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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성추행범으로 몰린다면<더 헌트>, 진실과 정의가 반대편에 서다

목사, 장성, 대학교수 등의 성추행 사건이 잊을만하면 뉴스의 중심에 등장한다. 이런 기사 밑에는 항상 세태를 한탄하는 댓글에서부터 거세를 주장하는 댓글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줄을 잇는다. 교단의 재판절차를 비껴 갔다고 무죄를 확신하는냥 뻔뻔하게 나오는 아무개를 보면 이 정도의 댓글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사회 지도층’ 뿐 아니라 언론에 쓰기에는 ‘격’이 안되는 이들의 추행을 포함하면 그 경우는 훨씬 많아질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런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그것도 믿던 사람이 그랬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 사람과의 친밀관계에 따라 그의 결백을 믿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발 더 나가서 그 피해자가 나의 가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도시에 나가 살던 루카스(매즈 미켈슨 분)는 이혼 후 고향으로 돌아와 유치원 교사로 일하게 된다. 아무리 전직 교사였다 할지라도 중년의 이혼 남성을 유치원 교사로 채용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한국과는 다른 덴마크여서 가능한 일인지, 아니면 조그만 마을에서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온 친구를 위한 연고주의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는 영화 <더 헌트>(Jagten,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 2013년)만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중에는 절친 테오의 딸 클라라(아니타 베데르코프 분)도 있다. 클라라는 매일 자기와 놀아주는 아빠 친구 루카스에게서 거친 아빠와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선물도 건네주고 루카스의 입에 뽀뽀를 한다. 놀란 루카스는 선물은 또래 남자 친구에게 주고 입뽀뽀는 엄마와 아빠에게만 하라고 가르쳐 준다.

무안을 당한 클라라는 유치원 원장에게 달려가 루카스가 막대기처럼 꼿꼿한 고추도 보여주고 (클라라가 오히려 루카스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하트 팬던트도 줬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남성의 성기를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였지만 얼마전 오빠들이 ‘이상한’ 사진을 보여줄 때 얼핏 보았던 모습을 마치 루카스의 것인냥 원장에게 털어 놓는다.

어린 아이들이라도 무안할 수 있으며, 동시에 끔직한 거짓말도 가능하고 거리에 그어진 어떤 선도 밟지 않으려는 강박도 가진 ‘자아’가 이미 형성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게서 ‘진실’과 ‘천진난만’이라는 보편의 정서만 읽어내려 한다. 사건은 이 오류에서부터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테오와 루카스, 또 여러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테오가 루카스에게 “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네 눈이 씰룩거리거든”할 정도로 몸짓 눈짓 하나가 친구에게 다 읽히는 관계다. 북구의 추운 11월에 친구들이 함께 알몸으로 강물에 뛰어 드는 장면에서는 이 마을의 가족같은 친밀성이 한층 부각된다. 그런 사회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의 어린 딸을 성추행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모든 가족적 유대감을 사라지고 작가 신형철이 말했듯이 마을은 ‘지옥의 문’이 되고 만다.

 

경건주의도 루터주의도 풀지 못한 숙제

영화는 처음부터 루카스가 무죄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고 시작한다. 가톨릭 학교에서 신부가 학생에게 성추행을 한 의혹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던 <다우트>(존패트릭 샌리 감독, 2008)와도 다르고 <프라이멀 피어>(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1996년)와도 다르다. <프라이멀 피어>는 시카고 지역에서 존경받던 주교가 끔찍한 살해를 당했는데 범인은 어릴 때 그 신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청년이라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인데 끝에 가서 반전이 뛰어나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살해범 청년을 위해 무료 변론에 나선 마틴 베일 변호사(리처즈 기어 분)와 범인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살해당한 신부의 양면성에 초점을 맞추다가 마지막에 가서 진실이 드러난다.

반면 <더 헌트>에서 루카스의 무죄는 확실하다.  우리가 루카스의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에 이르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엄습한다. 다른 곳에서 임신한 마을 처녀가 그 책임을 애꿎은 스님(수도사여도 좋다)에게 전가하자 그는 마을에서 쫓겨나면서도 일체 변명을 하지 않는데 결국 그에 감동한 마을 처녀가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털어 놓았다는 일화처럼 보통의 사람들은 의혹 앞에서 견뎌내기 힘들다.

상담사가 나와 아이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감염된 것처럼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털어 놓자 루카스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기억이 조작될 수 있지만 상담사는 아이들의 말을 믿어 버린다.  

