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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행 막차를 탄 시인 이삼헌

구정은 고향의 설인가 보다. 자녀들이 몰려와 떡국을 먹었는데도 고향 생각 여전하다. 고향길 찾듯 친구 집을 찾아가 커피를 나누고 돌아오니 저녁이다. 어둠 속을 걸어가면서 '고향 생각'을 불러본다. 서쪽 하늘에 별들이 반짝인다. 2절을 부르는데 아내가 먼저 목이 멘다. 

고향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가건만
단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해

아파트로 들어오면서 편지함을 열었다. 누런 봉투로 포장된 책 한권이 들어있다. 서울에서 온 에어 메일. 시집 <의정부행 막차를 타고>.

"이계선 조카님에게. 저자 이삼헌 드림"

감격! 설날에 이런 선물을 받다니! 나는 시집을 펴다 말고 눈을 감았다. 내 마음은 타임캡슐을 타고 60년 전의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안중학교를 다니는 게 창피했다. 동기들은 서울로 올라가 서울중 경복중 용산중 경동중에 다니면서 장원급제를 한양 으스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시골 안중 중학교라니? 낙향한 낙방 거사처럼 울분으로 삼년을 지냈다. 

3년 동안 내 가방은 무거웠다. 절치부심으로 공부하느라 참고서를 가득 채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소설책과 술병이 들어있어 무거웠다. 3년 동안 공부 시간에 소설만 읽었다. 삼국지는 열 번도 더 읽었다. 학교가 파하면 안중 시장에 들려 반 홉짜리 샛별 소주를 샀다. 술병을 까 마시고 갈지자로 걸으면 취생몽사 20리 귀갓길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안중중학교는 아침마다 조회를 했다. 교장 교감이 번갈아가며 훈시를 했다. 난 학자풍의 유세준 교장보다 정시우 교감의 훈시를 더 좋아했다. 교감은 당신의 훈시 대신 졸업생들이 보낸 편지를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러분의 위대한 선배 이삼은 군이 보내준 편지를 낭송하겠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은사 정시우 교감 선생님에게.'"

와! 도입부부터 멋지구나. '잊을 수 없는 은사 정시우 교감 선생님에게’

난 지금도 작품 중에 편지 쓰기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초등하교 5학년 때 위문편지 잘못 쓰고 되게 혼이 난적이 있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에 고생하는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숙제가 내렸다. 맘에 드는 명문을 여기저기에서 골라 짜깁기를 했다. 

'꽃피고 새우는 춘삼월 양춘가절에,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시며 가내제절이 균안하옵신지요?' 로 시작한 것 까지는 그래도 나앗는데 끝에 패착을 두고 말았다. '장병 아저씨의 무운을 빌며 아울러 명복을 비나이다'로 끝냈기 때문이다. 답장이 올 리가 없었다. 명복을 비나이다 때문에 정말 전사한 건 아닐까? 두고두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이 읽은 선배의 편지는 달랐다. 콩트처럼 재미있고 시어처럼 아름다웠다. 졸업 선배들의 편지 중에 3인방이 인기 있었다. 그 이름 이삼은, 이계선, 최병국. 안중 중학교는 세 사람을 3인의 천재라고 불러줬다. 3인 중에 이삼은 선배가 단연 발군이었다.

중학교 시절 그가 쓴 시골 소년의 글이 월간지 <학원>에 단골로 실렸다. 대학교 때는 전국대학생 시 낭송 대회서 장원으로 뽑혔다. 대학 가요제가 없던 그 시절 자작시 낭송 대회는 유일한 대학 낭만 축제였다. 1962년에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기도 했다. 심사위원이 조지훈, 조병화였다. 당시 등단은 장원급제보다도 어려운 하늘의 별 따기였다.

3인의 선배들은 편지 말고 콩트, 시, 수필을 자주 보내곤 했다. 국어 시간에는 선배들이 보낸 작품을 문장독본으로 삼아 공부했다. 난 시골 중학교 다니는 게 싫었지만 국어 시간만은 좋았다. 그러다 보니 문예부장까지 됐다. 3인의 천재 선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우상이었다. 만나보고 싶었다. 중학교 졸업 후 35년 만에 이계선 선배를 만났다. 같은 함평이씨 종친이었다.

