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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으신 하나님’(3) - “틈새로 보는 하나님“김영봉 목사 '침묵' 연속 설교 3번째

 

시편 10:1-18

 

1.

엔도 슈사쿠는 40세쯤 되었을 때 폐병에 걸려 2년 동안 요양원에서 지냈습니다. 병에서 회복되면서 그는 나가사키로 내려가 3백여 년 전에 있었던 기독교 박해와 순교의 자취를 찾아 나섭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대개 끝까지 절개를 꺽지 않은 믿음의 영웅들을 주목합니다. 하지만 엔도의 관심은 믿음을 버리고 배교한 사람들에게 끌렸습니다. 그들이 어떤 과정으로 배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배교한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인물이 크리스도반 페레이라 신부와 주제페 키아라 신부였습니다. 소설에서 엔도는 페레이라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고, 주제페 키아라는 로드리고로 이름을 바꿉니다. 소설의 뼈대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따 왔지만, 나머지는 엔도의 문학적 상상력으로 만든 이야기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초라하고 비겁하게 배교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던 이유에 대해 엔도는, 배교한 신부들 그리고 배교한 신자들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믿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자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배교하고 나서 마음 가득 가책을 안고 살아갔던 ‘가꾸레 기리스단’ 즉 믿음을 숨기고 사는 신자가 되었을 것만 같았습니다.

엔도는 이 소설의 제목으로 <양지의 냄새>를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습하고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던 로드리고가 나무살 사이에 코를 내밀고 킁킁 거리며 따사로운 햇볕의 냄새를 찾는 모습을 생각하고 지은 제목입니다. 이 제목을 통해 그는 배교자들의 깊은 갈망을 표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자신의 거짓된 삶의 방식에 대한 후회와 어두운 회한과 굴욕을 간직하며”(<침묵의 소리>, 167쪽) 살았습니다. 그들의 내면과 삶의 상황은 어둡고 습한 음지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따사로운 사랑이 비치는 양지로 나가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문틈으로 코를 내밀고 양지의 냄새라도 맡고 싶은 것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침묵>으로 결정된 것은 출판사 편집부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양지의 냄새>라는 제목이 너무 은유적이고 무난하여 독자의 주목을 끌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서 출판사는 좀 더 자극적인 제목이 필요했습니다. 출판사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든 믿지 않는 사람에게든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주제는 항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침묵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로드리고 일행을 모로코에서 일본까지 안내한 사람이 기치지로입니다. 그는 온 가족이 순교 당할 때 배교한 사람입니다. 그가 도모기 마을에서 로드리고에게 배교의 죄를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86쪽)

그로부터 얼마 후에 모키치와 이치소우가 바닷가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합니다. 로드리고와 가루페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봅니다. 그 때에도 로드리고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몸부림칩니다. 그 대목에서 로드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비애에 빠진 인간들의 소리에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만 침묵하고 계시는 듯한 그런 느낌을……”(95쪽)

배교하기 얼마 전, 그는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집니다. 그가 배교하지 않으면 같이 투옥된 신도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배교한, 존경했던 스승 페레이라가 그를 찾아와 설득합니다. 당신이 배교자라는 치욕을 덮어 쓰는 것으로 여러 사람이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이라고. 그 때 로드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만해 주시오. 중지해 주시오. 주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침묵을 깨 버리셔야 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올바름이며 선이며 사랑의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함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말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261-262쪽)

이렇듯 간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2.

인간의 악이 번성하고 그로 인해 약한 사람들이 아픔을 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인간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인간을 ‘부드러운 손’으로 다스리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면 그분의 존재가 보이고 그분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혹은 “볼 눈이 있는 자는 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타락한 욕망을 따라 마음을 무디게 하고 자신의 음성을 높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은 인간의 완력 앞에 쉽게 무시되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은 인간의 고성에 묻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강력한 손길로 인간의 악을 막을 수도 있고 부인할 수 없는 음성으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강력한 손길과 분명한 음성으로 우리를 챙기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스베가스 총격 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의 하나님이라면 왜 스테펜 패덕의 계획을 미리 막지 않은 겁니까? 왜 그 사람의 악행을 그냥 두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게 하는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렇게 묻는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곰곰이 따져 보면 맞지 않는 질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스테펜 패덕에게 그렇게 하셔야 했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악독한 사람만 골라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능의 능력으로 인간사에 사사건건 개입해야 한다면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편이 좋겠습니까? 좋지 않은 생각을 할 때마다 “너, 무슨 생각하는 거냐?”라는 질책의 음성이 귀에 쩌렁쩌렁 들린다면? 그런 음성이 들리는데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 할 때마다 갑자기 손이 꺾어진다든가 다리에 힘이 빠진다면? 그런 일이 하루에도 수 없이 일어날 터인데, 그러면 여러분은 좋겠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양심을 통해 세미한 음성으로 속삭이십니다. 또한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의 길을 막기도 하시고 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손길이 부드럽고 그 음성이 미세하여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권이 주어져 있는 것을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그것 없이 우리는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하나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미세한 음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분별과 순종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악이 번성하고 인간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침묵하는 것 같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아픔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 아픔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구하기도 하고, 기적적으로 개입해 주기를 구하기도 합니다. 맑은 하늘에 틈을 내고 내려 오셔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죽도록 아픈데 하늘은 아무 일 없는 듯이 맑고 푸릅니다. 그럴 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절규합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절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의 악의가 만들어내는 아픔 가운데 처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지만 아무 응답이 없는 상황에서 드려진 기도들이 시편 150편 가운데 절반에 가깝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0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일부를 다시 보겠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한 자는 자기 야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늘 이렇습니다. (1-4절)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을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집니다. 악인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모든 것에 관심이 없으며, 얼굴도 돌렸으니,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다” 합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 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 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10-13절)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느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나요? 그런 생각을 들 때 죄 짓는 것 같아서 얼른 도리질을 쳤던 적은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감정으로 볼 때 당연한 겁니다. 그런 느낌에 빠진다고 해서 죄 짓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전체 안에 “언제까지?” 혹은 “어찌하여?”라는 말이 수 없이 반복됩니다. 그만큼 인간의 죄악의 현실이 심하다는 뜻이고, 그만큼 아픔이 많고 깊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만큼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경험하게 되는 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로드리고는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에 지쳐서 잠시 동안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배교하기 얼마 전에 감옥에 갇혀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외친 절규 즉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생각하며 예수님도 자신처럼 하나님의 침묵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대목을 엔도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미가 울고 있는 한 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신부는 벽을 향하고 앉아 소리를 내어 웃었다.” (215쪽)

