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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배제의 시대, 예수에게 돌아가자[인터뷰]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강남순 교수

[미주뉴스앤조이 = 경소영 기자] 12년 전, 감리교신학대학의 성차별적 결정으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여교수가 있다. 2년 넘게 투쟁했다. 국가인권위가 감신대의 재임용 탈락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리고 대학에 재임용을 권고했지만, 학교는 끝내 사과하지도 재임용도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오직 실력으로 평가받아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의 브라이트신학대학원의 부교수로 임용되어 2006년 출국했다.  

현재 브라이트신학대학원 종신교수로 코스모폴리터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등을 가르치고 있는 강남순 교수 이야기다. 세상은 그를 ‘위험한 교수’라고 부른다. 강 교수가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정죄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두어 번 한국을 방문해 공개 강연과 출판 관련 행사도 종종 한다. 그런데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강연장 대관이 취소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그는 늘 '예수라면 분명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15일 열린 성소수자 부모 모임 세미나에서 강남순 교수는 "연민없이 희망은 없다 : 혐오로부터 연대의 정치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기독교인에게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돕는 것’은 예수 사랑의 실천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예외다. 교회에서는 성소수자 혐오와 배제가 만연하다. 교회가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 시대에 ‘위험’한 존재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5일,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처음으로 미국 버지니아에서 열렸다. 강 교수는 세미나의 주 강연자로 초청받았다. 점심 장소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탓에 사람들이 평소 잘 쓰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이 강 교수를 수식한다. 철학에 문외한이라 나름의 긴장이 되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수님”이라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돌아온 그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다 같은 사람인데, 영광은 무슨. 우리 앉아서 이야기해요.”

교수나 목사를 만날 때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나 보다. 돌아보면, 이미 권력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이러한 모든 위계질서를 부정한다. 신은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지었다. 그 평등성을 파괴하는 것이 사회의 불의와 억압이라고 말한다. ‘정의와 평등’이 바로 그의 학문적 관심의 화두이기도 하다. 

미국 전역에서 성소수자 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 교수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밤늦도록 이어진 가슴 뭉클한 대화에서 그는 한 명 한 명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온종일 그들과 함께 웃다가 울었다. 그들을 보며 강 교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든 행사가 끝난 후 그와 마주 앉았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눈물이 언어가 된 이들을 바라보며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주 강사로 강연했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이어진 행사에 참여해 성소수자 부모, 자녀와 함께 울고 웃었다. 각 사람의 고통스러운 세월이 하루에 응축되어 눈물로 터져 나왔다. 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눈물 없이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강사이자 같은 한국인 동료로서 매우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미국 안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적 지향뿐 아니라 인종 문제까지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내가 대학에서 만나고 관계하는 성소수자 그룹은 ‘백인’이 주류를 이룬다. 그 안에서도 가장 우세한 목소리는 ‘남성’ 백인 성소수자이다. 게다가 기독교인이 아닌 무슬림 등 타종교인은 계층이 더 내려간다. 즉, 기독교인이면서, 남자, 백인일 때 성소수자 그룹 안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기독교인 남성 성소수자가 우세하다는 말인가.

당연하다. 기독교만큼 성소수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종교단체가 없다.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에 따라 그룹을 이루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 불교나 이슬람, 유대교에는 이러한 세력 형성이 되어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성소수자 이슈 하나에 인종, 젠더, 종교가 다 연결되어 있다. 물론 교육을 잘 못 받고 가난한 성소수자는 더 차별받는다. 이번 모임에서 들었던 복합적인 감정은 이러한 문제들로 인한 것이다. 성소수자 자녀가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부모, 자녀와의 화해와 갈등 해소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들이 앞으로 접할 중층의 장애물들이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대면하게 될 처절한 현실을 생각하니 굉장히 가슴 아팠다.

성소수자 외면한 교회, 예수에게 돌아가자

아직도 대부분 교회가 성소수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 있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교인은 그렇지 않은 교인과 대화하기조차 매우 어렵다.   

