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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으신 하나님’(4) - “나의 후미에”

요한복음 21:15-19

1.

<침묵>의 등장 인물 중에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기치지로입니다. 로드리고와 가루페 신부가 마카오에서 찾아낸 일본인입니다. 당시 그는 알콜 중독으로 인해 폐인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나약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의심과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지만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기치지로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그들의 길잡이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후, 두 신부는 한 편으로 기치지로를 의지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의심하면서 잠행을 시작합니다. 기치지로는 나가사키의 도모기 마을의 지하 교인들과 두 신부를 연결해 주면서 서서히 신뢰를 얻어갑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암호를 통해 비밀리에 소통하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 신부의 방문을 열렬하게 반깁니다. 그 상황에서 기치지로는 영웅처럼 행세합니다.

 

얼마 지난 후, 기치지로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고해를 하면서 과거를 고백합니다. 그는 8년 전에 배교했었습니다. 형과 누이는 후미에 즉 성화 밟기를 거부했지만 기치지로는 겁에 질려 성화를 밟습니다. 그로 인해 형과 누이는 투옥되었고, 기치지로는 그 날로 마을에서 사라졌습니다. 나중에 형과 누이가 화형에 처해지던 날 기치지로는 그곳을 찾아갔다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지독한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방황하다가 마침내 마카오까지 간 것입니다.

한 동안 두 신부는 마을 사람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마을에 관리들이 들이닥칩니다. 그 마을에 믿는 이들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간 것입니다.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자 관리들은 세 사람을 인질로 뽑으라고 말합니다. 마을 사람 전체에 대한 본보기로 세 사람에게 고문을 가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장로 역할을 하던 모키치와 또 다른 신도 이치소우가 나섭니다. 그리고 기치지로가 등 떠밀려 인질이 됩니다.

그 일로 인해 모키치와 이치소우는 바다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장렬하게 순교 당합니다. 반면, 기치지로는 또 다시 배교하고 살아남습니다. 살아남은 그는 수치심에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두 신부는 같이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갈라져서 각기 다른 지역으로 피신합니다. 로드리고는 피신한 곳에서 기치지로를 다시 만납니다. 기치지로가 숨어서 보고 있다가 로드리고를 따라 온 것입니다. 그 때 로드리고는 기치지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지켜보며 가룟 유다에 대한 주님의 감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는 한 편으로는 경멸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연민을 가지고 기치지로를 대합니다. 기치지로는 장렬하게 순교 당한 모키치와 이치소우를 생각하며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키치는 강해요. 논에 심은 강한 모종처럼 강하지요. 하지만 약한 모종은 아무리 비료를 주어도 자라지 못하고 나쁜 열매조차 맺지 못하지요. 저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약한 자는 말입니다. 신부님, 저는 이 약한 모종과 같은 자입니다." (121-22쪽)

이 때 로드리고는 심신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치지로에 대한 경멸의 감정은 점점 약해지고 연민의 감정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그는 선교 본부에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씁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강한 자와 약한 자, 성자와 평범한 인간, 영웅과 용렬한 자. 그래서 강한 자는 이와 같이 박해받는 시대에도 신앙 때문에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약자는 이 기치지로처럼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 인간이냐?’만약 사제라는 자존심이나 의무감이 없다면 저 또한 기치지로와 똑같이 성화를 밟았을지도 모릅니다. (122-23쪽)

그렇게 생각하며 로드리고는 기치지로의 죄를 사해줍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들이 들이닥칩니다. 기치지로가 당국에 밀고한 것입니다. 참으로 비열하고 비겁한 인간입니다. 로드리고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환멸감을 맛봅니다.

 

2.

