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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아버지를 만들다뻔뻔한 아버지, 떳떳한 아버지, 고개 숙인 아버지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아버지'다.  한때 고개 숙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이 대세를 이루었다면 이제 그 아버지는 떳떳한 아버지이거나 극복되어야 할 아버지다.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는 떳떳한 아버지고, <사도>의 아버지 영조 임금은 자식을 자신처럼 만들려다 죽음으로 몰고 간 뻔뻔한 아버지다. <베테랑>에서의 아버지도 뻔뻔한 아버지에 속한다. <암살>과 <손님>에서 아버지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다.

누구에게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있다.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기억이 무엇이든 간에 다른 이들이 개입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는 뻔뻔했던 이가 자식에게는 더없이 자상했을 수도 있고, 실제로는 속 깊은 아버지였지만 자식에게 오해 받는 아버지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외부와는 다른 한 가정의 기억을 밖으로 공론화시킬 때 비극은 발생한다.  최근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인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결국은 아버지의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세력들이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역사에 집어 넣으려고 하면서 사회는 갈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란 정말 '신성불가침'의 영역인가?  이제는 중국 배우 탕웨이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과 디카프리오의 10대 때 풋풋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1994) 에서 가족은 꼭 핏줄로 연결되지 않는다. 핏줄을 과감하게 극복할 때 가족은 새롭게 탄생한다. 예수도 말하지 않았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마가복음 3: 35)

 

'뻔뻔'이 '떳떳'이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든 게 핏줄 때문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이고 가족에서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3년)는 얼핏 보면 기른 정이냐 낳은 정이냐를 묻는 단순한 가족 영화처럼 보이지만 감독은 영화를 그렇게 단순하게만 끌고 가지 않는다.

인물 좋고 능력있는 료타(후쿠야먀 마사하루 분, 한국 배우 정우성을 많이 닮았다)는 아들 케이타가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병원으로부터 듣게 된다. 병원측은 실수를 인정하고 같은 날 태어나 다른 집에서 길러지고 있는 친자와 바꾸라고 제안한다.

   
▲ 아이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고 현재의 아빠 엄마 앞에서 즐거워 한다.

료타의 친아들 류세이는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전파상 주인 유다이(릴리 프랭키분)와 유카리(마키 요코) 부부의 아이로 성장해 왔다. 케이타가 외아들인 반면 류세이에게는 벌써 2명의 동생이 있다.

료타는 유다이의 환경을 보고, 케이타와 류세이를 같이 키우고 싶어하지만 가정의 행복이라는게 물질에서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서히 배워 나간다. 두 아버지 두 어머니 모두 선한 사람들이다. 경제력이 더 있다고 생각한 료타가 유다이에게 두 아이를 모두 자신이 키우겠다고 이야기 하자 유다이는 료타를 때린다. 그런데 이 폭력의 장면이 슬프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처럼 배우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있는 힘껏 내리치는 따귀나 주먹질이 아니라 료타의 머리를 툭 치고 만다. 맞은 료타도 "당신 키울 능력도 없잖아!"라고 절규하는 뻔한 장면을 연기하지 않는다. 그 역시 자신의 실수를 깨우친다. 이런 료타를 향해 유다이는 "져 본적이 없는 녀석은 남의 마음을 모른다"고 정곡을 찌른다. 항상 모범생이었을 료타는 성공을 위해 달려 왔다. 그에게 가족은 성취를 실현하는 공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다가 아이가 바뀌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병원의 실수가 아니라 간호사의 의도적 바꿔치기였다. 당시 간호사는 아이 달린 사람과의 재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새롭게 만난 남편의 아이를 키울 일을 생각하니 두려웠다. 그때 출산을 위해 온 료타 부부의 행복한 모습에 질투가 나서 경험해 보지도 않은 ' 다가올 자신의 불행'을 예단해 두 집 아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자신만 불행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만난 아들과 간호사 어머니는 아무런 문제 없이 서로에게 적응해 가자 죄책감에 6년여 뒤에 사실을 밝힌 것이다.

료타는 누군가의 행복이 다른 이에게는 미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한다. 따지고 보면 그 자신도 그렇게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다. 어릴 적 들어온 계모에게 한 번도 정을 주지 않았던 그였다. 그의 형이 계모에게 살갑게 잘하는 것을 보면 계모가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계모는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료타는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겼다.