덴마크는 경건주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독일 할레로부터 퍼져 나간 프랑케의 영향은 경건주의를 유럽지역에서 확산시키면서 루터주의와 반대편에 섰다. 그의 열정은 할레-덴마크 선교회를 형성하고, 1620년 덴마크는 인도 동해안에 있는 트랑케바르(Tranque-bar)에 무역 식민지를 설립하면서 그곳을 선교 대상지로 삼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덴마크 영화에는 이런 흐름들이 남아 있다. <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악셀 감독, 1996년) 도 그렇다. 중세의 농경사회 정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삶은 경건과 거리가 멀어져 있지만 한 사람의 범죄에서 경건치 못한 그들의 삶에 대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명확해 보인다. 상담사가 클라라와 상담하는 동안 상담사의 질문에 나이 든 원장이 구역질을 할 만큼 ‘순수’한 것도 경건주의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엄격한 루터주의가 지배하던 마을에서 일어난 폭력을 다룬 영화 <하얀 리본>(미카엘 하네케 감독, 2010년)과 비교해 보면 결국 어떤 ‘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인간의 폭력성이 모든 사건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게 된다. 

아빠 테오와 좋아하는 아저씨 루카스의 다툼 장면을 목격한 클라라가 엄마에게 “내가 바보같은 말을 했는데 아이들이 따라 한다”고 말하자 엄마는 잠시 당황한다. 진실이 밝혀 질 수 있는 순간 엄마는 정신분석학자가 되어 클라라에게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지”라고 ‘해석’한다.

 

무죄가 입증되었건만

루카스는 전처와 지내던 아들 마쿠스가 함께 살게 되어 기쁨에 차 있던 상태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자 더욱 당혹해 한다. 믿어주던 루카스의 새 여자친구도 의심이 깊어져 그의 곁을 떠나고 동네  슈퍼 마켓도 출입못하게 된다. 연좌제처럼 마쿠스를 바라보는 아빠 친구들의 시선도 곱지 못하다. 마쿠스는 루카스 친구들에게 외친다. “당신들은 친구도 아니다!”. 

경찰에 연행되었던 루카스는 아이들의 증언이 일치않는 사실로 인해 석방된다. 루카스의 무죄는 증명되었지만 루카스를 ‘마녀 사냥’(그래서 제목이 Hunt다)했던 이들의 자기 정당화는 오히려 심각해진다. 석방을 기뻐하며 아들과 요리를 하고 있던 부엌에 돌이 날아 들어 부상을 당하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애완견 패니가 주검으로 돌아온다. 무죄 판명으로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상실한 마을 공동체는 루카스가 경찰서에 가기 전보다 더 심한 폭력을 행사한다. 

이제 진리(루카스의 무죄) 증명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마을 사람들은 중세시대의 마녀 사냥처럼 종교적 광기로 루카스를 유죄로 몰고 갔던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 용어까지 동원한 이성적 접근으로 루카스를 ‘사냥’했다. 그런데 그 이성은 마을 공동체가 오랫동안 쌓아온 전통으로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만큼 취약한 이성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아는 ‘피해자’(라고 믿는)들은 법의 심판을 믿었으나 법은 루카스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 그들의 진리를 배신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제 진리는 정의와 반대편에 서 있다.   

   
▲ 크리스마스 이브, 교회를 찾아간 루카스는 테오의 멱살을 잡고 자기 눈을 똑바로 보라고 소리친다.

크리스마스 이브, 폭력으로 피투성이가 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예배당을 찾아 간다. 십자가에서 피흘리던 예수의 모습으로 예배당에 들어간 루카스는 테오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라고 외친다. 테오는 알고 있다. 루카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눈을 찡그린다는 사실을. 이 순간 루카스의 눈은 찡그려 지지 않았다. 이성이라는 것이, 마을의 전통이라는 것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모두 덧없는 것임을 루카스의 피흘림과 흔들리지 않는 눈이 증명한다. 진리를 지켜낸 것은 루카스의 눈이었다.

 

사냥은 끝나지 않았다

예배당에서 루카스에게 폭행당한 테오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카스를 찾아가 화해한다. 시간은 1년이 흐르고 떠났던 루카스의 여자 친구도 돌아왔다. 그 마을의 성인식과 같은 사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마쿠스를 위해 성인식을 열어주고 사냥총을 선물한다.