"가짜 이계선이 진짜 이계선 형님을 뵙습니다."

"아이고, 아우님이 진짜 이계선이지요. 난 이계선 이름을 망친 이계선입니다." 

그는 경찰에 투신했다가 병들어 고만뒀다. 문학을 버린 걸 후회하고 있었다. 죄라도 지은 것처럼. 최병국 선배도 만났다. 법무부 주간신문 편집국장 일을 보고 있었다. 그가 쓴 시집을 읽어보니 법률 용어처럼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안중 문학 특유의 유머가 묻어있었다.

찾아도 뒤져도 이삼은 선배는 오리무중. 세월의 흐름에 밀려 나는 미국에 이민을 갔다. 한국에서 발행하는 <문학의 강>에 '괭이갈매기'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다. 중랑천 둑을 걸으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 나도 어디서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어 본듯 한 기분이 들게 하는 글이었다. 

글쓴이의 이름이 이삼헌이었다. 이삼은과 3분의 2가 같구나! <문학의 강>으로 연락해보니 이명동인(異名同人) 이삼헌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헌'을 '은'으로 발음한다. 그래서 교감선생님은 '삼헌이'를 '삼은이'로 부른 것이다. 아저씨 항열이었다.

평택은 함평이씨의 메디나다. 고려조의 대신 이언(李彦)이 함평에 터를 잡으면서 함평이씨가 시작됐다. 이언의 종묘가 있는 함평은 함이의 메카다. 조선 초기 함평이씨 중길이 정부의 박해를 피해 평택으로 숨어들어 지금 포승면 대덕산 아래에 터를 잡았다. 당시 평택군 8개면 중 서부 4개면에 함이들이 많이 산다. 

그중에서도 포승면 내기리가 함이의 메디나다. 함이(咸李)가 '터를 잡았다'고 해서 내기리(內基-안터)다. 내기리 둘레에 있는 회곡리, 방림리, 석정리, 홍원리 그리고 방림리 옆의 현덕면 운정리가 함평이씨의 강세 지역이다. 

함평이씨의 사당이 있는 대덕산 줄기에서 함평이씨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국회의원 이병헌, 이자헌, 이계안, 이미경 등이 이곳 출신들이다. 이삼헌 시인, 이계학 박사, 이계송 화가 형제도 대덕산 정기를 받고 자랐다. 방림리 옆 운정리는 평택군 부자들이 모여 사는 부자촌이다. 내기리에서 태어난 우리 아버지는 방림리 운정리를 지나 글갱이로 양자로 오셨다.

   
 

이삼헌 시인. 중학교로 보나 함이 집안으로 보나 가까운 분이다. 62년도에 등단한 시인이 54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아주 드문 일이다. 대신 30권의 가치가 함축돼있는 보석 같은 시집이다.

<의정부행 막차를 타고>, 통금 시대가 아닌데 막차를 타다니? 삼헌 아저씨의 시에는 막차를 타고 통금 시대를 여행하는 서정과 낭만이 있다. 소리 내어 '두물머리'를 읽어보자. 애송시로 훌륭하지 아니한가?

두물머리

마음 시린 날이면/ 양수리/ 두물머리로 가보게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몸을 섞으며 하나로 태어나는 곳

물안개 자욱이 산을 휘감고/ 아침 해가 느티나무를 물속으로
밀어 넣으면/ 그리운 사람 고인돌 밟고 걸어올 걸세

한밤 내 고운 잠자고/ 수연(水蓮)이 배시시 문을 여는
안개를 걷어내면/ 수초들이 우아하게 머리 감는 곳

달개비꽃 능소화 나팔꽃도 고개 올려
시샘하지만/ 그리운 사람 바람 밟고 걸어올 걸세.  

이계선  newsm@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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