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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 환자인 아내와 살며 미칠 듯 고독했다"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의 가장 내밀한 고백

 

'기독교 윤리학의 세계적인 석학',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 그가 일군 학문적 금자탑 저편에는 심각한 정신병 환자인 아내로 인해 겪어야 했던 처절한 외로움과 절망의 시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지난 2월 16부터 이틀간 풀러신학교 심리학부가 마련한 Integration symposium의 주강사로 참석해 아내로 인해 겪었던 어려움을 담담히 고백했다. 그의 부인은 심한 조울증 환자였다.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겠다고 고집하고, 하나님의 신호를 기다리며 잠들기를 거부하고, 환시와 환청을 반복했다. 그런 아내를 보살펴야 했고, 동시에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아들을 아내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아내의 정신병으로 인해 미칠 듯한 고독함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진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내러티브 형식을 자신의 주된 학문적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학자답게 이야기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신학적으로 조명했다. 정신병 환자의 가족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과정이 자신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하우어워스 교수는 이번 심포지움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강의했다. 강의 내용을 앞으로 세 번에 나눠 연재하고, 하우어워스 교수와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을 마지막으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은 첫 번째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아내와의 시간을 통해 신학자로서 성숙해갔고, '기독교인'이 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미주뉴스앤조이  
 

나는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식을 너무 가지고 싶어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아이를 낳게만 해준다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대학에 진학해서 상급생이 되었을 때, 나는 앤과 사귀기 시작했고, 대학원 시절에 결혼을 했다. 그때만 해도 결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앤은 중산층이었는데, 노동자 가정에서 자란 나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녀가 이 차이를 힘들어하게 됐다.

앤의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한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꽃을 그리느라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앤은 그런 자기 어머니의 재능과 인생을 절충하지 못하는 재능 두 가지를 다 물려받은 듯싶었다. 앤은 그런 어머니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역할 놀이에 충실히 임했다. 하지만 나는 남부 출신의 사내였다. 여자를 보호하는 것은 내 몫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런 생각이 나 뿐만 아니라 보호받아야 하는 여자(앤: 역자 주)까지도 망치는 결과를 빚었다.

교회 생활에 열성을 다하길 기대했던 앤의 엄마는 심지어 앤에게 '교회 봉사'를 위해 기독교 교육과에 진학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앤은 결국 교회와 어머니 모두를 거부했다. 그 둘에 대한 증오는 결국 나중에 나에게로 밀려오는 계기가 됐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때, 친구 집에서 돌아오는 눈보라 길에 교통사고가 발생해 앤이 입술을 꿰매게 됐다. 그때부터 앤은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기 시작했다. 앤은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거부했다. 그 때만 해도 앤과의 결혼 생활이 심각한 지경은 아니었다.

기독교 윤리학 박사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 예일대학교에 원서를 넣긴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듀크대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에도 원서를 넣었다. 결국 듀크대학교는 떨어지고 예일대학교에는 합격했는데, 내 GRE 수학 성적이 흡사 예일 입학생 최저 점수 기록을 갱신한 듯싶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게 되자 앤은 직장을 그만 두고 아이를 가지길 원했다. 1968년 아담이 태어났다. 2kg이 겨우 넘는 몸무게로 태어나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그는 살아났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담이 그때 살아남았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나 역시 그 이후 18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아이오와 주의 락 아일랜드 시에 있는 아우구스타나대학에 첫 교편을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앤이 아프기 시작했다. 복통을 호소했는데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그녀는 한 병원으로부터 포르피린증(Porphyria) 진단을 받았는데, 마침내 병의 원인을 알게 되자 그녀는 기뻐했다.

앤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밥 먹이고 놀아주다 앤이 깨면 아이를 넘겨주고 학교에 가곤 했다. 집에 돌아와서 산책을 다니는 것도 내 몫이었다. 앤은 아담을 사랑했지만, 아이를 돌보는 것을 힘들어했다.

앤은 미술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재능이 있었다. 그때까지 우리의 인생은 행복한 축이었다. 앤은 대학에서 미술 과목을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업을 좋아했으나 한 편으로는 강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녀 본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만족을 모르고 살아서 더욱 그랬다.  그녀의 문제에는 나도 포함돼 있었다. 그녀는 나랑 결혼만 안 했다면 더 많은 시간을 예술에 투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하면 할수록 난 점점 더 그녀에게 큰 문제가 되어 갔다.

앤은 매우 똑똑했다.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녀는 "여성운동"에 빠져들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아니다. 신학적으로 여성운동이 가지고 있는 몇 몇 논점에 대해 찬성하지도 않았다. 난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앤이 "가부장적"이라고 나를 비판하는 점은 받아들였다. 앤의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나와의 결혼 이외의 대안이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기 전에 내가 결혼하자고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앤의 분노의 대상, 나

물론 문제는 페미니즘이 아닌 앤의 분노였다. 그녀는 화나 있었다.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렇다고 전부 처음으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앤이 실수로 결혼하고 실수로 애를 낳았다고 쳐도, 전부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난 어떻게든 상황을 호전시켜보려고 노력했다. 그 것이 우리 관계의 추락의 시작이었다.

