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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은 영원한 율법을 적은 것이 아니다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 인터뷰...한국 정치과 교회에 대한 비판적 해석

[미주뉴스앤조이=양재영 기자] 한국은 새해가 시작되면서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 새로운 정권 창출을 위한 선거 등의 숨가쁜 시간을 보내왔다. 이 가운데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첫만이 넘는 촛불이 전국을 요동치게 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친미와 반공을 내세우며 태극기를 들고 저항하기도 했다 .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현장 속에서 기독교는 비참할 정도로 저급하고 몰상식한 민낯을 보여줬다. 근본주의적 기독교 사고를 가진 목회자와 교인들의 행보는 사회적 외면을 받았고, 시대적 요구에 역행하는 반기독교적 세력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교계 내에서는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사건을 접하면서 ‘권세에 대한 복종'을 주제로 로마서 13장 논쟁이 일기도 했으며, 한국 기독교의 극우 파시슴적 행보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쏟아져 나왔다.

<미주뉴스앤조이>는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과 나아가야할 바에 대해 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를 만나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김세윤 교수

- 지난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촉발된 사태에서 보여준 기독교인들의 행보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많다.

한국의 신학적 근본주의적가 성도들로 하여금 비판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유치한 교조주의적, 근본주의적 사고를 하도록 만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근본주의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면 어디나 교조주의가 생겨난다. 미국도 바이블벨트가 있지 않는가? 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러한 교조주의가 유독 강하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 사회정의와 화평을 도모하고 앙양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언론을 통제하고 정보기관들과 권력기관들을 동원하여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억압하고, 감시하고, 제재하는 것은 전형적인 파시즘의 메커니즘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좌익 파시즘(공산주의 정권들)이나 우익 파시즘(우익 독재정권들)이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우익 파시즘적 성격을 현저히 드러내는 정권들이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 정권이라 칭하며, 만인의 인권, 민주적 법치,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종북세력'이라고 핍박하고, 그런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후자를 척결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대규모로 모여서 시위하고 있다는 희극/비극이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죠지 오웰 식 언어도단과 역설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보수 기독교인들이라는 점이다.(그들은 성조기에 더하여 십자가까지 동원하여 그 '희극/비극'을 더욱 빛내고 있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 보시기에 얼마나 참담할까?)

- 유독 한국인들의 교조주의가 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성향은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우선, 장기적으로 유교경전에 맞춰 명분을 내세우고, 해석함으로 교조주의를 이루었던 조선조 사색당쟁을 들 수 있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조에서는 ‘내가 당신보다 더 공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당신은 그 가르침에서 이탈했다' 등의 경전 구절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 식이었다.지금 기독교 근본주의와 보수 신학교의 멘탈리티는 바로 거기에 머물러 있다. ‘내가 너보다 더 보수이다', ‘내가 너보다 성경 문자를 더 준수한다' 식의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복음과 신앙고백 체계가 가져다준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을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신학적 사고를 할줄 모르니, 성경 몇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 율법화해서 모든 가치를 다 맞추고 있는 실정이다.   

- 반공주의나 동성애, 낙태 등의 문제가 여기에 해당될 것 같다.

그렇다. 한국인들의 사상이 극단적인 면이 강하다. 완고한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적 사고로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조선조의 유교논쟁이 기독교의 율법주의와 문자주의로 더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정통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문자화, 율법화시켜서 그것들을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몇가지 현상에 적용한다. 이성간의 성도덕의 타락과 오늘날의 경제와 정치구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가? 그런데, 그들은 동성애와 낙태를 죄로 규정하고 있는 성경구절 만을 생각한다. 깊이 생각하는 지성을 개발하지 않고, 그저 흑백의 논리로 성경 문자를 율법화해서 몇가지 현상에 적용해 비난하고 있다.

- 이런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목사들의 신학훈련이라는 것은 비판적 사고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도 교조주의로만 배우고 있다. 사고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단의 신학은 이렇다’는 것만 배운다. 그것이  그대로 성도들에게 적용되어, 일탈하면 불안해하고 신앙이 없다고 정죄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교회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그중에는 자기분야에서는  최고의 지성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교회 안에서는 비판적 사고를 상실한 유치원생으로 전락해 있다. 율법의 진리이니 그대로 따라야된다는 교조주의와 나만 옳다는 독선주의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있다. 융통성이 없어지고, 다양한 관점이 사라지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죄로부터의 사면’으로 본다. 그러다보니 ‘이게 죄인가 아닌가?’가 가장 심각한 이슈이다. 구원론과 관계가 있다보니 유교논쟁 때보다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교의 경전주의, 율법주의, 독선주의, 교조주의에 대한 수백년동안의 훈련이 기독교 근본주의와 만나 더욱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  

“권세에 대한 복종은 역사적 맥락에서…”