엔도가 이 소설을 통해 제기하는 가장 심각한 질문은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엇 때문인가? 믿음 때문에 바친 목숨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견줄만한 소설로 엘리 비젤(Elie Wiesel)의 <Night>(흑야)라는 소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엘리 비젤은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열다섯이 되던 1944년 봄에 가족과 함께 집단 수용소에 옮겨졌고 나치 정권이 패퇴할 때까지 죽는 것이 더 나을법한 지독한 아픔을 겪습니다. 가까스로 생존한 그는 나중에 그 경험을 일기 형식의 소설로 출간합니다. 그것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나치 정권이 집단 수용소에서 행한 죄악은 너무도 심각하여 표현할만한 적당한 형용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상은 그 느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그렇기에 그곳은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가장 진하게 경험할 수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장차 랍비가 되기를 꿈꾸면서 자란 엘리도 그곳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태워 없애는 화장터 입구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그 운명을 피합니다. 지옥문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엘리는 그 대목에서 치를 떨면서 말합니다.

 

     절대로 잊지 않으리. 그 밤, 수용소에서의 첫날 밤,

     나의 인생을 일곱 봉인으로 막은 긴 밤으로 바꾼 그 밤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 그 연기를.

     절대로 잊지 않으리, 잠잠한 하늘에 연기가 되어 사라진 어린이들의 그 작은 얼굴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 나의 믿음을 영원히 태워버린 그 불길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 살고 싶은 욕구를 내게서 영원히 빼앗아 버린 그 밤의 침묵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

     나의 하나님과 나의 영혼을 살해하고 나의 꿈들을 재로 만든 그 순간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 이 모든 것들을.

     만일 내가 저주 받아 하나님처럼 오래 살게 된다 해도.

     절대로. (Night, 52쪽)

 

그런 상황에서 누군들 그런 회의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엘리가 고향에서 부터 알았던 랍비가 같은 수용소에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랍비가 엘리에게 말합니다. “다 끝났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아.”(94쪽) 경륜 깊은 랍비가 그러하다면 열다섯 소년 엘리가 그런 회의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그런 회의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와 같은 권력자의 조직적인 박해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크게 혹은 작게 이런 상황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는 것이 아픈 것이고, 때로 그 아픔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고 또한 오래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침묵>의 로드리고가 경험했고 <Night>의 엘리 비젤이 경험했던 그 질문과 회의가 마음을 흔드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오게 되어 있습니다.

 

4.

인간의 악이 번성하여 아픔이 깊어질 때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기대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뜻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아픔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아픔을 제거해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아픔 가운데 함께 하는 방법을 택하십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아픔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지금은 그 아픔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는 아픔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도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대로 잘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고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반복되는 말씀입니다만, 하나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일하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물론, 강한 손길로 개입하시고 강력한 음성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죽을병이 한 순간에 치유되는 경우도 있고, 환상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기적이 기적인 이유는 흔히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기적이 다반사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기적 이야기들이 묶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 시대에도 기적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적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며 활동하시는 증거를 찾으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틈새 이론’(the Gap Theory)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논리 혹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틈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맑은 하늘을 가르고 그 틈으로 들어와 우리의 일상사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삶과 목회 여정에서도 그런 일을 왕왕 겪었습니다.

하지만 틈새로만 하나님을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믿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무신론자들은 말합니다. 앞으로 과학이 더 발전하면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었던 틈새의 사건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로 사용되었던 틈새 사건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은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장차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그러니 기적 즉 틈새 사건은 없다고. 일찌감치 신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 좋다고.

