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의 죽음은 내게 큰 슬픔이 되었지만, 섬머 캠프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겼다.
드디어 2006년 새해가 밝았다. 마이클과 나는 이제 몇 달 후 여름이면 시작할 ‘섬머 캠프’ 생각에 신나서 구체적인 세부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클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원래 건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자기 집 앞 계단에 앉아서 골목의 대소사를 챙기던 그가 기침 감기에 시달리며 집 밖에 나가는 일이 드물어졌다. 나도 점점 그의 건강이  염려되기 시작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집에 사는 그를 위해 석유난로를 구해다 주고, 가끔 들러서 먹을 것을 챙겨주기도 했다.

2월이 되면서 그의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거동이 더욱 불편해진 그에게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묻자, 이미 누이와 함께 다녀왔다며 치료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그동안 장도 봐다 주면서 필요한 걸 챙겨주었다. 동네 사람들이 마이클이 자기들 얘기는 콧등으로 넘겨듣지만, 내 얘기는 그래도 좀 듣는 시늉이라도 한다고 해서 약을 먹었는지, 병원에는 꾸준히 다니는지 잔소리를 하며 그를 보살폈다. 

그런데 3월 2일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54세였던 그가 이 땅에서 힘든 삶을 훌훌 털고 떠나버린 것이다. 사인은 심장마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으면 당연히 완치되었을 지병이 악화되면서 심장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이클이 숨을 거두었다고 이웃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나는 멍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도 함께 웃고 얘기를 나눴는데. 통계 수치로만 이해하고 있던 빈민가 의료 시설 부재 현상이 현실이 되어 내 친구를 앗아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마이클은 병원에 간 적이 없었다. 의료보험이 없는 그는 병원에 갈 수가 없었고,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둘러댔던 것이다. 나는 빈민가의 서러운 현실을, 내가 사랑하는 이웃, 내 동지를 잃는 뼈저린 아픔을 통해 체험해야 했다.

그의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길에 장의사 직원이 내게 농담조로 물었다.

“친척이신가요?”
"네, 가족입니다.”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야 나는 마이클이 내게 형제와 같은 존재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방인이었던 나를 환영하고,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초대했던 내 이웃. 함께 꿈과 희망을 나누며 웃고 즐기던 친구. 그의 이웃에게 나를 친구로 소개했던 그의 너그러움. 그는 낯선 동네에서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족이었다.

장례식장에 들어갔더니, 나를 빼고는 모두 흑인들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 친척, 이웃이 모두 흑인들이니. 나를 아는 이웃들은 반갑게 눈인사를 했지만, 모르는 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렇겠지, 동양인인 내가 마이클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들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겠지.’

미국 장례식에는 고인을 기억하며 가족, 친지들이 조문객 앞에서 애도하는 순서가 마지막 부분에 있다. 마이클의 가족, 친척, 이웃들이 순서대로 고인을 기리는 말을 한 후, 내가 앞으로 나갔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조문객 앞에 나는 소중한 친구를 잃은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제가 여기에 들어올 때, 장의사 직원이 제게 가족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이클이 제게 형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았던 마이클은 이웃을 도우며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천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올 여름에 아이들을 위해 ‘섬머 캠프’를 함께 운영하기로 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속담에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마이클을 우리 마음속에 묻는 날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헌신적인 삶과 고귀한 이상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올 여름, 저는 마이클의 뜻을 기리며 유버 스트릿에서 ‘섬머 캠프’를 진행할 겁니다. 우리가 함께 이웃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아끼던 마이클의 정신을 실천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신나는 섬머 캠프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눈물을 참아가며 이렇게 마이클을 잃은 마음을 나눴다. 장례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몇몇 이웃들이 내게 와서 위로를 하며, 자신들이 마이클 대신 나를 도와서 캠프를 진행하겠다고 자원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유버 스트릿의 이웃들은 자원해서 마이클이 떠난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Miss Marge라는 할머니 한 분이 Play Street을 신청하고 Lunch Program을 관리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섬머 캠프를 홍보하기로 했다. Andrea라는 중년 여인은 자기가 동네 아이들을 다 알고 있으니, 자기 손자들을 비롯해서 아이들을 모두 데려오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어떤 이들은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라며, 자기 아들들에게 돈을 좀 부탁하겠다고 자원하기도 했다.

▲ 마이클 대신 나를 도와 섬머 캠프를 진행한 이웃들.
봄이 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섬머 캠프 계획을 알렸다. 나와 동네 주민들 사이에 다리 역할을 했던 마이클이 없으니, 이제는 내가 직접 그들을 대해야 했다. 8월에 3주 동안 캠프를 진행하기로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2시 반에 마치는 걸로 정했다. 캠프 프로그램은 만들기, 게임, 운동, 그리고 성경공부 정도로 계획했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 반응 때문에 조심스럽게 내가 목사니 성경을 가르친다고 말했더니, 그 말은 들은 블록 캡틴이 “그러면 성경학교네요?”라고 반문했다. 내가 그런 셈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이 동양인 목사가 여름에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진행한다고 소개했다.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학교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내게는 그 이상 더 좋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이웃들이 전적으로 섬머 캠프에 호응하는 것을 보며, 나는 이미 성령님께서 이 골목을 하나님의 땅으로 선포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이클의 얘기를 할 때면 아직도 그를 잃은 슬픔이 나를 휘감는다. 그의 얘기를 하다가 눈물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동안은 내가 아직 마이클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마도 그를 잃은 슬픔을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이태후 목사 / 템플대학 IVF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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