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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바울이 싸운다면 당신은 어느편을?

신대원 시절 교수님이 이상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과 바울이 싸우면 여러분은 어느 편을 들겠습니까?"

당시로서는 어리둥절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질문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지은 책의 제목이 <열매로 알리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위를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승리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구원의 서정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으로 인간의 책임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다니는 아이들까지 이 사실을 노래합니다.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자신의 옳음에 천착하는 인간의 본성이 예수님과 바울을 이간질했고 결과적으로는 바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복음의 폭발력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행태를 바라보며 절망에 절망을 거듭한 결과 바울의 신학 역시 예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바울의 신앙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한 한 신앙인의 겸손이었고, 그가 인용한 "오직 믿음" 역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인간 쪽에서의 고백일 뿐, 인간의 행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싸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의 과정이 없이 오직 은혜만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 측에서의 치열한 삶이 실종되어 결과적으로는 남묘호란게쿄와 마찬가지로  '아멘'이라는 주문만을 외우는 주문의 종교가 되고, 정작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종교에서 부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는 개신교는 루터의 '오직 은혜'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의 우선성

이에 대해 다음 가톨릭의 로버트 배론 주교의 말은 귀중한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16세기 초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루터는 교회의 생활에서 자력 구원의 위험성을 보았으며, 그래서 그는 진정한 선지자적 열정으로 은혜의 편에서 외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벌써 오래전에 펠라기우스에 직접 맞섰던 자신의 영적 아버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소리를 다시 울렸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오늘날처럼 급진적으로 세속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런 때에는 특히 그렇다. 기독교 세계 전체는 이를 증언한 마르틴 루터에게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라티아 프리마’gratia prima(먼저 은혜grace first)를 말하는 것에 자신을 제한했더라면, 루터는 가톨릭주의 내부에서 꼭 필요했던 개혁을 이루어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라티아 솔라’gratia sola(은혜만으로grace alone)를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충분히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귀중한 내용입니다. 물론 아직도 "오직 믿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처음에도 언급했던 열매로 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태복음 7장 21-27절의 내용과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행함이라는 25장 31-46절의 내용과 같이 인간의 책임과 행위를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저는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분들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신학적인 교리에 대한 천착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오직 믿음"이 전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하나님이 다 하셨으니 나는 할 것이 없다는 식의 사고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사명과 책임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언어는 상징입니다. 언어는 그 이상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 말의 실재를 보지 못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에 묶인 사람은 사랑을 모릅니다. 용서라는 말에 묶인 사람은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화해라는 말에 묶인 사람은 다른 이들과 화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가끔씩 특히 나이 드신 남자 분들에게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보라는 식의 연출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고, 끝까지 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로 질문하고 싶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고백하지 않는 분들보다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할까요? 그럴 개연성이 높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모순도 없습니다.

사랑의 고백이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 이전에 실제로 사랑의 사건이 되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사건은 애초부터 인간의 언어에 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의 한계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고백이 곧 배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의 입으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베드로가 주님의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대답합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고백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자기 확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을 입으로 고백하도록 하고 거기에 사건의 전 의미를 부여해온 기독교 문화는 그런 면에서 신빙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신앙이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의 고백에 다 담겨 표현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기보다는 인간의 언어의 고백으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간의 언어와 교리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믿음을 고백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앙을 살기 위함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고백하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려는 것입니다. 화해한다고 고백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용서와 화해는 인간의 언어나 교리로 치환될 수 없습니다. 고백이 아니라 행동으로,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삶에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심을 받은 자'로 표현합니다. 보내심을 받는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을 삼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단호한 한 마디 말 속에는 예수님을 움직이게 하는 삶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있는 모든 대상을 '하나님이 보내신 존재'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만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충성하게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은 이들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자기 욕망만을 붙잡고 살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며 사는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타자들 속에 숨겨진 신적 광휘인 거룩함을 보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성과 속,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던 장벽들이 철폐되었습니다. 벽으로 차단하고 경계선을 설정함으로써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 이익을 확보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체제의 토대를 흔드는 예수님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제국의 토대를 흔들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고백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치열한 삶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 운동

칼릴 지브란은 사랑에 대해 말해달라는 요구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이 너에게 손짓하며 오거든 그를 따르라.
비록 그의 길이 어렵고 가파를지라도.

