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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종말에 대한 영화적 성찰- <5일의 마중>

중국의 문화 혁명 당시, 아내와 딸을 두고 잡혀간 루옌스(천따오밍, 진도명 분)는 하방(문화 혁명 때 지식인이 처벌을 받아 민중 속으로 들어가 봉사하는 일)당해 멀리 유배되었지만 잡혀가던 일이 일상인 시절 남겨진 식구들의 일상도 평범하다. 아내 펑완위(공리 분)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딸 단단(장후이윈, 장혜문 분)은 무용학교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발레 '붉은 낭자군'의 주연을 맡기 위해 전념한다.

1964년 처음 공연된 '붉은 낭자군'은 우총화라는 주인공 소녀가 악독한 지주 황바톈에게 착취당하다가 숲속으로 도망치고 그곳에서  공산군 홍창칭을 만나 혁명적 인생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반동 아버지 때문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데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뛰어난 발레 실력을 가진 단단에게 우총화 역할을 맡기려는 발레학교 교사들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엄마는 주인공 역보다 전사 역이 좋다고 하는데 이는 주인공 역에 발탁되지 않았을 경우 딸의 실망감을 미리 예방하는 이유이지만 혁명이 주는 불신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 혁명은 가족을 갈라 놓았다. 혁명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남편처럼 중심에 있다가 하방하느니 우총화보다는 그냥 이름없는 전사 처럼 세상을 사는 쪽을 택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5일의 마중>(歸來’,coming home, 장예모 감독, 2014년)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은 가족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아내는 두려움 속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딸은 발레의 주인공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 집 주변에는 감시자들이 숨어 있고, 지역 당 간부들은 어린 딸에게 주인공 역을 보장할 테니 아버지가 나타나면 신고하라고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비가 몹시 오던 날 남편은 아내 혼자 있는 아파트의 문을 두드린다. 아내는 그것이 남편이 보내는 신호임을 알지만 쉽게 문을 열지 못한다. 딸과 남편 모두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다음날 역에서 만나자는 남편의 쪽지를 받은 펑은 약속된 장소로 루를 만나러 간다. 그곳에는 이미 단단의 신고를 받은 공안들이 나와 있었다. 남편을 향해 도망치라며 멀리서 소리치는 펑,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남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공안원들에 의해 펑은 내동댕이쳐지고, 루는 다시 잡혀가고. 

 

그 후 이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몇 해 뒤 남편은 사면 받아 집으로 돌아온다. 단단은 무용을 접고(당연히 우총화 역을 못맡았을 것이고) 공장에서 일한다. 말을 아끼는 단단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평은 루를 알아보지 못한다.

비오던 날 밤, 문을 열어주지 못했던 자책과 역에서 당한 부상으로 펑은 기억장애에 걸려 있다. 평은 남편을 다른 사람으로 오인한다. 남편의 모습에서 남편을 음해했던 자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단단이 아버지를 고발한 사실만은 또렷이 기억하는 펑의 기억 장애현상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딸과 음해한 자에게 책임을 미루기 위해 그녀의 무의식은 남편에 대한 기억을 잃게 만든다. 그깟 이념이 무엇이길래 가족을 찢어놓은 남편의 모습에서 음해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같은 경우다.  마음으로는 기다리지만 다시 볼 자신이 없고, 막상 그가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랑하는 남편과  그 남편을 곤경에 빠뜨린 자의 모습이 중첩된다.

뒤늦게 아내에게 전달된 이번 달 5일에 석방되어 돌아온다는 남편의 편지, 그녀는 달력에 5일을 표시해 놓고, 옆에 이미 돌아와 있는 남편도 몰라본 채 매달 5일만 되면 역으로 마중 나간다. 남편 숨소리한 번 느껴보지 못하고 다시 보내었던 그 역으로 가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기억을 잃은 아내 옆에서 남편은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아내에게 피아노를 쳐주면서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려 했을 때 루가 치는 피아노 소리에 펑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루와 펑은 얼굴을 맞대고 껴안는다. 루는 아내의 기억이 되살아 난다고 기대하지만 그 순간 펑은 의심과 두려움에 루를 내친다. 편지를 써서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려 시도해 보아도 아내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단단을 용서하라는 바로 옆 진짜 남편의 편지에 펑은 단단을 용서한다. 아버지를 고발하고 그 때문에 어머니의 기억을 잃게 만든 단단은  용서 받은 후 두 사람 앞에서 붉은 낭자군의 우총화 역을 맡아 춤을 춘다. 젊은 날의 꿈이 부모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이제 단단 역시 부모를 용서한다는 의미로 주인공의 춤을 춘다. 그 춤을 본 뒤에도 펑은 단단에게 전사역할도 좋다고 위로한다. 아직 옛 기억이 가져온  공포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는 것이다.

