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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하지 맙시다연보로 합시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헌금 넘버원 입네다. 미국교인들은 1달러 2달러를 하는데 한국교인들은 십일조 말고도 주일헌금 심방헌금 감사헌금으로 봉투를 가득 채우는군요. 미국교회는 200명 교회 목사도 우체국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습네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30명교인 갖고도 목사가 넉넉하게 사는군요”

이민교회를 방문한 미국목사는 주보에 끼어있는 헌금봉투의 헌금내역을 보고 혀를 내두른다.

-십일조, 주일헌금, 생일감사, 환갑감사, 결혼감사, 출생감사, 백일감사, 돌 감사, 이사감사, 입학감사, 취직감사, 심방감사, 범사감사, 부흥회헌금, 성탄절헌금, 추수감사절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구제헌금, 건축헌금, 주일밤 예배헌금 ,수요예배헌금, 금요철야헌금, 구역예배헌금, 기타헌금 헌금헌금또 헌금-

“와우! 악명 높은 미국 국세청의 세금고지서보다도 훨씬 많네요.”

한국교회가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중소교회가 사이좋게 평화공존을 누리던 60년대까지만 해도 주일 낮 예배 때만 헌금을 거뒀다. 부흥회 때는 아예 헌금순서가 없었다. 병 고침을 받거나 은혜를 받은 이들이 가끔 감사헌금을 했을 뿐이다. 그것도 헌금이 아니라 연보(捐補)라 했다. 그러다 조모 목사가 신유와 기복설교로 대형교회를 만들고 난 후부터 한국교회는 모일 때마다 헌금이다. 수요일 밤에도 금요철야에도 헌금채를 돌린다. 부흥회때는 밤마다 헌금이다. 어느 통신신학교는 졸업식에서도 헌금을 걷고 있었다. 아마 지구상에 있는 수백개의 종교단체중 헌금 자주 걷기는 단연 한국교회가 넘버원일 것이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불교나 캐도릭에 비해 “잠자리채를 너무 자주 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를 돈 먹기(헌금)를 좋아하는 “먹사”라고 부른다.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넘쳐나는 헌금을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호텔급의 기도원을 짓고 대학을 세우고 신문사를 차리고 병원과 노인아파트를 짓는데 투자한다. 전국에 지성전를 짓고 재벌기업이 해외지상사를 내듯 해외선교로 교세를 자랑한다. 재벌들의 문어발식 사업확장과 다를게 없다. 확장하지 않으면 교인들의 기가 죽어 교세가 찌들어어 버리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이 청와대에서 나오는것이 아니고 천상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제 닭 잡아먹고 좋아하는 소경노인처럼 자기들이 헌금 하고 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좋아한다.

욕심많은 양계장 영감이 있었다. 소경에다 “하나 둘” 밖에 못세는 숫자세기에 약한 고집불통이었다. 동네 꼬맹이들이 야밤에 닭한마리를 잡아갔다. 아침에 노인이 세어 보니 “하나”에서 끝이다.

노인은 화를 냈다. 숨어서 광경을 본 꼬맹이들이 그날 밤에도 닭서리를 해갔다. 노인이 다음날 일어나 세어보니 이번에는 “둘”이었다.

‘오늘은 닭한마리가 공짜로 들어왔네’

노인은 공짜로 생긴줄 알고 닭을 잡아먹었다. 그런식으로 매일 닭을 잡아먹다보니 얼마후에 양계장이 텅텅비어 망해버렸다.

“우리교회가 4만명이 모여 성전을 크게 지어야합니다. 3천5백억원이 듭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합시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통성기도로 3천5백억원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6개월 후에

담임목사가 울며 할렐루야! 를 외쳤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4천억을 주셨습니다.”

교인들도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바보스럽기는! 하나님은 한 푼도 안주셨는데, 자기들이 내고도 그걸 모르다니? 소경이 제 닭 잡아먹고 좋아하는 꼴이라구나’

하나님은 주시지도 않고 받으시지도 않는다. 돈 없고 가난한 거지, 과부, 나그네와 땅이 없는 레위족에게 너희들이 십일조를 거둬 도와주라고 하셨다. 옛날 한국에도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풍습이 있으니 이게 한국형 십일조(十一條)다.

구약시대에 십일조는 유태민족뿐 만 아니라 타민족의 종교관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구약시대 십일조는 오늘날 대형교회 십일조처럼 거액이 아니라 초라했다. 그래서 말라기 시절에는 십일조로 먹고사는 레위족들이 가난을 견디다 못해 성전일을 버리고 도망가 수배를 당하기도 했다. 신약시절 이후 십일조는 의무조항이 아니었다. 초대 기독교지도자 이레니우스는 십일조의 의무를 폐지하고 자발적인 십일조를 강조했다.