가부장제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가부장제의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오히려 딸을 더 차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두고 “저러니까 여자가 더 문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현상의 뒷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하게 됐을까”를 질문해야 한다.

이 도식을 ‘성소수자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는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 성소수자에게 “죄인이다. 지옥 간다”라고 말하는 교인이 많다.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교회들이 성서 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것을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성소수자를 지지하는데 저 사람은 왜 반대만 할까. 너무 나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악마화’다. 그것은 유혹이다. ‘저 사람은 희망이 없다. 대화를 차단해야지’라고 하는 건 가장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우월적 태도를 버리고, 성소수자는 병이 든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미 과학적, 정신 의학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분석은 오래 전에 끝났다. 정신 질환 진단 매뉴얼에서 ‘동성애’가 삭제된 것이 1973년이다. 성소수자 문제는 병이 아닌 ‘지향’이라는 결론이 났다. 과학, 의학은 종교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꾸 이분법적인 사고를 적용하니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대화해야 한다. 

크리스천에게 성소수자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그러나 대화보다는 논쟁으로 가기 쉽다. 

성서에 대한 논쟁으로 가면 끝이 없다. 성서는 쓰여진 당시 문화, 정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이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것은 ‘예수는 성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타자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고,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는 19세기에 등장했다. 따라서 성서가 쓰여진 시대에는 남성의 동성애와 여성의 동성애를 포함하는 ‘동성애’는 물론 현재 우리가 논의하는 다양한 성적 정체성(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트랜스 젠더 등)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을 때이다. 예수가 인간의 성적 문제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큰 죄라고 했다. 인간의 성적 관계 방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예수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성적 정체성에 관하여 성서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라는 논쟁보다는, 예수로 돌아가서 그가 강조했던 이웃 사랑의 메시지에 대한 대화로 이끌어 가는 것이 좋다.

예수는 성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타자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고,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가 말하는 '예수에게 돌아가자'라는 것은 바로 이 메시지에 주목하자는 의미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차별과 배제의 시대

교회는 공동체를 강조한다. 개별보다는 집단을 중시하기 때문에 ‘다름’이 허용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문제 뿐 아니라 여러 이슈에 관한 질문 자체가 일탈로 여겨진다. 그것이 지금 한국 교회 실패의 원인이 아닐까.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개별보다 집단을 더 강조하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학연, 지연으로 한 사람의 삶이 규정된다. 교육도 아이의 개성보다는 집단 적응력을 더 강조한다. 삶을 성적순으로 평가한다. 물음표를 박탈한 사회이다. 교회는 정치, 문화, 교육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한국 사회의 문제들이 모두 작동될 수 밖에 없다. 교회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은 곧 한국 사회의 일원이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사고, 학연과 지연에 의존한 관계가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된다. 질문은 곧 ‘버릇없음, 신앙없음’이라는 평가로 이어진다.

교회 안에 질문과 토론 문화가 없다. 여성, 성소수자 등 약자를 향한 차별과 폭력이 계속되지만 ‘기도와 용서’라는 말만 강조할 뿐이다. 

교회가 권력 지향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편한 방법이다.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 등 소수자에 관심을 두는 교회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교회를 소위 ‘구원클럽’으로 이해하는 크리스천이 많기 때문이다. 출석체크, 헌금체크 등 굉장히 비성서적인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누군가를 돌봐야하는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면 힘드니까, 그저 성공과 축복,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말이나 듣고 싶은 것이다.

수능이 다가오면 교인들이 하나 둘 새벽기도에 모여든다. 교회는 수능 대비 특별새벽기도회를 한다. 누구는 대학 입시에 떨어뜨리고, 누구는 합격시키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내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면 다른 아이가 떨어진다’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실은 굉장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교회를 가는 것이다. 신학대학에서 배운 목회자에게도 결국 ‘성공’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다양성이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교단이 굉장히 많다. 때문에 다양한 신학을 용인하고 있을 것 같지만, 교단 간의 차이점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그나마 감리교가 한때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올해 초에 성소수자를 인정하면 출교, 면직 등 강력한 재제가 가능한 입법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보는가.  

