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외에는 모두 적이다

이름 참 독특하다. 다윗이 절치부심하며 지내던 광야 인근의 마온 지역 거부 '나발'말이다. 나발의 히브리어 이름 뜻은 '바보', 정말 그의 이름이 바보였는지 아니면 다윗의 부하들을 문전박대했던 바보같은 행동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성서에 기록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바보'는 그들을 문전박대한 뒤 의문의 쇼크사로 세상을 떠난다. 

우리 말의 '나발'도 어감이 썩 좋지는 않다. 나발은 나팔의 일종인 국악 악기지만 소리의 독특성 때문에 '나발분다'라고 하면 '당치 않은 말을 함부로 하다'는 뜻이 된다. '개나발'이 되면 '사리에 맞지 아니하는 헛소리나 쓸데없는 소리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변한다. 여기서 '개'는 강아지가 아니라 '마구 되어 변변치 못한'의 뜻을 가진 접두사다. 그러므로 개나발은 개가 부는 나팔이 아니라 마구 불어 대는 나팔이란 뜻이다. 개나리의 '개'도 개나발의 '개'와 같은 접두사라고 하니 개나발이 써서는 안 되는 막말은 아니다.  

다윗의 부하들에게 '개나발'을 불던 나발을 보자. 그는 양 떼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를 가진 부호였다. 그가 갈멜 지역을 방문해 양털을 깎던 날 다윗의 부하들이 먹을 것을 얻으러 왔다. 농촌의 추수 때 처럼 양털을 깎는 날은 축제의 날이다. 이웃과 종들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마음이 가장 넉넉해 지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의 분위기 덕을 보려 했던 다윗의 부하들은  나발로부터 "내가 어찌, 빵이나 물이나, 양털 깎는 일꾼들에게 주려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주겠느냐?"라는 모욕을 당한다.

다윗과 그 일행들은 광야에서 도적들도 막아주고 양떼도 지켜주었다고 나발 앞에서 그들의 공적을 이야기 한다. 나발로부터 음식을 얻으려고 했던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다윗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어떤가?  축제의 날에 배고픈 이들과 음식을 나누는 일은 '복지'도 아니고 '적선'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다. 

홍준표 자유 한국당 대선 후보의 발언과 돌출행동이 연일 화제다. 그는 경상남도지사 시절 보편복지를 '공짜'로 해석하면서 아이들의 밥그릇을 빼앗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한다.

이처럼 그의 공약들은 개나발(?)에 가깝다. 나발은 다윗의 제자들에게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며 감히 나발 자신에게 말을 섞는 다윗의 부하들을 조롱한다. 홍준표에게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한국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다. 노동자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아랫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자들과 맞서는 노동조합을 만들었으니 홍준표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사람들에 다름 아니며 성완종 뇌물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실에 대해서는 '노무현'을 언급하며 피해간다. 보수의 단골 메뉴인 안보팔이 종북팔이도 음계의 변화없이 부는 나팔처럼 소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강간 미수 동조 사건은 그의 '자랑'이다

이제는 강간 미수 동조 전력까지 불거졌다. 돼지 흥분제를 이용한 하숙집 동료의 강간 미수에 동조한 사건(비록 후회로 이야기를 마무리했지만)을 굳이 자서전에 담은 그의 심리를 잘 분석해야 한다. '회심'을 강조하기 위해 부족했던 자신을 되돌아 보는 일은 자서전 대필 작가들의 해묵은 기법이다. 그런데 이번 '회고'는 다르다. 강간 범죄 모의는 범죄다. 게다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단순히 후회한다고 했지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어떤 회심의 길을 걸었다는 여타 자서전들에게서 보이는 상투적인 반전이 없다(예를 들어 검사가 된 후에 자신을 반성하면서 강간범들에게는 더욱 엄한 구형을 했다는 식의 회심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내용을 집어 넣었을까? 단순히 한 두 줄의 짧은 고해성사를 위해서? 아니다. 후회(파장을 예측한 대필작가의 주장으로 후회 부분을 집어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장식물이고 그는 왜곡된 '남성성'을 자랑하고 싶었던 거다. 지금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단체 대화방의 대화가 공개되어서 파장을 일으키곤 하는데 대학생 홍준표 시절의 '남성성'은 딱 그 수준이었다.  

그가 '후회'하려고 이 사건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자랑 삼아' 썼다는 추정은 최근의 몇마디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설거지는 하늘이 여성에게 준 의무'이며 부엌일을 외면하는 그는 라면도 끓일줄 모른다. 또한 그는 강간미수동조 사건을 변명하면서 그때 하숙집 동료들은 모두 한국 경제를 주무르는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그 정도 엘리트들이 젊을 때 부린 객기에 뭐 그리 호들갑이냐는 마음을 담은 후안무치한 발언이었다. 그 때 하숙집 동료들이 누구인가?  

최순실 정국에서 정유라에게 말을 사주는 것으로 삼성의 미래 전략을 세웠던 장충기(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박재완, 한 아세안센터 사무총장을 지냈고 현재는 문재인 캠프의 외교자문 그룹에 있는 정해문,  STX 대표 서충일 등 중의 한 명이거나 익명의 다른 하숙생일 수도 있다. 홍준표는 이들의 현재를 거론함으로써 이들과도 척을 지게 되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이들을 적이거나 (세금) 도둑으로 보는 홍준표는 나발과 많이 닮아 있다. 이런 나발이 걱정스러워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을 찾아가 다윗의 분노를 가라 앉힌다. 아비가일 덕에 다윗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발은 의문사하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된다.

나발에게는 그의 잘못에 대신 용서를 구할 아비가일이라도 있었지만 박정희 박근혜를 되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은 홍준표를 더욱 '나발'스럽게 만들어 가고 있다. 여론 조사 결과로 보면 홍준표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래도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대선 이후 보수의 맹주가 되려는 장기적인 포석인데 대구 소재의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그는 경상남도 사람이기에 보수의 주류를 자처하는 대구 경북지역에서 선거 후 용도가 끝난 그를 간택해 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운명은 한 길 밖에 없어 보인다. 낮은 득표율로 인한 홍나발 개인의 정치적 사망이거나 혹은 예상 외의 높은 득표율로 인해 민낯을 보여준 거짓 보수 이념의 사망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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