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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보다 잘난 남자

노크도 없이 문이 확 열리더니 문짝만한 얼굴이 들여다 보고 있다. 아닌 밤중에 불쑥 나타난 홍두깨처럼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런데 주인은 놀라기는 커녕 반가워서 소리쳤다.

“거, 이승룡선생이 아니오?”

몰래 훔쳐먹다 들킨 소년처럼 되래 홍두깨가 움칫 놀라 물었다.

“아니? 우리가 처음인데 어찌 내 이름을 아시오?”

“천하에 이승룡말고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주인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자 홍두깨도 달려들어 얼싸 안았다.

“하하하하, 허허허허”

양산박의 두령들이 만나는 장면이 아니다. 대개 양산박의 두령들은 원수로 만나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친구가 되어 양산박으로 들어가 두령이 된다. 시골교회 전도사 시절 호남 거인 이승룡을 낚아 올린 전도 무용담이다. 다음 주일에 그가 교회로 나왔기 때문이다.

1970년 첫 목회지로 발령받아 내려와 보니 익산(이리)근처 시골 석암교회였다. 당시 농촌은 5개리(里)에 교회가 하나 꼴로 있었다. 그런데 석암리는 교회가 둘이었다. 100여 호가 사는 마을에 교회가 둘이라 아주 골치 아픈 목회지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자. 그러면 기적이 일어나 부흥되던가, 아니면 목회자 그릇이 커져 넓은 곳으로 옮겨지겠지!’

교인 심방을 끝내고 지역 유지(有志)들을 찾아나섰다. 먼저 관동부락에 사는 호남 거유(巨儒) 이동호옹을 방문했다. 대나무 숲속에 기와집이 있었다. 수양버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마당끝 정자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유비에게 방룡(제갈공명) 방통을 천거해 준 낭야 숲속의 기인 수경 선생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경 선생이면 뭐하나? 내가 유비가 못되는데.’

30대 초 전도사의 인사를 받은 노인의 답례가 정중했다.

“찾아주어 감사합니다. 이 동네에 교회가 둘이나 있어도 목회자가 우리집을 찾아주기는 선생이 첨입니다. 이승룡만 전도하면 됩니다. 익산에 그만한 인물이 없지요.”

이승룡 씨를 찾아갔다. 걸어서 20분 거리 정동마을에 이씨 집이 있었다. 2000평 대지 위에 다섯 채를 연결한 대저택이었다. 연못과 꽃밭이 있는 장원(莊園)급 집이었다. 속으로 ‘이리 오너라’ 를 외치며 문을 두드렸다. 일꾼이 문을 열어줬다.

“길가는 사람입니다. 집이 궁궐처럼 으리으리하고 아름다워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내말을 전해들은 안주인마님이 섬섬옥수로 달려 나왔다.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주더니 대청마루에 감주와 떡상을 차려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화여전을 나온 미녀였다. 남편 이승룡은 집에 없었다 그는 수백마지기 농토에 서울과 성남에 땅이 많은 부자다. 이리 삼남극장을 운영하던 한량이었다. 봄이면 일꾼들에게 농사를 지시하고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미녀사냥을 즐겼다. 가을에 돌아와 수확을 점검한후 쌀을 한트럭 싣고 겨울사냥을 떠난다. 그래서 집에 없다.

난 몰래 이승룡씨를 태신자(胎信者)로 등록해 놓고 새벽마다 기도했다. 아기는 모태에서 10개월 만에 태어나는데 나는 태신자를 일년 만에 만났다. 이 씨가 쌀을 한 추럭 실어내려고 찾아온 것이다. 집안 어른 이동호 옹을 만나러 가는데 길옆에 새 교회 건물이 보였다. 그해 여름 석암교회는 새로 교회당을 지었다. 무심코 강단 옆방의 문을 열다가 나와 마주쳐 버린것이다. 장군의 체격에 큰 바위얼굴. 영웅호걸의 기상이 역력했다. 이승룡이라구나! 난 계속 뻑 치고 나갔다.

“이승룡이 이철승보다 훨씬 낫소이다. 인상이며 관상은 물론 체격과 인품이 한수위로군요.”

젊은 시절 이철승

내가 북을 쳐대자 그는 장고소리로 신나게 응수했다.

“그 말이 맞소. 전주북중 시절 내가 철승이와 한반이었소. 난 검도선수 철승이는 역도 선수였는데, 우리는 라이벌이었지. 힘에는 힘, 공부에는 공부, 여자에게는 인기하며 철승이가 날 이기지 못해 앙앙불락이었지.”

당시 이철승은 신민당 40대 기수(이철승 김영삼 김대중)의 선두주자였다. 눈과 코가 크고 입이 튀어 나온데다 역도 선수 몸집이라 좀 무식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김영삼보다 글을 잘 쓰는 지성이다. 한국의 지도급 인사중에 이철승과 안현필(기초영문법)만큼 글을 잘 쓰는 명사를 본적이 없다. 알기 쉽고 재미있고 감동을 주는 작품스타일의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눈에 봐도 이승룡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이철승보다 낫다. 이철승은 고교졸업 후 보성전문으로 가서 정계로 뛰어들었고 이승룡은 일본 유학을 했다. 4.19 후 이철승의 추천으로 남원군수를 하다가 5.16으로 그만뒀다. 예술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어 미녀사냥 까투리사냥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지나가는 길에 교회문을 열다가 나와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다음주일부터 교회로 나온것이다. 그는 더 이상 미녀사냥길을 떠나지 않았다. 난 목사 안수를 받고 난생 처음 세례를 집례했다. 제1호가 이승룡, 제2호가 익산군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 김숙자였다. 후에 장로가 된 이승룡은 수요일밤 예배가 끝나면 젊은 목사와 밤길얘기를 즐겼다.

“이 목사님의 설교를 시골에서 몇사람이 듣고 마는게 아깝습니다. 이리에 사는 내 친구들이 천명모이는 신광교회 삼광교회 장로들이에요. 친구 따라 가서 들어봐도 별것 아닌데....”

그때는 내가 봐도 설교를 잘했다. “정착자의 비극”이니 “비극의 탄생”같은 반체제 설교를 즐겼기 때문이다. 이승룡의 칭찬을 들은후 잘하는 설교를 때려치웠다. 40일 금식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30일 지나고 사경(?)을 헤매는데 이동호 옹이 찾아왔다. 이승룡을 소개한 수경 선생말이다.

“이 선생의 얼굴에 광채가 뿜어 나오는군요. 내적 자유 내적능력을 체험하시어 득도해탈하셨나 봅니다.”

석암교회 3년을 끝내고 부산, 서울, 미국 뉴욕을 거쳐 지금은 돌섬이다. 이수경 선생은 물론 이승룡, 이철승 모두 고인(故人)이 됐지만, 추억은 아름답다.

지난 2월에 사망한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이계선  newsm@new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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