료타와 유다이는 서로 교류하면서 아이를 바꿀 마음의 준비를 한다. 료타가 결정적으로 케이타를 유다이의 집으로 보내기로 한 데는 음악학원 공연이 계기가 되었다. 동생 두 명과 동네 골목에서 노는 데 익숙한 유세이와 달리 케이타는 피아노, 영어 등 조기 교육을 받는 아이였다. 하지만 피아노 실력은 늘 쉬운 동요만 연주할 뿐 늘지 않는다. 료타는 케이타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기에 자신의 우월성을 닮지 않았고, 그런 것을 엄마로서 왜 어릴 때 발견하지 못했냐고 아내를 원망한다.

   
▲ 케이타가 새로 만난 친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결국 아이는 교환(?)되고

결국 아이 둘은 각각 생부의 집으로 돌아간다. 비극이다. 핏줄이 뭔지, 질투가 뭔지 모르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라고 부르던 사람들과 이별해 아저씨와 아줌마의 집으로 가야한다.  료타는 친자 류세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류세이는 연을 날리며 놀던 지난 생활을 그리워 한다.

영화에는 료타의 카메라가 자주 등장한다. 료타는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즐겨 본다. 유다이가 가지고 있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와는 다른 전문가용 카메라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대상을 가까이 당겼다가 멀리 보냈다가를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세상의 은유다. 료타는 자식도 성공도 사랑도 교육도 자신이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타가 그것을 따라오지 못해 내심 걱정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내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류세이를 통해 마지막 남은 성공, 즉 자신과 똑같은 아이로 키우겠다는 마음을 먹지만 오히려 아이는 옛날 아버지를 찾아 가출을 한다. 본래 아이였던 케이타는 료타를 찾아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면 유다이에 비해 료타가 좋은 아버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유다이가 더 좋은 아버지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고, 고장난 장난감을 고쳐주고, 함께 목욕을 하는 아버지가 매력적이다. 료타가 현대적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한 권력형 아버지라면 유다이는 친밀형 아버지다.

권력형 아버지상 료타는 마침내 류세이에게 꼭 아빠라고 호칭하지 않아도 좋다고 자신의 기준을 파기한다. 류세이는 마음을 열고 료타의 카메라에 과감하게 손을 댄다. 새롭게 만난, 그래서 아직은 거리감이 있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에 손을 댐으로써 아버지가 스스로 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류세이는 료타가 그랬던 것처럼 렌즈를 통해 아버지의 세계를 본다. 료타는 류세이를 통해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의 진술을 떠올리게 만든다.  알랭 바디우는 유한이 무한을 담을 수 있다는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의 이론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보편주의를 설명한다. 이는 야콥 타우베스가 말한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 신학>에서 바울의 보편주의를 가리켜 바늘 귀를 통과함으로써 얻어진 보편주의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바울이 경험한 그리스도라는 '개별 체험'을 통해 1세기 로마적 보편주의를 극복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독특한 역설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외치는 예수와 조우함으로써 그의 본질을 드러낸다. 알랭 바디우는 이것을 아버지의 담론에서 아들의 담론으로 변화된 사건으로 설명한다.

낙원(병원)에서 쫓겨난 류세이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 간호사에 의해 새로운 낙원(료타의 집)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낙원을 규율의 공간으로 만드는 절대자 료타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낙원은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아니라 내가 있기에 마음 편한 곳이다. 처음에 적응 못하던 류세이는 아들의 담론으로 새로운 낙원으로 만들고 마침내 아버지까지 변화시켜 놓는다. 유한이 무한을 담아낸 것이다.

정통신학의 입장으로는 큰 일 날 소리지만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마침내 아버지가 되었다.

결국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만드는 것은 자식의 몫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인들은 아버지를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 당시 누구나 친일을 했고, 근대화에 그 정도 공헌했으면 나머지는 덮어 주어도 되지 않느냐는 논리다. 그들의 아버지는 결코 떳떳하지 않았다. 그 아버지들을 역사 속에 '고개 숙인 아버지'로 남겨 두어 최소한의 동정이나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 그들이 아버지들을 동정의 대상으로라도 변화시키려면 아버지들의 죄과를 밝혀 내야 한다. 죄과를 드러내면 낼 수록 대중의 동정심은 묘하게 작동해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떳떳하지도 않았던 아버지들의 숙인 고개를 부목을 대서라도 바로 세우려고 하는 뻔뻔한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김기대  gilbert@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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