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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하나님 나라 역사의 실패인가?[예수의 삼중직-1] 왕

예수님은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였습니다. 이것을 예수의 삼중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는 분들은 이 세 가지 예수님의 직분을 따로 떼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따로 떼어 생각해보면 신앙의 삶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직분을 담당하심으로써 구약시대 기름 부음을 받았던 직분인 이 세 가지 직분이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직분을 담당하심으로 이제 더 이상 이 세 가지 직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왕은 없으며, 제사장도 없으며, 선지자도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직분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세 가지 직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왕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왕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왕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따로 담당하고자 구분되었던 제사장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만인제사장이라는 말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을 전함으로써 더 이상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지자로서 말씀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로서의 삶을 구현함으로써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증폭하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삼중직에 따른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의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왕

먼저 왕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왕을 필수불가결한 직분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사사시대를 겪으며 약소국가로 초라하게 보이는 자신들의 처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다른 강력한 나라들 모두에 강력한 왕이 있음을 보고 자신들에게도 인간인 왕을 세워달라고 당시의 사사라 할 수 있는 사무엘에게 요구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한 직분의 요구가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생활 곳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백성들에게 보내 그들이 원하는 왕의 제도를 알게 하셨습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삼상8:11-17)

왕의 제도는 많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제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세움으로써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만만치 않았지만 이미 다른 신들을 섬기며 세상의 쾌락을 즐기게 된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전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그들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18)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장 무서운 선언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에 인간 왕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강제로 몰아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통치강령은 자발적 동의입니다. 유일한 참 왕이신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들을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통치강령은 바로 이 자발적 동의입니다.

슬픈 역사

하나님이 말씀하신 왕의 제도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인 사울을 골라 왕으로 세웠지만 결국 그는 왕의 권력을 담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합한 왕이 세워졌지만 그도 왕이 되었기에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는 밧세바 사건을 그의 가장 큰 범죄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지은 가장 큰 죄는 인구 조사입니다. 인구 조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을 가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은 가장 큰 범죄입니다. 진정한 왕이시며 보호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생명과 안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탁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온역으로 칠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역대 왕 중 가장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왕 제도의 한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윗을 이은 왕은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범죄한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역시 가벼이 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또 한 사람의 기억할만한 왕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로 재판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던 바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과 함께 부와 영광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으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로 무거운 멍에를 매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의 아들 대에서 이스라엘을 남과 북으로 분열시키는 분열왕국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최고의 이성으로도 왕이라는 세상의 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솔로몬에게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되었고 은과 금이 흔한 것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마음은 강해지고 부해진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성서는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 륙십 륙 금 달란트요."(왕하 10:14)라는 말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은혜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솔로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과 더불어 생각할 사람은 므낫세입니다. 유대의 왕 가운데 무려 오십 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유대를 통치한 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시대의 유대는 가장 강력했고 영토 또한 가장 넓은 시대였지만 가장 악한 왕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분열왕국의 왕들 중 히스기야나 요시아와 같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왕들이 있었지만 나머지 유다의 왕들과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왕의 제도와 같이 희생양들을 필요로 하는 세상의 방식을 따랐고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실패에 이은 두 번째 하나님 나라 역사의 실패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슬픈 역사가 되었습니다.

평화의 왕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은 새로운 왕으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평화의 왕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평화의 왕이라는 말에는 하나님 나라의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평화는 힘을 바탕으로 하는 로마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입니다. 힘으로 만드는 평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샬롬', 즉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만들어내는 결핍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평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복음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허상이 되고 맙니다. 지금 이곳에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사랑과 정의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 즉 샬롬의 나라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은 두 가지 현저한 특징을 가진 분이 되었습니다. 먼저 무력한 자가 되셨습니다. 갑자기 '겉보리 서 말'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남자는 겉보리 서 말 들 힘만 남아 있어도 바람을 피운다는 우리의 속담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아주 적은 힘만 있어도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또 아주 적은 힘만 있어도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 적은 힘으로 자신의 안위를 스스로 도모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히 무력한 자가 되셨습니다. 말 먹이통에서 가장 비천하게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 하나 없이 가난하게 사신 것도, 늠름한 백마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고 대관식을 치르신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모두가 철저하게 무력한 왕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들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어야 인간은 전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각.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였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능력을 얻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잇고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우리가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어야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좇다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고 말했고 약한 것을 자랑하였는데 그 이유를 자신이 약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믿고 기꺼이 약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 길에서 가난은 필수적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섬기는 종

그렇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의 왕처럼 힘을 내세워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의 세족식입니다. 그분은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지만 이 기사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종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비천한 노예조차도 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며 태도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서로 섬기고 복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평화가 그 공동체 안에 이루어지고, 그 모습은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주고 동시에 희생양의 체제인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함은 물론 세상에서 절망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이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하나의 왕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왕이신 예수님을 닮은 섬기는 종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왕 노릇을 하는 곳입니다. 모두가 왕이 되어 기꺼이 종으로 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새로운 역사

오늘날 기독교는 과거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슬픈 역사를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 안에서 헌금 유용이 빈번히 일어나고 성범죄와 세습과 같은 욕망의 모습이 독버섯처럼 번지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서로에게 섬기는 종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힘으로 다스리고 지배하는 세상의 왕처럼 힘과 권력을 추구하고 폭력을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가 이 시대 기독교의 타산지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번영과 안정을 보고 인간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왕들처럼 힘으로 자신들의 안위를 구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권불십년인 세상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슬픈 이스라엘의 역사가 새 이스라엘에서도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평화의 왕인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왕의 길을 걸으며 기꺼이 세상을 섬기는 종들이 될 때, 하나님 나라는 가루 서 말에 부은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운 길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길에서 만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하나님 나라 백섣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런 새로운 역사가 이 땅에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최태선  tschoi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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