체포된 신부는 그 이후로 박해자 이노우에와 그의 통역관으로부터 집요한 회유와 세뇌와 협박을 받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목표는 신부가 배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제의 배교는 일반 신도들의 믿음의 의기를 단번에 꺾어 버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 감옥으로 기치지로가 또 찾아옵니다. 신부를 만나기 위해 자수하고 감옥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는 신부에게 고백을 들어 달라고 청합니다. 기치지로는 이미 여러 번 배교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당국에 밀고하여 잡히게 한 것도 그 사람입니다. 정말 대면하고 싶지 않지만 사제로서의 의무감에 그는 마지못해 고백을 들어 줍니다. 그 때 기치지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성화를 밟았습니다. 네, 밟고말고요. 모키치나 이치소우는 강하지요.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한 걸 어쩝니까?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177쪽)

그 고백에 신부는 마지못해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해 줍니다만, 며칠 되지도 않아서 또 다시 후미에를 밟습니다. 그렇게 사라졌다가는 얼마 지나 신부의 감옥으로 찾아와 용서를 구합니다. 책을 읽는 독자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이 지점에서 치를 떨며 그를 혐오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는 이야기 속에서 잠시 사라집니다.

그가 다시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것은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엔도는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소설의 마지막에 ‘기리시단 주재원 관리인의 일기’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 부분이 영어 번역본에는 ‘appendix’로 처리 되어 있는데, 우리 말 번역본에는 빠져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엔도는 이 부분을 소설의 결론으로 삼아 공들여 썼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최근에 김승철 교수가 이 부분을 우리말로 번역해 주었습니다(<침묵의 소리>, 40-63쪽,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 232-48쪽). 영화를 보면 스콜세지 감독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일기에 보면, 배교자가 된 이후로 신부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때 기치지로가 신부에게 다시 찾아왔고, 오카타 산에몬이라는 이름의 신부는 하인으로 그를 받아줍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기치지로는 신부에게 자신의 죄 고백을 들어 달라고 청합니다. 배교한 사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신부가 비록 배교했지만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산에몬은 자신은 더 이상 사제가 아니라고 사양합니다만 결국 그의 청을 들어 줍니다.

거듭 고해를 들어 주었지만 거듭 배교했던 그를 위해 신부는 또 한 번 용서를 빌어 줍니다. 신부는 자신도 배교한 상태이기에 누구를 정죄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포자기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사실이 밝혀집니다. 매년 초에 정기적으로 행하는 배교 의식을 하던 중에 그의 품에 숨겨져 있던 성화가 발견되었습니다. 관리들은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취조를 합니다. 전 같았으면 겁에 질려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 내어 살아남기를 꾀했던 기치지로가 이번에는 달리 행동합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순교의 자리로 끌려갑니다.

기치지로는 비열함과 비겁함과 연약함의 극한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엔도는 이러한 인물 설정을 통해 독자에게 충격을 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치를 떨며 그를 경멸합니다. 그러다가는 로드리고 신부처럼 독자들도 자기 자신 안에도 기치지로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때, 기치지로는 마침내 진정한 회심에 이르고 또한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자신 안에서 기치지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려워 떨었던 독자는 이 지점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기치지로 같은 사람이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면 독자들은 더욱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콜세지 감독은 이 변화 과정을 영상으로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제 잠시 영상을 보실텐데요. 첫 장면은 기치지로가 로드리고의 감옥까지 찾아와 고백하는 장면이고, 두 번째 장면은 마지막 고백 장면 그리고 세 번째는 그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버러지 같고 짐승 같던 기치지로가 회심을 통하여 성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3.

로드리고는 기치지로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가룟 유다를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빵을 떼어 주면서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요 13:27) 하고 말씀하십니다. 로드리고는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헤아려 봅니다. 노여움과 증오심으로 하신 말씀일까? 주님께서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 했다면 그렇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주님은 왜 유다의 배반을 막지 않고 그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로드리고는 나중에서야 기치지로를 통해 가룟 유다에 대한 연민이 그 말씀 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습니다. 신부는 기치지로를 위해 기도해 주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또 다시 배교할 것을 예감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경멸스러웠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연민의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인데 어찌하겠습니까? 신부는 주님께서도 유다를 보고 같은 심정을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어찌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의 배신을 아시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제서야 신부는 후미에 앞에 섰을 주님께서 밟으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아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왔던 가루페 신부는 천성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아셨기에 주님께서는 로드리고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엔도는 로드리고와 기치지로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며 인내하며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기치지로나 로드리고의 배교를 비난할 것입니다. 실제로 엔도의 작품을 그렇게 평하면서 절대로 읽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스스로의 내면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기치지로와 로드리고에 더 가깝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배교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하나님을 등질 수 없는, 그래서 그 자리로 또 다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그러나 또 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엔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신앙이 얕았기 때문에 배교하였다고 비난한다면, 비록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다. 우선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없다. 얕은 것은 배교한 사람의 신앙이 아니라, 그들 배교자들을 비판하는 사람 자신의 애정이다. 그리고 애정이 얕은 사람의 신앙이란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은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도 없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그저 빤히 쳐다 볼 뿐이다. (<침묵의 소리>, 81쪽)