사도행전 시절에는 십일조는 고사하고 아예 헌금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연보(捐補)란 말을 썼다.(고후8:20) 6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연보라 했다. 카토릭은 지금도 연보라고 한다. 그러다 모금실적이 신통치 안 해서 그랬던지 어느 날부터 연보란 말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헌금이란 말이 등장했다. 헌금과 연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헌금”(獻)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돈”이란 뜻이다. 제사(祭祀)지낼 때 신에게 바치는 헌물(獻)인 제물(祭物)의 의미가 있다. “연보”(捐補)는 “자기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돈”이란 뜻이다. 일종의 구제금이다. 헌금은 신(神)에게 드리는 돈이요 연보(捐補)는 사람에게 드리는 돈이란 말이다.

구약시대의 헌금격인 제물은 죽여서 몽땅 불태워 살라버렸다. 사람에게는 돌아가는게 없게 했던 것이다.

전도사 시절 물에 빠져 자살해 죽은 처녀와 목매달아 죽은 총각이 영혼결혼식을 하는 걸 본적이 있다. 처녀 집에서 신랑양복, 이불, 장롱을 비롯한 고급혼수를 마차에 가득 싣고 처녀가 자살한 물가로 갔다. 거기서 영혼결혼식을 치루더니 바리바리 마차에 싣고 온 혼수들을 몽땅 불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아까워라 아까워, 새 혼수를 불태워 버리다니!”

장가 갈때 달랑 여름양복 한 벌을 얻어 입은게 전부인 가난뱅이 전도사인 나는 여간 아까운 게 아니었다.

“아깝다니요? 신랑영혼이 가져간 것이라서 결코 없어져 버린게 아니 랍니다”

구약의 제물(祭物)이 그랬다. 헌금은 그런 것이다. 신에게 바쳤다면 사람이 손 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돕는건 연보다. 고린도 교인들은 미리 연보를 거둬 뒀다가 바울이 방문하자 필요한데 쓰라고 내놓았다.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거둬서 목회자의 생활에 보탬이 되라고 내어 놓는 게 연보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준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국어사전). 그래서 작은 교회장로는 연보로 십삼조 십오조를 내놓아 목사를 돕는다.

고향의 어린시절, 우리동내 교회 목사님은 너무 가난했다. 교인이 적어서 아무리 헌금을 해도 끼니가 어려웠다. 교인들은 헌금 말고도 개인 주머니를 털어서 목사님을 도왔다. 아버지가 먼길을 떠나는 날이면 어머니는 몰래 광으로 들어가 목사님댁으로 쌀을 퍼 날랐다. 그때 장물운반책이 나였다. 나는 교회를 안다녔지만 쌀자루를 들러매고 목사님댁으로 갈때면 의적홍길동이라도 된양 기분이 아주 좋았다. 교회가 어려우면 십일조 말고 십삼조 십오조라도 해야한다. 단지 헌금을 하더라도 연보정신으로 하는게 옳다. 그게 사동행전 시절의 연보정신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헌금이 아니라 연보(捐補) 비슷한 시주(施主)다.

국어사전에는 “중이나 절에 물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나 그 행위”를 시주라 했다.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준다는 “연보“나 필요한 물품을 베풀어준다는 ”시주”나 의미가 같다.

고향의 어린시절, 우리 집으로 구걸하러 오는 이는 거지와 시주승(施主僧)뿐이었다. 어린 나는 시주승이나 거지를 똑같이 취급했다. 그래서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목탁소리가 나면 얼른 공양미를 들고 뛰어 나갔다.

“얘야, 저들은 마귀를 믿는 중인데 쌀을 갖다 주다니? 그러면 너는 마귀에게 예물을 바친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는 거야”

누나가 책망하면 나는 이렇게 맞섰다.

“나는 공양미를 얻으러 다니는 스님들이 거지들처럼 불쌍하게 보여요”

지금은 불교도 대형화가 되어 시주가 어마어마하다. 옛날처럼 좁쌀 몇 숟가락을 집어 주지 않는다. 월북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요정 대원각의 여사장은 대원각을 통째로 절에 바쳐버렸다. 1천 억짜리 대원각을 좁쌀 한 됫박 시주하듯 법정스님에게 시주 한 것이다.

고향의 어린시절 연보로 살아야하는 근처교회 목사님은 아주 가난했다. 그런데도 존경을 받았다. 산업화가 밀려들어오자 그 교회는 천 명 교회로 부흥되고 십일조가 넘쳐나 이제는 부자 교회가 됐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사를 먹사라고 부른다. 

“헌금하지 맙시다. 연보로 합시다”

등촌, 이계선 목사 / 제1회 광양 신인문학상 소설 등단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저자.

이계선  newsm@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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