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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왜 <우신예찬>을 썼을까?

저를 새롭게 하소서

저를
자신에게서 끊으셔서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제가
자신에게 죽어
당신 안에서 살게 하소서.

제가
자신에게 시들어
당신 안에서 꽃피게 하소서.

제가
자신을 비워
당신 안에서 풍성하게 하소서.

제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당신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소서.

에라스무스의 기도문입니다. 어떤 분이 강의에서 종교개혁에는 4개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루터의 길, 아나뱁티스트의 길, 에라스무스의 길, 그리고 로욜라의 길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들을 것입니다. 개신교인들의 사고에는 오직 루터만이 있고, 그 루터의 길을 완성한 사람이 칼빈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4개의 길이 있었다는 말은 매우 생경하게 들릴 것입니다. 종교개혁에는 루터와 칼빈의 길이 있었다고 말해야 오히려 편할 것입니다.

메노나이트와 아미시를 태동했던 아나뱁티스트의 길과 반동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로욜라의 길도 생경하겠지만 특히 에라스무스의 길은 거의 아무도 길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종교개혁의 한 갈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라는 단순한 한 마디로 에라스무스를 매도해버리기 때문에 그가 추구했던 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간과합니다. 하지만 기껏 시작했던 종교개혁이 폭력 안에 오히려 더 깊이 자리하게 된 현실 속에서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종교개혁의 본질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줄 것입니다.

'평화를 모르고 부인하는 종교'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위기는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밀라노 칙령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주된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국가에 편입되었고 결과적으로 폭력의 방식인 전쟁이 기독교 안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인과 폭력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비폭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기독교를 옹호하고 보호하고 나선 마당에 기독교가 국가를 나 몰라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 '정당한 전쟁'이라는 폭력의 방식이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간단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는 평화의 왕이고,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나라 원칙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비폭력 저항이었습니다. 기독교는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야 하는 종교였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그 원칙이 무너지고 평화의 나라이어야 할 교회 안에 전쟁이라는 폭력의 방식이 자리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오직 유일한 왕이셔야 할 하나님의 자리가 사실상 흔들리거나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 기독교 역사 속에서 힘과 영향력은(사랑이 아니라) 주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만든 중세 교회의 타락도 사실은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핍의 현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일어나야 했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인 기독교 안에서의 힘의 추구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건드리는 피상적인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가톨릭이라는 큰 힘을 지닌 세력에 맞서기 위해 개신교 역시 더 큰 힘을 추구하는 결정적인 패착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역사 속에서 국가 간의 이해타산을 위한 전쟁이 종교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다시 한 번 폭력의 방식은 기독교 안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그것은 자라서 아예 기독교라는 종교를 특징짓는 특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개신교의 명칭이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 자들)'가 된 것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의 법정을 찾게 된 것도 이런 기독교 안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가 평화를 모르고 부인하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실례로 개신교 안에서는 가톨릭이 평화를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고 설교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샬롬을 말하고 하나님의 샬롬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모르는 기독교를 기독교라 할 수 있는가, 고민해야 할 기독교가 평화를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기만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왜 <우신예찬>을 썼을까?'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각되는 인물이 바로 에라스무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가 <우신예찬>이라는 책을 써야 했는지, 왜 그가 인문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를 생각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오늘날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강력한 주장으로 일사를 각오하는 폭력의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시 또 폭력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한다면 그 결과가 또 다시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모국어인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배워 익힌 라틴어를 쓰며 대화와 평화에 기초한 새로운 유럽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싫어했는데, 그의 태생이 폭력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슈테반 츠바이크가 쓴 <에라스무스 평전>에 따르면, 그는 1466년경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는데 불법이며 금지된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어느 사제의 사생아였습니다. 부모는 일찍 죽었고, 친척들은 이 아비 없는 자식을 아홉 살 때 데벤터의 수도원 학교로 보냈습니다. 그 후 스무 살 쯤 되어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종교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사로잡은 아름다운 예술과 라틴문학, 회화들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고, 1492년 유트레히트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평생 사제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자유사상가이며 저술가로 기억할 뿐 사제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는 자신의 청년기를 보낸 신학교 생활을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병약하고 섬세했던 그는 자신이 다녔던 몽테큐 신학교를 "침실은 건강에 해롭고, 벽은 얼음처럼 차고 삭막하게 회칠돼 있다. 거의 화장실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식초 같은 신학교'에서는 병에 걸리든지 죽어버리든지 하지 않고는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병을 빌미로 학교에서 빠져나와 가정교사와 보습교사로 살아갔습니다. 