동시에 엔도는, 연약한 인간이라도 그렇게 흔들리며 넘어지면서 강해져 간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기치지로의 태도는 마치 “나는 이렇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장터에서 사용하는 말로 하면 “그래, 나 이런 사람이다. 어쩔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사람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마지막 회심 전까지 기치지로의 신앙은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뻔뻔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그는 아파했습니다. 후미에를 밟은 발에서 아픔을 느꼈습니다. 연약하기에 배교했고, 연약하기에 그 배교로 인해 더 아파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두고 아파했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렇기에 넘어질 때마다 그의 믿음은 조금씩 강해졌습니다.

 

4.

로드리고가 후미에를 밟는 대목에서 엔도는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267쪽)

영화에서도 희미하지만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베드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엔도는 성경의 인물 중에 베드로에게 특별히 마음이 끌렸다고 말합니다. 그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뱃사람 다운 강인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강한 남자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이 연약한 내면을 감추려는 노력이었음을 아셨습니다.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주님과 베드로가 나눈 대화에서 그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당신에게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고 알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 올 수 있을 것이다. (요 13:36)

“내가 가는 곳”이란 십자가에서 죽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베드로의 믿음으로는 순교의 길을 따라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37절)

베드로는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럴 자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내면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8절)

이 말씀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사실을 제가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몇 시간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 당할 때 베드로는 강함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칼을 빼어들고 성전 경비병 중 한 사람의 귀를 내려 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고 타이르고는 순순히 결박 당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어둠 속으로 도망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던 베드로는 금세 제 정신을 찾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는 잃었던 용기를 다시 끌어 모읍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연줄이 있던 요한을 데리고 재판받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멀리서 재판을 지켜 보면서 그는 자신의 강함을 드러낼 기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 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태연한 척 불을 쬐면서 지켜 봅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도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지요?”(요 18:25) 그 질문에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나는 아니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가야바의 종이 “당신이 동산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아니라고 잡아 떼기요?” 하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면서 자신은 예수와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

그 때 멀리서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바깥으로 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슬피 울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송구러움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김승철 교수 (사진 출처: 크리스찬 투데이)
 

 

5.

오늘 읽은 말씀은 그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 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는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합니다. 베드로는 어느 곳엔 가에 숨어서 이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주님의 죽음의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뼈아픈 자책을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에 희망을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겠지요.

그런데 사흘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와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했던 무덤에 찾아갔더니 비어 있더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곳을 찾아갑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 그대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은신처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분의 시신을 훔쳐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겠지요.

얼마 후,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은신처에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에 난 상처 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생전에 말한 대로 당신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었던 의인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런 일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리라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옛 친구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호수로 나갑니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는 육체노동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빈 그물만 내렸다 올렸다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물을 정리하고 돌아가려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다가 옵니다. 그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려 보라고 합니다.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요한은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베드로는 즉시로 바다에 뛰어 내려 주님께 달려갑니다. 주님께서는 해변가에 아침 식사를 차려 놓고 제자들을 초청하십니다. 식사가 끝날 즈음에 주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십니다.