1년 전 사건의 갈등을 모두 잊은듯 파티는 성대하고 파티 뒤에 모두 마을의 전통인 사슴 사냥을 떠난다. 루카스는 바로 눈 앞에 사슴을 보고도 쏘지 못한다. 1년 전 마을 사람들에게 ‘사냥’당했던 자신이 생각나서였을게다. 그 순간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루카스를 비켜 간다. 1년 전 마을의 희생양으로 사람들에게 도덕적 부채감을 덜어 주었던 그가 다시 마을 사람으로 복귀해 전통에 참여하는게 싫었던 누군가가 그를 향해 총을 쏘았던 것이다. 총을 쏜 사람은 햇빛에 반사되어 실루엣만 보일뿐이다. 희생양을 향한 사냥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며, 실루엣은 그 폭력의 가해자들은 모두 익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 6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종북’ ‘빨갱이’라는 희생양 사냥은 그치지 않는다. 그나마 덴마크 영화여서 진리가 밝혀진 뒤에도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실루엣으로 처리된 것일까? 우리 사회는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자 역할 놀이를 하면서 실루엣은 커녕 매체를 통해 선명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예수의 피흘림으로 그것을 막아야 할 교회는 거대한 권력이 되었음에도 늘 피해자인냥 행세한다. 그래서 사찰에서 따온 지하철 역 이름도 싫고, 한국에 들어와 사는 무슬림들을 모두 IS처럼 보려고 한다. 성소수자들은 압도적 다수인 이성애자들의 성생활까지도 바꿔 놓을 막강한 힘을 가진 악의 세력으로 둔갑한다.

루카스는 성추행범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전통에 기대어 폭력을 행사하거나 누군가를 ‘사냥’해 왔을 것이다. 피흘림을 경험한 루카스는 이제 더이상 사슴을 향해 쏠 수 없다. 반면 피흘리게 한 자들은 끝까지 그를 괴롭힐 것이다. 사냥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냥터와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한겨레 21에 이 영화 평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런 고백위에 살아간다면 사냥터의 살기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정의와 진리는 같이 가야 하건만

근대 계몽주의 사회는 정의의 근거를 법에서 찾았지만 이런 관계가 깨어진지는 이미 오래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법에서 정의를 찾다가 법이 진실을 증명해주자 스스로 정의가 되어 폭력을 행사한다. 진실과 정의가 맞은 편에 선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결국 진실도 정의도 모두 선물일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와 율법의 관계를 성서 밖 세계로 꺼내와 정치적 차원의 정의와 법의 관계로 파악한 사람은 <바울의 정치신학>(1987년에 행해진 강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린비 출판사가 2012년에 출판했다)을 쓴 야곱 타우베스다. 이후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존 밀뱅크 등이 바울에게서 진리와 정의의 관계를 찾으려고 애썼다. 최근 테드 제닝스는 <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그린비, 2014년)에서 정의(칭의)를 선물로 규정하면서 로마서 5:15-17을 인용한다.

그러나 값없는 선물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죽었다면 분명히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많은 사람들을 위해 넘쳐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값없는 선물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값없는 선물은 한 사람의 죄의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의 죄를 따르는 판결이 정죄를 초래했으나 이 값없는 선물은 많은 죄들을 따라 칭의를 가져 옵니다. 만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그 한 사람을 통해 죽음이 지배권을 행사했다면 은혜의 넘쳐남과 정의의 값없는 선물을 받는 그들은 더욱더 확실히 생명 안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될 것입니다. (책 속의 성서 번역을 그대로 따옴). (186-187)

(율)법도 정의의 기초가 되지 못했고, 마을의 전통도, 친구들의 유대감도 진리와 정의의 거리를 오히려 멀게 만들었다. 아들 마쿠스의 성인식이 있던 날, 루카스는 클라라와 마주친다. 이 천진한 아이 때문에 당한 고통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겠지만 루카스는 클라라를 안아 준다. 클라라는 선을 밟지 못하는 강박증이 있는데 마주친 공간은 촘촘한 선이 그어져 있는 바닥이다. 루카스는 클라라를 안아 건너편으로 옮겨 준다. 어린 아이, 그러나 모든 거짓의 발단이 되었던 클라라가 선이 얽히고 설킨 공간을 넘을 수 있도록 루카스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 준다.

처음 유치원 교사로 루카스가 왔을 때 클라라에게 아저씨는 아빠와는 다른 선물이었다. 그 선물에 답하는 마음으로 뽀뽀를 했는데 거절 당하자 루카스를 거짓 증언의 대상으로 삼아 마치 십자가에 달듯이 공개 모욕을 준다. 예수에게서 군중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배신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인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이 철부지 아이의 증언을 믿어주면서 정의도 진리도 실종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는 선물처럼 다가와 다시금 진리와 정의가 함께 갈 수 있도록 자신을 버린다. 그런 점에서 <더 헌트>는 한편의 성서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감동을 준다. 희생양을 향한 사냥이 끝나지 않은 마지막 장면까지도 진리와 다른 길을 가려는 우리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더 헌트>는 무거운 주제 때문에 불편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영화다. 매즈 미켈슨은 이 영화로 2012년 65회 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탔다. 글을 쓰면서 이 영화가 성추행을 진짜로 행한 이들에게 혹시라도 면죄부를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가왔다. 이 좋은 영화를 자기들의 면죄부로 사용하는 자들이 부디 없기를….   

김기대  gilbert@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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