그리고 그의 날개가 너를 감싸 안을 때엔 그에게 안겨라.
비록 그의 날개 깃털들 사이에 숨겨진 칼이 너에게 상처를 입힐지라도.

그리고 그가 너에게 말할 때면 그의 말을 믿어라.
비록 그의 목소리가, 북녘 바람이 뜰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처럼, 너의 꿈들을 흩트려놓을지라도.

그가 말하는 사랑은 모조리 어렵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결코 사랑에 대한 고백이 아닙니다. 사랑 속으로 투신한 사람이 마주하게 되는 명징한 실재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기독교 신앙의 길 역시 칼릴 지브란이 말하는 명징한 실재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내가 가는 신앙의 길이 어렵고 가파르다고 느끼고 있을까요?
사랑의 날개 깃털 사이에 숨겨진 칼에 상처를 입었을까요?
사랑의 목소리가 나의 꿈들을 흩트려놓았을까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이 사랑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셨기에 몸소 하나님 나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고, 그 사실이 너무도 현저했기에 그분은 사랑 그 자체였고, 몸소 하나님 나라라고 사람들이 느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너무 생생하게 느꼈기에 그 자신도 사랑이 되었고, 그 역시도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과 행동에서 그 어떤 성취감이나 우월감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오로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가득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9)

그는 자신의 말대로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늘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마음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은혜 인식은 치열한 자신의 삶의 열매이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생생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처럼 자신의 하는 모든 일과 말들이 아버지의 일과 말이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이며 그의 의인과 믿음에 대한 인식은 그러한 일치에서 깨달은 은혜의 우선성이었습니다.

500년 전 루터가 느꼈던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 현실에 대한 절망이 그로 하여금 '은혜의 우선성'을 보게 하였고,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그것을 '오직 은혜'로 표현하게 하였을 것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루터의 목숨을 건 종교개혁이 헛되지 않도록 이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치열한 삶으로 사랑 운동에 참여하는 성령의 역사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기대해봅니

최태선  tschoi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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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은 정확하게 (209.XXX.XXX.2)
2017-05-16 14:37:19
찬성:0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모조리 어렵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결코 사랑에 대한 고백이 아닙니다... "에서 '그녀'가 칼린 지브란인가요? 칼린 지브란은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긴 하지만 남자인데요... 레바논-아메리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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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75.XXX.XXX.141)
2017-05-16 12:24:15
찬성:2 | 반대:2 찬성하기 반대하기
이게 대체 뭔소립니까? 언제 예수님이 행위만을 강조했습니까? 그리고 언제 바울이 승리했습니까? 승리했다면 예수님에 대해 승리했다는 겁니까?

이 글은 전제부터가 너무 비약이 심하고 도무지 성경적 근거도 없고 의도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묻지만 바울이 뭘 승리했습니까? 바울이 언제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일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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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50.XXX.XXX.118)
2017-05-22 09:47:28
찬성:1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바울이 승리했다... 일종의 반어법적이고 은유적 표현 아닐까요? 언뜻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바울서신을 포함한 성서 전체는 결코 그걸말하지는 않았다... 이게 최태선 목사님 얘기고, 신학계의 오랜 논쟁 아니었나요? 기독교가 바울교냐 예수교냐... 그런 논쟁.

지나치게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믿음'이라는 '언어적 표현' 자체가 마치 믿음의 실재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믿음이란 명사적 표현이 실재 믿음에 대한 설명을 다 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명사와 동사를 합한 '믿음을 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믿음의 실체를 다 드러낸 것은 아니다. '실재'에 대한 인간 언어의 한계때문이다...

쉬운 말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일단 인간이 설명을 시작하는 순간 '실재'나 '본질'은 사라진다. 머 그런 얘기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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