지금 한국 교계는 진보, 보수의 분류가 의미없다. 감리교가 진보라고 평가받은 측면은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 목사 안수를 제일 먼저 허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목사 안수를 받은 14명의 여성이 모두 선교사였다. 1955년 한국 최초 여성 목사가 탄생했지만, 장로교에서와 같이 여성 안수 문제를 감리교 여성들이 스스로 투쟁해서 얻은 것도 아니다. 또한 여성안수가 일찍 허용되었다고 해도, 여성과 남성 목회자가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외적인 요소로 진보인지 아닌지 평가할 수 없다.

주요 결정 기구에서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감리사, 감독 모두 남자다. 감리교 역시 남성 중심이다.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큰 명예가 주어진다. 그곳에 여성은 없다. 여성 목회자의 고통이 크다. 성소수자 문제는 단지 외적인 성적 정체성에 관한 반대가 아니다. 성소수자의 존재가 가정이나 사회적 규범과 가치는 위협하고 파괴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가정의 가치를 위협한다고 여긴다. 성소수자가 사회적 규범을 깬다고 생각하니까 피켓들고 반대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그것을 ‘창조원리를 배반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창조원리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바로 공부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해보자. 결혼해서 아기 안 낳는 부부가 많다. 이 현상에는 여러 정황과 이유가 있다. 고아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사람, 인공수정으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사람, 아이를 양육하는 성소수자 부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방해하는 것인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한국에서 최근 ‘낙태금지법’이 큰 이슈다.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몸에 대한 권리를 외치고 있다.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12일 오전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낙태를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규정한 입법을 철회하라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불꽃페미액션)

여성들은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낙태논쟁이 ‘생명옹호 (pro-life)’와 ‘선택옹호(pro-choice)’이라는 두 개의 대립적 입장으로 나뉘는 것은 오류이다. 낙태를 선택하는 이들이 생명을 하찮게 여기거나, 반대로 낙태를 반대하는 이들이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려고 낙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복잡한 사회적 정황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낙태이다. 신나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낙태는 여성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낙태를 할 수 밖에 없는 다양한 여성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외부에서 이래라 저래라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여성의 몸을 식민지화 하는 것이다. 점령당한 식민지 사람들은 자유를 잃는다. 그런 의미다. 국가가, 남성이, 법이 여성이 본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자율적인 선택을 못하게 하는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없다. 

낙태에 대해 하나의 기독교적 입장은 없다. 각 교단마다 다르다. 성서에는 낙태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다만 생명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다. 사회 제도적, 개인적, 심리적으로 생명이 생명일 수 있도록 돕는 방안 마련이 중요하다. 그것이 생명 사랑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다양한 제도 없이 무조건 낙태하지 말라는 것은 폭력이다.

이 사회에서 중요성의 위계를 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힘있는 남성이다. 삶의 절실한 문제에서는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가치 질서는 각자 다르다. 어떤 이는 인종 문제, 어떤 이는 성소수자 문제로, 어떤 이는 사회적 계급의 문제로 자살한다.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동시 다발적으로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결국 권력의 문제이다. 누구의 시각으로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되는지 지켜 보아야 한다.

인식의 변화를 위하여

사회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여전히 소수자와 약자에게는 가혹한 것이 현실이다.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

인식의 변화를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거창한 학문적 연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에 대해 알고 싶으면 관련 책을 읽는 것이다. 조금만 자료를 찾아봐도 성소수자에 대한 객관적 지식, 이론을 습득할 수 있다. 그것이 시작이다. 아는만큼 보이기도 하고, 경험할 수도 있다.

