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SBS 스페셜 <요즘 젊은것들의 사표>가 꽤 화제였다. 대기업에 입사해 놓고도 꿈을 찾아 떠난다는 젊은이와 스펙은 좋은데 막상 뽑으면 쓸 인재는 별로 없다는 인사부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는데, 무게 중심은 후자 쪽에 더 치우쳐 보였다.

상당 부분 내 얘기이기도 했지만, 특별히 코멘트를 달지는 않았다. 사실 올해 초 대기업을 나올 때는 ‘대기업을 나서며’ 같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왜 내가 떠나는지를 정리해서 쓸까 했지만 내가 무슨 출사표 던지는 제갈량도 아니고 웃기는 짓인 거 같아서 그만뒀다. 실제 내가 대기업을 나와서 얼마나 만족할지 알 수도 없었고.

그래도 역시 대기업을 나온 사람으로 이 주제에 대해 한마디 보태고 싶은 바가 있다. 대기업에서 퇴사하는 젊은이와 이를 보고 혀를 차는 사람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서로 경험한 세계가 달라서 어쩔 수 없이 가치관 혹은 세계관이 달라져 버린 세대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사표를 내지 않은 이유: 아버지 세대의 일생

우리 아버지 역시 내가 대기업을 다니던 시절 늘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할까 봐 걱정하셨다. 그런데, 내 생각에 아버지 세대, 부장님 세대가 ‘직장’에 충성하는 것은 그분들도 사실 만만치 않은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고도성장기’를 지나온 세대와 우리 세대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출처: 메디컬월드뉴스)

이분들은 늘 “우리 때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라는 말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버지 세대는 고도성장기에 어쨌든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 회사가 쭉쭉 성장하는 걸 체험한 세대다. 내가 하는 일이 꼭 나에게 맞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실제로 잘되고, 내가 몸담은 회사가 성장하는 걸 체험하게 되면 나도 따라 성장한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게 된다.

따라서 회사의 성장이 100일 때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10-15뿐이라도, 이분들은 충분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적성은 아니라도 그렇게 일하는 게 ‘재미’있으니 회사에서 마련해 주는 법인카드로 또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거운 회식도 벌이면서 일터와 놀이터를 계속해서 일치시켜 나갔다. 그렇게 구축된 야근과 회식, 주말출근이라는 무한루프를 가족에게는 “내가 가족을 위해 내 한 몸 바쳐 일한다”로 포장한다.

물론 아버지 세대 100%가 그렇다는 말도 아니고, 아버지 세대의 일생이 100% 포장된 것이라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가 직장에 인생을 ‘올인’ 한 것은 절대 가족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인들 스스로 일하면서 느끼는 (자아실현은 아니더라도) 성취감, 직위가 올라가면서 점차 상승하는 직장 내외 권력, 점차 올라가는 임금과 엄청난 고금리로 차곡차곡 아파트 평수와 자산을 늘려가는 재미, 그에 따라 가족을 부양한다는 자부심과 가족 내에서도 누리는 권력 등을 충실히 경험하고 누린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식과 어린 세대들이 회사에 충성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굳이 꿈을 좇지 않더라도 회사는 충분한 성취감과 생활의 토대를 제공하고, 시간이 지나면 계단을 오르듯 차곡차곡 자산과 권력이 불어나는데 도대체 그 ‘꿈’이 무어라고 회사를, 그것도 대기업을 박차고 나간단 말인가? 이런 관점으로 보면 꿈을 찾아 나선다는 젊은이들이 현실을 모른다며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대기업의 현실에서 ‘혜택’은 거의 사라졌다. 물론 대기업이 누리는 급여와 복지, 계열사가 제공하는 자잘한 혜택들과 금융권 저금리 대출 등은 상당하다. 분명 그것은 큰 프리미엄이다. (나와보니까 더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기성세대가 회사에 다니면서 누렸던 성취감이나 권력 상승, 안정감 등을 이제는 거의 바랄 수 없다. 글로벌 경제 환경 때문이든, 누적된 불합리한 기업문화 때문이든 대기업조차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미 다져놓은 토대 위에서 이런저런 잔재주나 부리면서 이삭줍기를 할 뿐이지 결코 통 큰 성장을 위한 배팅이나 혁신을 하지는 않는다. 안정적인 토대 위에서 그저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를 쓰는 게 대부분이다. 내가 보고서를 쓴다고 해서 무언가 소비자를 위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세상에 나올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는다.

애당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온 것도 아닌데, 회사는 성장도 하지 않고, 무의미한 일만 하고 있는데,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한들 성취감이 생길 리는 없다. 그렇다고 진짜 연봉으로 몇억씩 안겨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생각이 ‘젊은 것’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결국 ‘대기업 사원’도 ‘스펙’일 뿐

일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냐고, 꿈같은 소리로 치부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솔직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은 한 번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껴보지 못했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일이 잘되고 못되고,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순수한 내적 동기로 일을 추진하고, 그걸 받쳐줄 환경이 되면 일하는 것은 분명 아주 재미있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걸 해결해 나가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그리고 헤쳐나가는 여정 자체가 성장의 자양분이다.

이런 성장과 열정의 루트를 차단해 버리는 기업 문화 아래서, 예전처럼 기다리면 기회가 오고 지나보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있을 거라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 기다리라는 조언을 보면 그것은 70~80년 대의 상식이라고 나는 그냥 속으로만 되뇐다. 나는 언쟁을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그저 조용히 사표를 낼 뿐이다.

젊은이들이 꿈을 찾아 대기업을 나오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현재 일하는 방식이 너무 후졌다. 나의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5년 후, 10년 후에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안 든다. 내 직위와 연봉은 오를지 모르지만 내 젊은 시절을 다 바쳐서 부장, 팀장 되어 봐야 그저 임원들 아래 줄서기와 온갖 회의 뺑뺑이만 있을 뿐이라는 게 너무나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신입도 희망퇴직 당하는 시대 (출처: 서울경제TV)

그렇다면, 돈에 내 인생을 저당 잡히지 말고, 어떻게든 내가 조금이라도 더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지금이라도 찾아보자고, 그게 무얼지, 진짜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나가는 것이다. 고도성장기에는 대기업 직장인이라면 인생은 탄탄대로였겠지만, 상시 글로벌 경제 위기인 요즘은 어차피 신입사원도 정리해고하는 시대다. 내가 보낸 시간은 딱 퇴직금만큼만 돌아올 뿐이다. 그사이에 내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지 않으면 대기업 사원이라는 건 진짜 저 어른들이 말하는 쓸모도 없는 ‘스펙’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문화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나의 관점이고, 퇴사는 어디까지나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능력 있는 개인들이 빨리빨리 대기업을 나서서 자기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사실 대기업이 바뀔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은, 진짜 도저히 회사를 운영할 수 없을 만큼 똑똑한 인재들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대기업이 사람을 챙기는 척이라도 할 테고, 그래야 불합리한 기업문화에 대해 논의라도 하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까.

<젊은것들의 사표>를 보는, 아니 직접 사표를 낸 나 자신의 시각은 그렇다. 기성세대는 분명 일하면서 나름의 성취감과 보상을 누렸다. 그런데 그들이 구축한 문화는 경제 변동과 IT 혁명이 발발한 지금은, 불과 20~30년 터울인 지금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윗세대가 누렸던 것을 우리는 전혀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러니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희생이나 다름없다. 바로 절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 젊음과 청춘을 희생하는 것이다.

대체 뭐하러 대기업을 위해 그런 희생을 한단 말인가?

원문 보기 : 인문잡지 글월
본지 제휴 <ㅍㅍㅅㅅ>,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