에라스무스와 우신예찬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비굴한 헌사와 아첨의 글을 써주었습니다. 그런 편지들을 모으면 청원하는 글의 참고서가 될 수 있을 만큼 잘 쓰고 내용도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차한 상황 속에서도 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 했습니다. 점차 문필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고위 성직자가 되어 통치자의 공문을 다루는 영주의 궁내관이기보다는 몇 푼의 돈을 받고 일해 주는 영주의 상담자로 남았습니다. 그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유목민처럼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로 옮겨 다니며 아주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부유하지도 않게 지냈습니다. 다만 그는 책을 사랑했습니다. 책은 조용했고, 폭력성이 없으며, 교육받은 자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쓰고 디자인하고, 인쇄소에서 나온 덜 마른 잉크 냄새를 맡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헌사와 아첨의 글을 썼던 것도 대부분 책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선을 구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참람한 현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의 분노와 질식할 것 같은 비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교회 역시 보았습니다. 당시 교황 율리우스는 사도의 가난함 대신 사치와 흥청거림으로 주교들을 호위병처럼 거느린 용병대장과 같았습니다. 당연히 그 시대의 진지한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치에 빠진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항의들을 일축했고, 우호적인 항변마저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항의했던 사람들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화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성물(聖物)장사와 베드로대성당을 짓기 위한 면죄부를 판매하는 상인들에 대한 분노는 노래가 되어 민중들에게 불리거나 피를 빨아먹는 거대한 거미로 그려진 교황의 초상화가 담긴 유인물이 손에서 손으로 몰래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시대상을 천재적인 대담성과 능란함으로 검열관의 눈을 피해 알리면서 갖가지 미묘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가 말한 것들의 아주 적은 일부만 말했더라도 화형장의 제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뛰어난 현실감각을 지녔습니다. 그런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친구였던 토마스 모어의 별장에서 쓴 책이 바로 <우신예찬>입니다. 익살스럽고 명쾌하게 그는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풍자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매함 부인'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며 지고하신 신부님, 교황님께서 그리스도의 삶을 닮으려는 일에 전심전력하신다면, 그리고 가난을 견디시려 노력하시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을 참으시며, 모든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경멸을 공유하신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이 분들보다 더 많은 한탄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현명함이 이 분들의 정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점령한다면 이 거룩하신 신부님들께서는 얼마나 많은 보물들을 잃게 될까요! 그 엄청난 부, 하느님의 그 명예, 수많은 고관대작직의 분배, 셀 수도 없는 사면, 그토록 다양한 세금, 향락, 쾌락의 자리인 불면의 여러 날 밤, 단식, 기도와 눈물, 그리고 예배와 수천 가지 다른 힘겨움이 대신에 들어서게 되겠지요."

그는 복음의 본질로 되돌아가 독단적인 교리 아래 숨어 있는 그리스도를 끄집어내 형식에 질식당하고 있는 교회를 정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처럼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폭력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건함의 본질이 예배형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신앙은 오직 우리 마음과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성인숭배나 성지순례, 시편낭송과 스콜라신학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인간적이며 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성인을 숭배하고자 성인의 무덤을 순례하며 촛불을 가장 많이 켜는 자가 아니라 자기 삶 속에서 성인들의 경건한 삶의 방식을 모방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모든 종교의식을 정확하게 준수하고 기도, 교회력에 따른 엄격한 종교의식을 지키는 것보다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애를 쓰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삶이 수도자나 성직자들 뿐 아니라 모든 민중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밭을 갈면서 성서를 읽어야 하며, 직조공들은 베틀에 앉아서도 성서를 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성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사랑하는 하나님이 폭력과 분열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장 귀중한 원칙으로 존중하였습니다. 그는 이성의 법칙에 따라 당시의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그가 의도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루터도 쯔빙글리히도 칼빈도 그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쇠주먹으로 펜을 쥔 연약한 에라스무스의 손이 조심스럽게 이루려 했던 개혁을 부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칼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 않은 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다시 한 번 갈라졌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유럽세계는 가톨릭과 개신교, 남과 북, 게르만인과 로마인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교황파와 루터파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교회와 복음을 화해시키려던 에라스무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습니다. 둘 다 의미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둘 다 광신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정함과 하나 됨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양 편에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개신교도들은 그의 이름을 저주하였고, 가톨릭은 그의 모든 책을 금서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으로 종교전쟁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쟁터의 암호가 되었고 군사행동의 깃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들은 복음이라는 말을 전쟁터의 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전통이 되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죽기까지 양 편에 폭력을 중지하라는 평화의 글을 쓰다가 바젤에서 평범한 시민의 옷을 입고, 세속의 명예도 없이 고독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죽어가며, 마지막 굳어가는 입술로 어린 시절 배웠던 고향의 언어로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더듬거리며 남겼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 않은 길'인 에라스무스의 길이 그리운 것은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원칙, 하나님은 폭력과 분열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제2의 종교개혁은 필요합니다. 제2의 종교개혁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처음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피상적인 개혁이 되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만 나뉘어 분열될 것입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두 편 모두를 존중하고, 둘 모두 광신에 빠져 있음을 알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이성의 법칙으로 복음과 교회를 화해시키는 그런 종교개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2의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의 길을 따르는 종교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의 기도를 읽으며 어쩌면 그가 자기소임을 다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 말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한한 인간인 우리들은 천성적으로 먼 곳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에라스무스는 바로 그 먼 곳을 바라본 것이 아닐까요, 그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해 그토록 자기 자신을 지우고, 비우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며 저도 에라스무스의 기도를 드려봅니다.

최태선  tschoi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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