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우에게 아버지의 흔적은 없을까?

계속해서 언론의 관심을 받던 박근혜 대통령측 대리인단 김평우 변호사의 변론도 이제 끝났다. 탄핵 재판 중에 세간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던 이유는 그의 변론 태도 때문이었다. 김 변호사는 박 대통령 대리인단에 합류하기 전에 이미 원로 법조인들과 함께 '박 대통령 탄핵에 반대한다'는 의견광고를 일간지에 냈었고 '탄핵을 탄핵한다'라는 책을 발간했었다. 이 책은 미주지역 한인 일간지 전면 광고로 실리기도 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임기말 단임제 대통령 쫓아내기'가 부끄럽지 않나?"라는 부제의 이 책에서 김변호사는 "이번 탄핵은 대한민국 헌법을 김일성의 주체사상으로 바꾸려는 대한민국 뒤집기 반역 운동의 한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대리인단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뒤에 그가 쏟아낸 말들에서 '변론'을 찾기는 힘들었다. "조선을 멸망시킨 당쟁이 대한민국에서 다시금 시작됐음을 직감했다", "여자가 머리 고치는 건 여자가 밥 먹고 옷 입는 거와 같은 생활의 일부", "특검이 하는 걸 보면 '대한민국이 망할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회가 동서고금에 없는 섞어찌개(탄핵 사유) 13가지를 만든  북한식 정치 탄압이다. 국회가 야쿠자냐" 등에서 그가 정말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인지 갸우뚱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기 중고 졸업, 서울법대 수석졸업, 하버대 로스쿨 수료의 화려한 경력이 그를 수식한다. 평준화 이전의 고교 서열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경기'는 지금의 특목고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재 집합소였다. 그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 만을 밟은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의아해 하는 까닭이다. 탄핵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김평우는 이미 알려졌다시피 한국의 문호 김동리의 아들이다. '사반의 십자가' '무녀도', '등신불' 등 수많은 명작을 쏟아낸 김동리는 누가 뭐래도 한국 근대 문학의 대표작가다. 문학을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으로 나누는 나라가 한국 말고는 없겠지만 어쨌든 김동리는 순수문학의 거두였다. 

부모를 비롯한 환경으로부터 한 사람의 성격 형성 과정을 추정하는 작업이 옳은가에 대한 이론들은 많다. 어떤 이는 타고난 '생득'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환경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교육 심리학자가 아닌 입장에서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족을 비롯한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 김평우와 작가 김동리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작업은 매우 흥미로울 수 있다는 전제에서 김동리를 다시 살펴 보았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구분 자체가 독특한 구분법인데 '순수문학'을 이끌었던 소설가로는 김동리, 시인으로는 서정주, 평론가로는 조연현(1955년 현대문학 창간)을 꼽을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친박정희 계 인사였다. 친박정희는 순수문학,  반박정희는 참여문학으로 나누었다고 말해도 웃어 넘길 수 없는 것이 한국 문학계의 어두운 모습이었다. 한겨레 신문의 종교전문기자 조현의 본명은 조연현인데 어느 날부터 조현으로 이름을 바꾸어 쓰고 있다. 평론가 조연현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강준만이 쓴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 편 2'에 나오는 문학평론가 김우종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독재체제를 만들고 민주주의를 영원히 말살해 나가고 있을 때 한국 문인협회장 김동리는 전국 문인들에게 왕복엽서 한 장씩을 발송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의 의사 표명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었다. 찬성과 반대의 두 칸 중 하나에 동그라미를 쳐서 엽서를 반송하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대답이 없으면 찬성으로 간주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으며 이를 위반하면 징역 15년 형의 중형에 처하도록 긴급조치법을 발동해 놓고 일부 학생들은 군대에 의해서 체포 고문당하고 있었다. 이런 체제 속에서 15년 징역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대칸에 동그라미를 쳐서 보내 줄 사람이 어디 있었으랴! 그러니까 몽땅 찬성이 된 것이다. 어용기구로 타락한 문인협회의 회장이 실천한 이 여론조사 방법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권력에 아부하는 데 가장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엽서를 반송하지 않으면 찬성으로 간주한다는 김동리의 논리적 비약은 김평우의 변론과 많이 닮아 있다.

김동리와 김남주 시인과의 관계도 유명하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구속된 문인들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 김동리가 "김남주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므로 절대 석방돼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는데 이 발언으로 중앙대 학생들의 반발이 뒤따르자 김동리는 명예 교수직을 그만 두어야만 했다.

이처럼 보수정권의 안위를 위해 앞장 선 부자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동리는 세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첫 번째 부인이 김월계로 이들은 1940년 결혼했다가 1966년 이혼했다. 그런데 두번째 부인인 작가 손소희와는 1948년 재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48년부터 김월계와의 법적 이혼이 이루어진 1966년까지는 손소희와사실혼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먼 그대'로 유명한 작가 서영은과는 30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1987년 결혼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내연관계는 이미 20여년을 지속해 온 것으로 밝혀져 당시 충격을 주었었다.

1945년생의 김평우는 김월계의 소생인데 3살 때 부모의 이별을 경험했다. 이 당시 경험이 그의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는 김변호사가 서영은에게 퍼부었다는 근거가 불투명한 악담이 떠돈다. 시사플러스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김평우는 김동리의 사망 후 재산 분배 과정에서 서영은에게 "너는 내 아버지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요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는데 시사플러스도 이 근거를 SNS라고 밝힐 뿐이어서 사실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서영은의 인터뷰에는 "손소희는 김동리와의 잠자리를 싫어했다" "우리(김동리 서영은)는 몸이 잘 맞았어요" 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서영은이 20대 때 김동리와의 세번째 만남에서 잠자리를 함께 하는데 김동리는 "여자는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데 몸도 마음도 다 주는 거라는데"말로 다가 왔다고 한다. 이 또한 서영은의 회고에 따른 것이다. 

1995년 별세한 김동리는 김월계와 합장되는데 김월계 소생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식들에게 김월계는 이른바 '정실(正室)'이었던 것이다.

유신정권하에서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진만이 그의 장인이며 동부그룹의 대표 김준기가 처남이다.  처가까지 '화려한' 그는 당뇨병을 앓으면서까지 아버지 김동리가 존경했던 박정희의 딸을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결국 박근혜를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김기대 편집장 / <New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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