"예술가는 자유가 필요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준대로 살 수 없어. 내가 탐 펀과 섹스를 한다고 해도 당신은 반대해선 안 돼." 나는 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나대학을 거쳐 노틀담대학에 정착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앤이 그저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탐과 그의 아내를 잘 알던 처지였다. 탐이 앤과 그런 관계를 원할 리 없었다.

탐은 노틀담대학에서 예술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앤은 그의 과목을 수강했다. 앤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며칠씩 그러기도 했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주어진 과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녀는 탐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잠도 거른 채 그녀는 계속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난 그녀의 말이나 행동이 매우 두려웠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 했다. 누군가 정신적으로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탐이 어느 오후 전화를 해왔다. 탐이 얼마나 힘들게 전화를 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앤이 사무실로 찾아가 탐을 노골적으로 유혹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난 일단 집으로 달려갔다. 앤은 소파에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지구를 구할 하나님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앤의 설명이었다.

난 아담을 데리고 친한 친구 집에 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전혀 모르겠다는 설명과 함께 아이를 맡겼다. 가정 주치의에게 전화를 하니 정신분열의 한 종류 같다며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나는 그 길로 슈라이너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그는 앤을 병원으로 데리고 와야지만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육체에 갇힌 영혼을 구하러 하늘로부터 내려온 존재라고 믿고 있었고, 아담을 구하려고 시도했으나 내가 길을 막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논리적인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방법을 바꿔야 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원 생 중에 리차드 본디라는 앤이 좋아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를 불러서 앤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신호 받는 일을 잠시 부탁하고 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섰다. 앤은 리차드에게 하나님의 신호를 받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 우리의 전화를 받고 슈라이너 박사가 나와 있었다.

앤으로부터 지금 지구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설명을 들은 슈라이너 박사는 앤에게 "하나님의 신호를 받는 게 어려운 이유가 당신이 피곤하기 때문이에요. 중요한 메시지를 받으려면 일단 좀 잠을 자야 할 것 같네요"라며 수면제를 건넸다. 앤은 슈라이너 박사의 설득에 동의하고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그녀는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난 앤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앤이 수면제를 먹고 잠든 후 슈라이너 박사는 앤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그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다음 10년간 우리는 그녀를 지켜봤다.

그녀는 1주일 더 병원에 머물렀다. 정신병동에서 그녀는 친구들을 빨리 만들었다. 모두 다 "남들로부터 오해 받고"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금방 친해졌다. 그녀는 라이터를 소지할 수 없는 병원 규정에 매우 화를 냈다. 여하간 나는 담배를 보루로 사다 날랐다. 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뭐든 할 기세였다.

내가 절대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내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동의서에 서명한 것은 그녀였지만, 그녀는 내가 자기를 정신병원에 가뒀다고 오해했다. 그녀의 문제는 간단했다. 내가 그녀를 미쳤다고 선언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었다. 문제의 해결책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밖에 없었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강의 도중 감정에 북받혀 간혹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미주뉴스앤조이   
 

점점 미쳐가는 아내

하지만 앤은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녀는 나를 필요로 했다. 나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그녀는 나를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녀는 아담을 사랑했고 우리 "가정"을 사랑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그녀에게 슈라이너 박사는 처방을 따로 하지 않았다. 아직 증상과 병명이 정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슈라이너 박사는 앤이 조울증으로 보인다고 했지만 리튬 처방을 할 만큼의 확신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정상적인 가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앤은 나와의 성관계를 꺼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앤이 오로지 원하는 것은 성관계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앤은 갑자기 "신앙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세상이 평안하기를 우리가 얼마나 갈구하고 있나이까.

하지만 세상은 평안하지 못했다. 내가 눈치 채기도 전에 앤은 우리 수중의 모든 재산을 학교 내 기독교 단체에 기부해버렸다. 로건 센터의 사무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앤이 수표 한 장을 기부했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난 그 수표를 찾아 슈라이너 박사에게 다시 전화했다.

입원 이후 슈라이너 박사가 계속 앤을 진찰해 왔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봐왔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슈라이너 박사는 조울증이 맞다며 리튬을 처방했다. 다행히도 앤이 슈라이너 박사를 좋아해서 큰 문제없이 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리튬을 먹는 동안 경련 등의 부작용은 없었지만 앤은 살이 좀 쪘다. 매달 혈액 검사를 통해 혈액 내 리튬 함량을 검사했고 매주 슈라이너 박사를 만나 진찰을 받았다. 앤은 내가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에 함께 진찰을 받으러 가길 강권했다.

