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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석진은 죽지 않았다영화 <암살> 마지막 장면의 비밀

암살을 보며 매트릭스가 생각났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화 <매트릭스>(Matrix, Wachowski 형제 감독, 1999)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는 컴퓨터 해킹을 전문으로 하는 해커다. 현대 사회에서 다른 이의 컴퓨터에 자유자재로 드나든다는 것은 그의 침실을 드나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 국정원이 사용하는 해킹프로그램은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전화기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를 엿듣고 촬영을 한다. 당하는 사람의 불쾌감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해킹으로 삶을 엿보는 자들은 자신들이 타인의 삶을 조종하고 있다는 짜릿한 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大他者)라도 된 듯이 그들은 국민이 부여하지도 않은 '한국의 안보'를 책임진 듯 행세한다.    

영화 속 네오는 해커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그러던  어느 날 네오는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가상의 세계라는 사실에 놀란다. 그는 메가 컴퓨터 속에서 조종되고 있을 뿐이었다. 저항군 지도자 모페스는 세계 전쟁 이후 불에 탄 잔해들만 남아 있는 시카고의 황량한 곳으로 네오를 데리고 온다. 그 때 모페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실 네오가 가상의 세계 속에 있을 때 그에게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영화 속 가상의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사랑과 이별이 있고, 부와 가난이 갈등하는 곳이다. 하지만 새롭게 인도된 황량한 실재 세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네오 아니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실재계를 택할 것인가? 모든 것이 있는 가상계를 택할 것인가?  한국 사회를 빗대어 설명하면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내 삶을 조금 엿본들 어떤가!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데"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가짜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사방 모두가 적이 되는 황량한 실재 세계에 던져지게 된다. <매트릭스>가 던지는 질문이고 인기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 말을 책 제목으로 삼아 철학 놀이를 한다.

영화 <암살>(최동훈 감독, 2015년)은 오락성을 갖춘데다 광복 70년을 맞는 한국 사회가 고민해야 할 지점을 잘 아는 영리한 영화다. 결코 계몽하지 않으며 엄숙미를 강조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이 글은 엄청난 스포일러를 포함한다. 영화가 인기를 얻자 여기저기서 영화평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아직 영화를 관람 못한 사람들도 스토리를 다 알 정도다. 이렇게 스포일러의 책임을 슬쩍 비켜 간다. 하지만 글로 된 줄거리를 다 알고 가도 영화가 주는 재미는 따라가지 못한다. 관람을 바라는 이유다. 이 글은 <암살>에 대해 라캉식 읽기를 시도해 본 글이다.


안옥윤의 아버지와 미츠코의 아버지  

뛰어난 사격 솜씨의 소유자 안옥윤은 독립군 3지대 안에서 상관을 살해한 죄로 진영내 감옥에 수감 중이다. 그의 솜씨를 알아본 항저우의 임시정부는 안옥윤을 대장으로 하는 3인조 암살단을 조직해 경성에 투입한다. 그곳에서 작전개시일을 기다리던 안옥윤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쌍둥이 언니 미츠코와 조우한다. 

   
▲ 미츠코가 된 안옥윤이 미츠코의 욕망(강인국의 욕망)과 싸워야 하는 상황은 상징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마주 섬은 라캉 식으로 말하면 거울기에 해당하는 상상계다. 라캉에 따르면 상상계란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타자로 규정하는 단계다.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데 이렇게 구성된 자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소외를 경험한다. 소외된 두 주체 안옥윤과 미츠코는 상대방(라캉식으로 말하면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서 자신의 잃은 것을 채우려 한다.   

미츠코는 아버지 강인국의 친일 욕망을 내면화 하면서 아버지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미츠코는  어릴 때 잃어버린 동생을 통해 아버지의 욕망(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완성하려고 한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딸에 대한 그리움(그것이 진심이 아닐지라도)을 미츠코에게 표출해 왔다고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안옥윤은 자신의 아버지의 독립의지를 내면화 해야 한다. 어머니(실제로는 유모)를 통해 너의 아버지는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옥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강인국이 미화된 존재가 아니라 그녀의 생모 안성심이다. 그래서 어머니(유모)는 아이의 성을 안씨로 했다. 두 아버지를 내면화 하는, 하지만 그 결과가 전혀 같을 수 없는 현장에서 미츠코는 자신의 욕망의 근원인 아버지에 의해 살해된다.

이 사건으로 안옥윤은 아버지를 내면화 하면서 진입하게 되는 상징계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로 아버지로 시작하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다. 아버지는 이 세계의 대표적 존재고 나의 모든 것에 개입하는 대타자이다. 아버지는 모든 권위의 상징 팔루스(남근)를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상징계에 진입한 주체는 권위의 상징을 욕망하게 된다.