아마도 아무 말 없이 바닷가를 한 참 걸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뒤따라가면서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가야바의 법정에서 비겁하게 그리고 참담하게 무너졌던 자신을 책망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한 참을 말없이 가시더니 주님께서 멈추어 서신 다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

이 질문은 원문을 보아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담아서 번역하면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가 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결코 깨어지지 않는 강한 사랑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15절)

우리 말 번역만 보면 Yes라고 대답한 것 같습니다만, 원문의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필레오는 형제간의 우애 혹은 친구간의 우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깨어지기 쉬운 인간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 자신은 자신의 연약함을 부인하고 싶었지만 지난 몇 주일 동안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내면을 훤히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서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가야바 법정에서 심하게 깨어졌기에 베드로는 이제 자신의 연약함을 선선히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른 말없이 “내 어린 양떼를 먹이라”고만 답하십니다.

그리고는 또 아무 말 없이 한 참 걸어가십니다. 얼마를 걸으시더니 또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베드로는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똑같이 대답합니다. 이번에도 “내 양떼를 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또 한 참 걸어가십니다. 그러더니 세 번째로 물으십니다. 아마도 이번에는 베드로의 눈동자를 쳐다보시면서 말씀하셨을지 모릅니다. 원문을 보면,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라고 질문을 바꾸십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시면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네가 사랑의 시험에 거듭 넘어지고 실패한 것을 내가 안다. 너의 사랑이 아직 내가 가르친 아가페의 사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내가 안다. 그것을 인정하니 이젠 되었다. 그렇다면 이젠 그 사랑으로 시작하거라. 깨어지기 쉬운 사랑일망정 그 사랑으로 나를 계속 사랑하거라. 그 사랑으로 나를 따르거라. 그 사랑 안에서 자라서 네가 내 가는 길을 따라 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깊은 대화와 만남을 통해 베드로는 회복됩니다. 그 회복은 얼마 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더 온전해집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이 언제든 깨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사도로서의 소명을 따라 삽니다. 그 이후로도 그는 크게 혹은 작게 넘어집니다. 그의 천성에 배어 있는 연약함이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는 그 때마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아파했고 주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예수님이 예언한 것처럼 순교자로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오늘 말씀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21:18)

이렇게 적어 놓고 요한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영광을 돌린 것인가를 암시한 것이다”(21:19)라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교회 전통에 의하면, 이 예언 그대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 당했습니다. 비겁하고 연약했던 베드로는 기치지로처럼 거듭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강해진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루페 신부처럼 혹은 모키치나 이치소우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믿음을 지킬 정도로 강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그 정도의 강한 믿음에 이르고 싶습니다만, 누구나 그런 담력과 믿음과 용기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대다수는 로드리고처럼 혹은 기치지로처럼 떨리는 발로 후미에를 밟을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어떻게든 후미에를 밟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손해볼 것 같아서, 때로는 무시당할 것 같아서, 때로는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것 같아서 살짝 살짝 후미에를 밟습니다. 병든 마음 때문에 혹은 유혹에 끌려 밟기도 합니다. 양심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요청하는 일들을 못 들은 척 외면합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를 이끄실 때 우리는 거부합니다. 마음으로, 입술로 그리고 행동으로 후미에를 밟고 또 밟습니다. 그리고는 기도의 자리에 앉으면 넉살 좋게도 혹은 뻔뻔하게도 죄송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다시 기회를 달라고 구합니다. 때로는 그러는 자신이 협오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애석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무시하고 강한 척 하다가는 베드로처럼 무참하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다시 일어나 회복되면 좋지만, 가룟 유다처럼 무너진 상태에 영영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죄에 뻔뻔한 사람이 됩니다. 그 연약함을 아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실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베드로에게서 보는 것처럼 그리고 기치지로에게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파하시며 우리를 고쳐 가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 4:15-16)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죄에 유혹에 끌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꿈꾸고 있을 때 부드러운 손길로 막으시지만 끝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을 때면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고 내버려 두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 넘어짐과 깨어짐으로 인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다시 주님께 도움을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연약함으로 넘어질 때마다 그 연약함에 비통해 하며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은혜를 구하십시다. 때로는 뻔뻔한 것 같고 때로는 염치없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그렇게 그분의 손에 맡기고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빚어 나가십니다. 기치지로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처럼, 베드로가 마침내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간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아멘.

 

2017년 11월 5일 주일 설교 

김승철 교수 (사진 출처: 크리스찬 투데이)
 

김영봉 목사  bong3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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