나도 독일에서 공부할 때까지는 개인의 경험이 학문, 이론과 연결된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런데 아이를 기르며 매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이러한 개인적 고민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양육의 필요성, 임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문제점, 제도적 보장의 중요성 등에 대해 이론적으로 알게 되니 내 문제가 비로소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학문은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 정치, 종교적 문제로 연결이 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바로 페미니즘 세미나였다. 세미나에서 만난 한 게이 남학생과 한 학기를 보내고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그 학생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그건 ‘이성애가 정상이고 기준’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판단도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권력관계 탓이다. 책을 보고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다. 이론은 자신을 이해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을 깊이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개인 경험들이 더 큰 사회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론 공부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페미니즘 역시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이다. 거친 말이 오고 가기도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가 만연해 있는듯하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차별, 혐오의 문제와 연결된다. 가장 기본이 되는 학문이자 운동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가장 큰 오해는 ‘페미니즘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얘기할 때 어려운 개념이라는 생각에 감히 말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이유로 굉장히 쉽게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그 어떤 이론보다 훨씬 복잡하고 복합적인 운동이다.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여자와 남자의 생물학적 차이가 본질적인 차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고, 그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에 집중해야한다는 입장이 있다. 그 외에도 세밀한 분류들이 존재한다.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 및 여권 신장을 위한 여성들의 노력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지속, 발전되어 왔다. 오랜 역사를 가진 페미니즘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차별, 혐오의 문제와 연결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학문이자 운동이다.

다양한 차별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다.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전략들이 있다. 나쁜 페미니즘, 착한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없다. 방법이 다를 뿐이다. 사회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글과 강연, 이론 분석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퍼포먼스 등 예술을 통해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페미니즘은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예술에 모두 연결되어 있다. ‘침실에서부터 백악관까지 일어나는 것’이 성차별이다. 예를 들어 인종 차별 문제는 공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난다. 사적인 공간에서 같은 인종끼리 차별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계급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차별은 가난한 가정 안에서, 부자들끼리의 만남에서, 사적, 공적인 모든 공간에서 일어난다. 그만큼 복잡하고 인식하기도 어렵다. 여성이라고 자동적으로 성차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미세하게 작동하는 성차별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여성에게 표면적으로 잘해주는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다. 대중매체에서 끊임없이 투사하는 페미니즘은 너무 단순해서 복합적인 문제를 잘 보지 못한다. 인식을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다. 노동운동을 할 때도 가장 먼저하는 것이 의식화 운동이다. 여성 운동도 같다. 차별받고 있지만 인식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페미니즘의 렌즈를 끼면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교과서에 나오는 여성은 남성중심적 사고방식 안에서 그려진 모습이다. 언론에 나오는 종교인 모임의 사진에 여성은 한 명도 없다. 영화를 보거나, 교회 공과책을 봐도 이것이 왜 가부장제도를 강화시키는가에 대해 보이기 시작한다. 

복합적인 사회 문제에 퍼져있는 다양한 차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페미니즘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다보면 성차별 외에 다른 차별과 억압의 문제까지 제대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긴다. 

실로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차별, 혐오, 배제가 존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사회 구조 안에서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진보할 수 있을까. 

타인의 얼굴을 보라.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가장 근원적으로 파악한다는 의미다. 옷이나 신발을 걸친 다른 부분을 보면 이미 편견이 작동된다. 그러나 얼굴만 오롯이 보면 그 사람의 고통을 읽어낼 수 있다. 고통의 요인을 없애기 위해 타인과 연대하는 것이 시작된다. 그것이 연민이다. 

타자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에는 많은 이론이 필요없다. 연민의 대상을 확장하다보면 성소수자 뿐 아니라 인종 소수자, 사회계급의 소수자 등 다양한 소외를 경험한 사람까지 껴안을 수 있다. 한 사람의 존재를 편견없이 보는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난 타자의 얼굴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이론으로 알았고, 삶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도 가능하면 그룹으로 만나지 않고 일대 일로 만난다. 

예수도 그랬다. 예수는 대단한 설교를 하지 않았다. 그저 약자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했다. 예수는 삭개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집에 머물렀다. 삭개오는 별안간 변화의 주체가 된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한다. 예수는 삭개오를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삭개오의 변화에는 종교적 설교가 전혀 필요치 않았다.

'예수로 돌아가자'는 의미는 이런 것이다. 타종교를 믿다가 교회를 다니라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수는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을 뿐이다. 설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해 나가야 한다. 내 이웃이 어떠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다.

경소영  soyoung@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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