그런데 안옥윤은 그녀의 아버지(안성심)가 남근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는 사라진다. 생부 강인국은 안옥윤을 지배하는 또 다른 대타자인 애국심의 시선으로 보면 제거되어야 할 자이다. 그런 점에서 살부단의 일원이었던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과는 다르다. 살부단(친일 아버지를 서로 죽이기로 한 아들들의 연합체)의 실패자 하와이 피스톨은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한 트라우마로 돈만 주면 모든 사람을 죽이는 살인 청부업자가 되어 버렸지만 안옥윤에게 두 아버지 모두 더 이상 대타자가 아니기에 혼란스러워 한다.

이처럼 대타자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기에 결국 하와이 피스톨이 안옥윤을 대신해 강인국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이제 안옥윤은 희생된 수많은 타자의 집합체인 국가를 위해 염석진을 제거해야 한다.

 

염석진이 죽은 공간의 비밀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미츠코로 살아온 안옥윤은 시장 번화한 곳에서 반민특위의 재판을 조롱하듯 무죄를 선고 받은 염석진을 만난다. 이 곳에서 염석진의 밀정 행각을 뒤쫓다가 오히려 그에게 역습당해 말을 잃었던 명우가 쏜 총에 의해 염석진은 쓰러진다. 그런데 시장에서 총을 맞은 염석진이 쓰러지는 곳은 황량한 '실재의 사막'과 같은 곳이었다. 번화한 시장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게 넓은 공터가 있을 리 없을 터, 이곳은 모페스가 네오를 안내했던 그 실재의 사막이다.  어떤 대타자의 시선도 용납할 것 같지 않은 하얀 천만 나부끼는 그곳은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다. 라캉에게 있어서 실재계는 상징계에 담지 못하고 남은 관념의 세계고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안옥윤과 명우는 염석진이 쓰러진 곳으로 따라가지 못한다. 이 황량한 장소는 언어와 전통에 의해 포박된 상징계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가상의 공간 같지만 오히려 그 벌판이 실재 세계다. 염석진이 시장에서 죽지 않고 벌판에서 죽는 장면, 시장에서 염석진을 처단한 안옥윤과 명우가 시장 담벼락을 넘지 못한 장면, 죽인 자와 죽은 자를 한 장면에 넣지 않은 감독의 의도는 실재계의 진입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결국 <암살>은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와 스크린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실재의 세계로 과감하게 넘어서라고 우리를 추동하는 영화다. 안옥윤은 시장이라는 상징계에서 친일파를 처단했지만, 동우는 염석진이 변절 전에 일본군에게 맞은 4발의 총알보다 더 많은 6발의 총을 그에게 발사해 정의를 실현한 것 같지만 지금의 현실세계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계다. 이 세계를 바로잡는 일은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안옥윤도 상상과 상징 속에서 밖에 하지 못했던 일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그러기에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통쾌함만을 느끼고 실존인물(김원봉, 김구 등)이 아닌 주인공들이 실제로는 누구라더라 식의 놀이만 한다면 마지막 장면의 의미를 놓치게 된다.

쓰러진 염석진이 실재의 사막에서 말하는 것은 '나 잡아 봐라!'다. 안타깝게 안옥윤과 명우는 실재의 사막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이제는 당신들의 차례라고 관객들에게 책임을 떠 넘기고 있다.   

관객이 천만을 넘는 현실 속에서도 친일파의 논리인 건국 논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저들이 용감한 것은 소시민들이 영화로만 만족하지 거친 실재 세계로 진입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자 권진관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권진관의 글은 국가를 향해 호통치는 내용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징세계가 현실세계라고 믿고 더 이상의 '승화'(상징계에 종속된 주체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실재를 향유하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라캉의 개념)를 포기한 관객들을 향한 말로도 들린다.(  )은 내가 첨부한 것이다.     

오늘의 진정한 현실, 즉 실재계는 우리가 어떤 상징계를 만드느냐에 따라서, 그 상징계에 우호적일 수도 있고, 적대적이 될 수도 있는데, 지금의 국가(우리)는 실재계를 무시한 기만의 상징계를 만들고 있다. 실재계와 너무도 동떨어진 상징계를 만들고 있는 국가(우리)는 닥쳐진 총체적인 위기 앞에서 무감각하다. 실재계의 대역습을 받게 될 때에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에큐메니안>에서)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김기대  gilbert@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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