아져서 종의 모습을 취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예수가 사람들과 같이 낮아져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해를 이루었다는 개념은, 높아지고 강해지는 것에 가치를 둔 고린도교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바울 교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 노예들,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대부분 도시의 하층민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이 열리는 영적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종이나 자유인, 여자와 남자가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는 새창조의 세계를 경험한 것이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누리는 이 하나됨과 평화는, 로마가 가져온 일치와 평화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실을 재빠르게 통과하고 부활한 실존들로서 살아가고자 한 데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구원 받았고 그의 부활로 시작된 새 시대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과 예언, 치유 등의 은사가 구원의 새 시대가 왔음을 증거했습니다. 은사를 경험한 이들은 영적 권위를 가졌고, 바울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메시지는 어리석게 여져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시작부터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2:2). 바울은 분명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편지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만 강조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히 화해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도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외적, 내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인종, 계층, 성의 문제와 함께, 그룹 간 힘의 논리가 여전히 지배하는 교회 공동체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강함)와 실제적인 약함의 문제를 가지고 교인들과 씨름합니다.

여성들은 잠잠하라?

이러한 상황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여성이 잠잠할 것을 말하는 배경입니다. 다음의 구절은 오늘날 교회에서 여성들에게 안수를 주지 않고 리더십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성경적 근거의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고전 14:34-35).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장소에서 모이고 예배한 후 흩어지면 다시 가정으로, 일터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때로 가부장이 회심하면 식솔들 전체가 교회의 새 구성원이 되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교회 안과 밖, 그리고 옛시대와 새창조로 인해 도래한 새시대의 격차를 더욱 심하게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전에 속했던 질서를 무시하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지요. 예를 들어, 어떤 여성들은 약혼을 파기하거나, 남편과 각방을 쓰거나 별거하며 기도에 열중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하고, 방언과 예언을 하고, 가르치고, 리더십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의 질서를 거슬러가는 현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의 리더십에 대한 문제가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 어려움을 주었던 탓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3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세례에서 언급된 관계들 중 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가 로마 세계 속에 뿌리내리는 데 있어서 모든 질서를 부정하고 거부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세상 끝까지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계약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제국과 지배적인 사회에 격렬하게 저항함으로 미션을 이루지 못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점에서 타협을 합니다. 남자가 주도하는 가부장질서를 아주 벗어날 수 없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노예제를 아주 폐기할 수는 없지만, 주인은 노예를 형제로 대접해야 했습니다. 로마의 권력은 사탄의 세력 아래 있지만, 정부에 복종하고 납세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어떤 한 부분을 떼어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어떠한 역사적, 문화적, 공동체적 맥락 속에서 그 구절이 쓰여졌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그 구절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완성된 그 나라에 이미 발을 들여선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옛 시대의 질서 속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구별과 차별이 없어지는 하나님의 새창조의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했으나, 모든 권세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인간과 영적인 힘의 관계를 다루어야 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 파워를 잘못 사용할 때 다른 인간들과 피조물들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피조물의 탄식함과 화해의 사역

이것이 바로 기억해야 할 점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시대가 열렸는데 아직 피조물들이 아직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전적으로 해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22-23).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이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바울은, 지금 피조물 전체가 다 탄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설은 개인 실존 차원에서도 경험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롬 7:22-23). 우리는 이제 왜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 화해시키셨다고 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후 5:20).

새창조의 시대가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온 피조물과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탄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시는 시대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을 사용하시지만, 그 권력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와 권력을 제압하시고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여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성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 속에서 화해의 복음에 대해 말하면서 고린도교인들에게 구체적인 권면과 모델을 제시합니다. 

최진영 교수  newsnjoy@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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