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 베르트뮐러, 제인 캠피언, 소피아 코폴라

2009년에 캐슬린 비글로우가 여성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기 전까지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 감독은 단 3명뿐이었습니다. 4회에서는 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7인의 미녀>(1975)의 리나 베르트뮐러, <피아노>(1993)의 제인 캠피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의 소피아 코폴라입니다.

10. 리나 베르트뮐러

하얀 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인 리나 베르트뮐러는 이탈리아의 감독 겸 각본가입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미미의 유혹>(1972) <러브 앤 아나키>(1973) <7인의 미녀>(1975) 등이 있습니다. 그녀의 영화들은 대부분 성적 긴장감이 넘치는 정치적인 작품들입니다.

그녀는 1928년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뼈대 있는 로만 가톨릭 스위스 귀족 후손이지만 그녀는 반항심 가득한 소녀여서 카톨릭 학교에서 쫓겨나 아버지가 원했던 변호사의 길을 거부하고 연극학교에 들어갑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기존 체제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페미니즘에 빠져들게 되고 그녀 작품들의 테마로 삼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녀는 유럽을 돌며 꼭두각시 인형 쇼를 합니다. 이후 10년간 그녀는 극단에서 배우, 감독, 극작가로 일하며 실력을 쌓는데요. 여기서 훗날 그녀 영화의 단골 배우가 되는 지안카를로 지아니니를 만나 의기투합합니다.

1962년 그녀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의 소개로 페데리코 펠리니를 만나 <8과 1/2>의 조감독을 제안받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그녀는 <도마뱀>이라는 영화로 감독 데뷔합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한 영화로 그녀는 이후 작품들에도 계속 이 소재를 반복합니다.

이후 지안카를로 지아니니가 주연한 영화 4편을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1975년작 <7인의 미녀>입니다. 이 영화로 그녀는 감독상을 포함한 아카데미상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1978년작 <비오는 밤>과 8년 후 만든 <카모라>는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받았습니다.

<7인의 미녀>

베르트뮐러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그녀의 정치적인 성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이거나 페미니스트이거나 혹은 모두 다입니다. <스웹트 어웨이>(1974)는 부유하고 자유로운 기업가의 아내가 공산주의자인 마초 사내를 만나 사도마조히즘에 빠지는 에로틱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 그녀는 정통적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소년'이라며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영화들은 긴 제목으로 유명합니다. 가령 <스웹트 어웨이>의 전체 제목은 <8월의 푸른 바다에서 보기 드문 운명에 의해 휩쓸리다>이고, 1986년작 <여름 밤>의 전체 제목은 <그리스인 얼굴, 아몬드의 눈, 바질의 향기가 있는 여름 밤>입니다.

또 그녀의 영화 중에는 가장 긴 제목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는 영화도 있습니다. 1979년작 'Un fatto di sangue nel comune di Siculiana fra due uomini per causa di una vedova. Si sospettano moventi politici. Amore-Morte-Shimmy. Lugano belle. Tarantelle. Tarallucci e vino.'으로 무려 179자입니다. 국제적으로 상영될 땐 그냥 <피의 복수(Blood Feud)>라고만 부릅니다.

이후로도 그녀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지만 사실 1990년대 이후 작품들은 예전만 못한 게 사실입니다.

11. 제인 캠피언

<피아노> 촬영장의 제인 캠피언(가운데)과 샘 닐(오른쪽)

1954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태어난 제인 캠피언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감독입니다.

그녀는 배우인 엄마와 오페라 감독인 아빠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뉴질랜드공연인그룹을 세웠고, 그녀는 연년생인 언니와 7살 아래인 남동생과 함께 뉴질랜드 극장에서 공연을 보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극단 단원이 되지 못했고 방향을 틀어 웰링턴의 빅토리아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합니다.

1976년 그녀의 관심사는 미술이었습니다. 첼시아트스쿨에 가기 위해 런던으로 갑니다. 이후 1981년 호주 시드니대학에서 미술 석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공부를 계속합니다. 이때 캠피언은 화가 프리다 칼로, 조각가 요제프 보이스를 좋아해 이후 작품들 역시 이들로부터 영향받습니다. 화가가 되려던 캠피언은 미술관이 너무 적다는 것에 불만을 느껴 좀더 대중적인 영화로 방향을 틉니다.

첫번째 단편영화 <티슈>(1980)를 만든 뒤 그녀는 1981년 호주영화학교에서 공부하며 1984년 졸업할 때까지 몇 편의 단편영화를 더 찍습니다.

그녀는 호주영화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녀가 학교에서 처음 만든 단편영화 <필>(1982)은 1986년 칸영화제에 초청돼 단편영화부문 황금종려상을 받습니다. <열정없는 순간>(1983) <소녀 자신의 이야기>(1984) <애프터 아우어>(1984) 역시 호평받았고요. 졸업 후 그녀는 호주 방송국 ABC의 [댄싱 데이즈]라는 시리즈를 연출하고 이어서 TV영화 <두 친구>(1986)를 만듭니다.

그녀의 데뷔작은 우정과 사랑과 질투로 점철된 초현실주의적인 자매 이야기 <스위티>(1989)입니다. 프리다 칼로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색감이 인상적인 영화였죠. 이 영화로 호평받았지만 사실 제인 캠피언이라는 이름을 더 널리 알린 영화는 <내 책상 위의 천사>(1990)입니다. 뉴질랜드 시인 재닛 프레임의 성장기를 섬세하게 그린 영화로 2시간 2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한 여성의 주체적인 삶이 스크린에 펼쳐졌습니다.