   
▲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는데 실패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자신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대상이 기다림의 주체가 되는 신비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 루는 더이상 아내의 기억에 비집고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제 루는 매달 5일이 되면 펑과 함께 역에 나가 자신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대상이 함께 기다려주는 신비, 이것이 기독교 묵시 사상의 내용이다.

문화혁명 때 학생이었던 장예모 감독도 하방된 경험이 있다. 장예모는 3년간 산서 지방 농장에서 일했고 다시 7년간 방직공장에서 노동을 했다고 한다. 문화 혁명 이후 늦은 나이에 북경 영화 학교에 입학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런 경력을 가진 장예모는 이 영화에서 문화혁명을 소재 삼아 기다림의 모순을 보여주려고 했다. 문화 혁명 때 모든 것을 갈아치우며 공산 유토피아를 만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개혁 개방을 겪으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을 다 잉태한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마오저뚱과 덩샤오핑도 이루지 못했던 인민의 낙원은 결국 허언에 불과한가?

장예모의 인생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보면  기다림의 대상(프로레타리아  혁명의 완성)이 되어야 할 루가 혁명의 피해자가 되어 쓸쓸히 새로운 혁명을 기다린다는 주제가 읽힌다. 희망이라는 기다림의 대상이 인민(펑완위)의 기억 속에서 뒤죽박죽될 때 지속적으로 희망을 상기시켜야 할 대상(라깡 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이 인민의 기억 상실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늘의 중국이 혁명의 완성이라는 기억을 모두 상실하고 당이나 인민이나 함께  길을 잃은 장면도 영화는 담고 있다. 설날에 만두를 가져온 아내를 향해 돌아누운 남편의 어깨에 드리운 무거운 죄책감이 오늘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희망을 애절하게 표현한다.

그럼에도 장예모는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개봉 당시 장감독은 기자회견에서 "기다림을 통해서 비참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인류의 꺼지지 않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여기서 세상에서 말하는 혁명이나 개혁이 실패한 이유가 밝혀진다.  기다림의 대상이 기다림의 주체가 되는 신비는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약속이고 이미 이루어진 성취임을 이데올로기가 놓쳤다면 성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톰 라이트가 말한 것처럼 최후의 극적인 묵시, 하나님의 모든 미스터리가 드러나는 것, 하나님의 비밀계획이 폭로되는 것은 메시야 예수와 관련된 사건,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일어났다. 다시말해 예수는 묵시와 종말의 대상인 동시에 그는 십자가 사건을 계기로 우리와 함께 기다리는 존재다.

영화 속 남편 루가 자신이 남편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내를 힘들게 하다가 마침내 대타자(The Other)로 아내 곁에서 남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동행하는 것이 자신에 의해 완성될 역사의 종말을 함께 기다리는 예수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예수는 자신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애쓰는 분이 아니라 묵묵히 동행하는 분이다. 모래 위에 새겨진 한 명의 발자국이 힘들게 살아온 사람의 발자국이 아니라 힘든 순간 예수께서 그를 업고 모래위를 걸었다는 유명한 시처럼 루는 이제 자신을 알리려 하지 않고 묵묵히 동행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나라는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동시에  그 나라의 주인인 예수는 우리와 함께 기다려 준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가 종종  '오심'에 대한 오해 때문에 기다림을 잘못 이해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울이 말하는 '오심'coming이라는 단어를  오해할 가능성이다. 기독교 학자들이 종종 '오심'을 번역하는 파루시아parousia라는 단어는 사실 '부재'absence의 반대말인 '존재', '임재'presence를 의미한다. 묵시적  유대교가 말하는 암시적 우주론에서는 하늘과 땅이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같은 공간 연속체 안에서 다른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은 겹치고 맞물려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파루시아'의 핵심은 마치 예수가 멀리서 '오는'것이 아니라 그분의 '개인적 임재', 정확히는 '왕적 임재'를 뜻한다는 것이다. 파루시아는 종종 황제나 다른 군주들에게도 쓰였다. (흥미롭게도)요한일서 3장 2절처럼 골로새서 3장 4절도 파네루phaneroo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라고 표현한 것이다. (중략) 그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메시아 안에서 이미 천국에 앉아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톰라이트의 바울, 108~109쪽)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종말은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말은 그리스도 안에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종말론의  비밀은 기다림의 대상인 예수를 그분과 함께 기다리는 신비 안에 있다. 이미 우리는 '나타나신' 그 분 안에 있으며 그 분과 연합되어 있지만 죄책감은 그 기억을 앗아간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앞에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나라에 함께 참여하고 그 나라가 임하는 주기도문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다. 기다리는 대상(혹은 추구하는 목표)과 살아가는 지금을 분리시킨 상태에서는 어떤 종말론적 완성도 기대하기 힘들다. 세속적인 혁명이나 개혁의 실패의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장예모는 지적하는 듯하다.

부부의 사랑이라는 신파적 소재를 이렇게 깊이 있게 풀어낸 장예모 감독의 솜씨가 다시금 놀랍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김기대  gilbert@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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