사실, 과거에는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과학의 원리로 설명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물론, 과학이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과학이 설명하는 것으로 다 해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커져 있어서 과학이 설명하면 그대로 믿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틈새에만 의존하면 믿음이 심각하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틈새로만 하나님을 보는 믿음은 소설 <침묵>이나 <Night>을 통해 보듯 깊고 오랜 아픔의 현실에 처하여 심하게 위협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아픔의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의 개입을 구합니다. 맑은 하늘을 찢고 그 틈새로 들어와 우리의 아픔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틈새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믿음이 심하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기적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상사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심한 시험에 들게 되고, 그런 일을 일상사로 만들려고 애쓰는 목사는 영적인 사기꾼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교우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백인 친구 중에 아주 믿음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신자답게 살고 교회에서도 중요한 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딸은 전혀 믿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독실한 믿음을 생각하면 그 딸의 철저한 불신앙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물었다지요. 왜 당신 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느냐고.

그 아버지 말에 의하면, 그 딸이 어릴 적에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특별히 사랑했던 할머니가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그 딸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틀림없이 들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얼마 후에 그 할머니는 속절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그 딸이 교회를 끊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기도했는데 응답해 주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거나, 믿어도 소용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틈새에 매달려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와 유사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구름 사이로 햇볕이 내리 쪼이는 것을 볼 때만 태양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태양이 구름에 가려 있는 동안에 그리고 태양이 보이지 않는 밤중에는 태양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어둠이 칠흑같이 느껴지는 한 밤중에도 여전히 태양빛을 받고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압니다. 그처럼 우리도 틈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5.

이 지점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음을 당하는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모든 죄악을 하나님의 전능의 손으로 제거해 버리는 편이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행하시기로 계획된 일입니다. 그 이전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두시고 일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 의해 죽임 당하는 편을 택하신 것입니다. 아픔 가운데 오셔서 아픔을 온 몸으로 삼킨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철저한 침묵과 부재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부활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부드러운 손길과 세미한 음성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아픔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틈새로 보여 주십니다. 잊을 만하면 하나님은 맑은 하늘을 갈라 틈새 사이로 오셔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책임진다! 내가 일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가장 분명한 목소리로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 일상의 아픔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고난을 모두 짊어지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0-11)

저는 이것을 바울의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보듯,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틈새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의 손길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닮으려 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나날들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았고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었고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을 보았으며 그분의 미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박해와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엔도 슈사쿠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고통당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틈새로 들어 오셔서 기적적인 구원을 해 주시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그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합니다. 그 대신, 그는 수치스러운 배교자가 되고 배교자로 살아갑니다.

엔도는 로드리고가 후미에 앞에 섰을 때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들었다고 썼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267쪽)

 

 

이것은 순전히 저자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음성은 사탄의 음성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진실을 전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로드리고는 일본 땅에서의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은 틈새에서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과 미세한 음성으로 언제나 일하신다는 진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스콜세지 감독은 엔도가 전하고자 했던 이 메시지를 마지막 대목에서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기치지로의 마지막 고해 성사 장면에서 로드리고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침묵과 싸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 옆에서 함께 아파했다.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로드리고가 대답합니다.

“알지요. 하나님은 침묵했다 해도, 나의 인생…지금까지…내가 하는 모든 일…내가 해 온 모든 일들이…주님에 대해 말해 줍니다. 제가 당신의 음성을 들은 것은 침묵 가운데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왜 엔도가 이 소설의 제목을 <양지의 냄새>라고 지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양지는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마치 암흑이 지배하고 있는 듯한 한 밤중에도 햇빛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분이 보이지 않고 그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조차 우리와 함께 하시고 활동 하십니다. 그것을 모르고 우리는 습한 음지에서 코를 내밀고 양지의 냄새를 찾는 것처럼 아픔과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습니다.

우리는 모두 로드리고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믿고 있습니다. 하늘에 틈을 내어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의 침묵과 싸웁니다. 하지만 숨어 계신 하나님은 은밀하게, 부드럽게, 드러나지 않게 우리 중에 역사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그분이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갈라진 하늘 틈새로 선명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환상이나 체험을 통해서 틈새의 하나님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적인 질병의 치유를 통해 틈새의 하나님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통해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를 봅니다.

그런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분명히 보았다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틈새로 하나님이 임하시는 사건에 목매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숨어계신 분이며 부드러운 손길로 일하시는 분이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안 계신 것처럼 계시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고 또 때로는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틈새를 통해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크게 혹은 작게 하나님을 보았는데, 더 크고 더 자극적인 것을 기대하기에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그렇다 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틈새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 주신 사건 즉 예수님의 부활 사건 때문입니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틈새 사건이 없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틈새 사건만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분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믿음에 이를 수 있기를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틈새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만을 바라고 사는 믿음이 아니라 매일 우리 가운데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면, 정말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기에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평안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이 단계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온 천하에 충만하신 하나님, 언제나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0월 29일 주일 설교

김영봉 목사  bong3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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