- 한동안 교계에서 로마서 13장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권세에 대한 복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나의 책 <그리스도와 가이사>에 잘 정리해놨다. 로마서 13장은 바울이 쓴 역사적 정황속에서 해석이 되야한다. 모든 상황과 관계없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율법이 아니고, 당시 로마교회의 상황속에서 바울이 주는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와 가이사 (김세윤 저 / 두란노 아카데미)

로마서가 쓰여진 56년은 네로 황제가 아직 폭군화되지 않은 때였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는 66년 유대전쟁이 발발하기 10년전으로 유대 열혈당의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 운동이 점점 세력을 얻어 상당히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로마에는 유대인들 모여살던 커다란 게토가 있었다.  그 게토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고,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로마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암암리에 열혈당과 관련한 논쟁이 있었다. 그게 바울의 걱정거리였다. 로마교회가 열혈당 반란운동에 동참해서 씨가 말릴수도 있다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맥락이었다.

또 하나는, 당시 로마에서 발생한 세금 반란이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7절에보면 권세를 존중하고 세금도 제대로 내라고 한다. 바울은 세금반란에 기독교가 합류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세번째로 교회가 당시 겨우 심어져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은 교회가 역사적 무게, 수량적 무게, 정치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는 이제 겨우 뿌리내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몇백명의 성도들이 열혈당 신학으로 황제를 거부하면 죽임만 당하고 노예시장으로 팔려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 권력에 대한 복종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바울이 보기에는, 아직 황제가 악보다는 순기능이 많다고 본 것이다. 모든 정치는 양면성이 있다. 바울은 네로황제가 악을 응징해서 공공질서와 사회정의를 세우는 면이 악을 도모하는 것보다는 많았다고 봤다. 칼을 하나님이 주신대로 쓰는 것이 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순기능이 많을 때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은 구약의 전통이다. 구약의 전통은 이중적이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다는 전통과 함께, 다른 하나는 이방왕도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세우도록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이다. 통치행위가 순기능이 많으면 이방왕이라도 권력으로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 구약의 전통이다.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 로마는 군대로 질서를 잡고 지중해의 평화를 유지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고대 세계화를 이뤘다. 그러니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었다. 그 평화와 질서가 없었다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이동하면서 선교할 수 있었겠는가? 사도행전 보면 바울이 로마법에 따라 비교적 공정하게 재판받으면서 풀려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클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쫓아냈는데, 네로 황제가 다시 그 법을 해지해서 유대인들이 돌아와 큰 게토를 이루어 거기에 교회가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열혈당 운동에 동참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로마서는 그런 현실인식을 염두에 두고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가르침이다. 바울은 영원한 율법을 적은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만약 로마서를 주후 95 년 쯤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로마 제국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더 강화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썼다면 그도 요한계시록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가이사를 사단 ("용")의 현신 ("짐승")으로 보고 그의 사악한 통치에 적극적으로, 즉 순교를 각오한 진리와 사랑의 복음으로 저항하라고 썼을 것이다. 로마서 13 장을 불의한 정권에도 순종하고 부역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약 정경에는 로마서 13 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13 장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간, 오늘날의 우리의 상황은 바울의 상황과는 다르다. 오늘의 상황은 통치자가 민주주의 법과 절차에 어긋나면, 그리스도인들이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항의할 수 있다. ‘더 큰 선을 행하라’, ‘더 큰 정의를 이루라’고 항의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의와 선과 화평을 행하라고 정부에 요청할 수 있다.

- 얼마전 권연경 교수가 강연할 때 ‘만약 루터가 지금 이 자리에 온다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가 아닌 야고보서를 더 강조했을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권 교수가 그런 표현을 통해 말하려고 한 바는, 믿는다는 것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주권과 뜻에 따름이라는 '선행'이 포함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선행을 다 빼고 믿음만 외치니 반쪽 믿음이 되어버렸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야고보서이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자는 의도에서 선행을 훨씬 강조하지 않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만 붙드는 것이 아니고, 믿는 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 순종해서 의를 행하고 선을 베풀고 살아야 된다는 요구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만 붙드는 믿음은 반토막 믿음으로 그런 믿음엔 구원이 없다. 그런 극단적 예가 구원파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들이 실제로 구원파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믿음을 포괄적으로, 전체적으로 이해해야하지 믿음의 한부분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다.

한국교회가 대부분 근본주의적이어서, 신학적 사고능력을 길러주지 못하고있다. 성도들을 문자주의, 율법주의, 교조주의로 내몰아서 사고의 유치한 영역에 머물도록 하고 있고,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기독교적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기독교 언론이 기독교 언론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한 세계관, 가치관을 확립하여, 그들이 오늘날 이 땅에서 책임있는 시민들로 어떻게 정치와 사회, 문화 참여해서 사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적, 선교적 삶의 자세인가를 통합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재영  jyyang@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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