이후 1993년 <피아노>로 그녀는 칸영화제를 비롯해 아카데미 각본상, 호주와 뉴질랜드의 상들을 휩쓸며 커리어 정점을 이룹니다. 홀리 헌터와 샘 닐은 <피아노>로 월드 스타가 되었죠. 마이클 니만의 격정적인 피아노 음악과 뉴질랜드 북쪽 해안 풍경이 그림 같은 인상을 남긴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피아노>

이후 영화들에서는 캠피언의 높아진 인지도가 캐스팅에 드러납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헨리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여인의 초상>(1996)에는 니콜 키드먼, 존 말코비치, 바바라 허쉬, 마틴 도노반 등이 출연했고, <홀리 스모크>(1999)의 주인공은 하비 케이틀, 케이트 윈슬렛이었습니다. 2003년엔 수잔 무어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에로틱 스릴러 <인더 컷>에 도전했는데 로맨틱코미디의 여왕 멕 라이언이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 화제가 됐습니다. 2009년작 <브라이트 스타>는 시인 존 키츠에 관한 드라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았습니다. 2013년 그녀는 [탑 오브 더 레이크]라는 미니시리즈를 만들어 에미상에 노미네이트되며 다시 한 번 재능을 입증합니다.

캠피언은 2013년 칸영화제 단편영화 부문과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연이어 2014년엔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습니다. 그해 캐나다 감독 자비에 돌란은 영화 <엄마>로 심사위원대상을 받고 수상소감으로 캠피언의 <피아노>를 언급하며 "이 영화를 보고 희생자나 대상이 아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강인한 존재로서의 여성 캐릭터를 쓰게 됐다"고 말해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1992년 그녀는 호주 감독인 콜린 데이비드와 결혼해 딸을 낳았는데 그녀 역시 배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영화들은 페미니즘의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평론가 레베카 플린트 마르크스는 "그녀의 영화 캐릭터들에 페미니스트 딱지를 붙이는 것은 그녀 작품의 깊이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12. 소피아 코폴라

소피아 코폴라에게 아버지는 자랑이자 짐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때문에 쉽게 유명해졌고 또 아버지때문에 놀림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실력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녀를 <대부>의 딸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저 소피아 코폴라입니다.

코폴라는 1971년 뉴욕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외동딸로 태어납니다. 딸바보인 아버지는 자기 영화에 딸을 아역 배우로 출연시켰습니다. <대부> 1편과 2편뿐만 아니라 <아웃사이더>에서도 잠깐 등장하는 어린 그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터진 것은 그녀가 <대부 3>(1990)에서 꽤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19살의 코폴라는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의 딸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위노나 라이더의 배역을 대신 차지한 것이었습니다. 연기나 잘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녀는 눈뜨고 보기 힘든 연기를 펼쳐 그해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에서 최악의 여우조연상, 최악의 뉴스타상을 차지하며 오명을 뒤집어씁니다.

이때 코폴라는 다시는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후 <스타워즈 에피소드 1> 등 몇 편에 까메오로 출연하기는 했습니다.)

코폴라는 아예 영화를 하지 않을 생각도 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 다녔지만 중퇴하고 '밀크페드'라는 의류 브랜드를 론칭합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꿈을 접을 수 없던 그녀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합니다. ('밀크페드' 브랜드는 이후 일본에 팔립니다.)

코폴라의 첫번째 단편영화는 <스타를 핥아라>(1998)입니다. 이후 1999년 <처녀 자살>로 장편 데뷔하는데 이 영화는 2000년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며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녀를 재평가받게 만들어준 영화는 두번째 장편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입니다. 스칼렛 요한슨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이 영화로 그녀는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받았고, 아카데미상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카데미 각본상은 제인 캠피언 이후 여성으로는 두번째 수상입니다. 또 코폴라는 리나 베르트뮐러, 제인 캠피온에 이어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세번째 여성으로 기록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2004년 코폴라는 아카데미 위원회에 초청받아 회원이 됩니다. 비로소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세번째 영화 <마리 앙뜨와네뜨>는 영국 역사학자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전기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커스틴 던스트가 앙뜨와네뜨를 연기합니다. 2006년 칸 영화제에 초청받아 상영됐지만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그러나 코폴라는 네번째 영화 <섬웨어>(2010)로 그녀의 실력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재기를 꿈꾸는 범죄 소년에게 우연히 딸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합니다. 이는 미국인 여성 감독으로서는 최초였습니다.

다섯번째 영화는 <블링 링>(2013)으로 2008~2009년 사이 캘리포니아 10대들이 연예인의 집에 침입해 3백만 달러 어치의 절도행각을 벌였던 실화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엠마 왓슨이 주연했고 2013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개막작으로 상영됐습니다.

1999년 코폴라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과 결혼했습니다. 그들이 만난지 7년 만입니다. 그러나 4년 후인 2003년 이혼합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존즈와 불화를 겪은 코폴라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1년 코폴라는 이탈리아에서 뮤지션 토마스 마스와 재혼합니다. 두 사람은 <처녀 자살>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하면서 처음 만났는데요. 파리에 신혼집을 차렸고 딸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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