슈라이너 박사를 앤 없이 보러 갈 때도 있었다. 박사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라이너 박사는 왜 아이를 더 가지지 않았냐고 물었다. 사실 우리 둘은 아이를 더 가질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아이를 더 낳을 만큼 부부 간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정신병이라는 새로운 세상

우리는 정신병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증상은 처음부터 드러나 있었지만, 난 그걸 볼 능력이 없었다. 이 정신병은 유전적 요소도 있을 수 있다고 봤지만, 모두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앤의 어머니 역시 일종의 정신병이 있었음에 분명했다. 앤에게 물려준 어머니의 결벽증이 큰 요인이었다. "만약 내가 완벽해진다면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완벽하지 않잖아. 그러니 난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이 달성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자꾸 진행했다. 하루는 방안 가득 앤이 사온 새 옷이 차 있었다. 앤은 새로운 패션 라인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룰 수 없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항상 다른 사람 탓을 했고 주로 그 대상은 나였다. 앤이 조증 상태였을 때는 언제나 "구원자"의 역할을 즐겼다. 그런 강박은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이길 갈망하는 투사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강박의 원천인 앤의 어머니는 1974년에 죽었다. 정확히 1년 후 앤이 "미쳤다." 난 앤의 인생을 장악했던 그 어머니가 앤의 정신병을 불러온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앤의 어머니는 내가 신학대학원에 있던 시절에 나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많은 바람을 피웠는지를 설명하며 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나는 앤에게 사실을 전했고 앤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앤의 어머니는 50대 중반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그녀의 복수였다.

샌 안토니오에서 있었던 장례식에 앤은 참석을 했다. 나도 함께 가려고 했지만 앤은 아담을 돌보며 집에 있으라고 압박했다. 앤은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정신적 붕괴를 경험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장례식에 다녀 온 앤은 자기의 어머니가 벽지 무늬를 통해 자신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 시도했다고 말했다. 앤은 장례식 기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그녀의 삼촌 중 한 명에게 성적으로 끌린 나머지 삼촌을 펠라치오해주는 판타지까지 가졌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난 다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랐을 뿐이고 잠시 우리의 생활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내를 돕다 닳아버리다

조울증은 질병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조금씩의 조울증은 있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이런 증세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앤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아무 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계신다. 그녀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가급적이면 그녀를 동정하려 애썼다. 그녀의 고통을 기억하고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분노의 대상이 항상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잔인했다. 그 잔인함에 나는 조금씩 닳아갔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미친 듯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바로 다음에 당신이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완전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앤은 아픈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만들어 놓은 환상의 세계에 살면서 마치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기술을 연마해갔다. 모두가 아무도 이길 수 없는 게임 안에 갇혀 있었다.

앤은 일 년에 서너 차례씩 아팠다. 2~3주 전부터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플 때가 다가오면 그녀의 입 주변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앤이 내가 그녀가 아플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면 정신 분열이 일어날 확률은 더 높아졌다. 다른 한 편으로 항정신병약을 먹자는 이야기를 너무 늦게 꺼내면 그녀의 정신 분열을 더 심각하게 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됐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리튬을 복용하고 있는지 복용하는 척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 분열 증상이 아무리 계속 되어도 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매번 일을 겪을 때마다 그녀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아내였고, 아담의 엄마였는데도 말이다. 내가 완전 진이 빠져버리기 전에는 그녀가 조증을 겪을 때마다 항상 마음 아파했다. 그녀에게 약을 주려 했지만 그녀는 2층에서 내려올 생각도 없이 며칠씩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하루는 자다가 앤의 비명 소리에 잠을 깼다. 앤은 자신이 벌레들에 뒤덮여 있으며 벌레들이 산 채로 자신을 뜯어 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빗질을 해서 벌레들을 떼어내는 역할을 했어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내 가슴은 찢어지듯 아팠다.

앤이 항정신병약을 먹기 싫어하는 것을 이해 못할 처지도 아니었다. 부작용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때때로 "격정성 우울증"을 겪었는데, 정말 모두에게 끔찍한 일이었다. 격정성 우울증을 겪는 동안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계속 아래위로 왔다 갔다, 이것을 했다 저걸 만졌다, 정신 없이 돌아다녔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담과 나에게도 힘든 일이었지만 앤 자신에게는 더 힘든 일이었다.

아담은 조금 자라서 자신의 엄마가 아플 때면 자신은 아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담은 앤에게 자신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아담은 앤에게 그녀가 라디오를 통해 메시지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해야 했다. 이런 기간을 거쳐 아담은 어른이 돼버렸다. 앤에게나 아담에게나 힘든 일이었다. 아담이 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는 것을 앤은 견디지 못했다. 아담이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필요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집착이 병이 되면 그 위협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신병이 깊어지자 앤은 환청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뭔가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 소리 때문에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그런 소리를 듣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그녀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앤에게는 그저 쫓아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던 탓이다. 누군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에게 "젠장! 정신 좀 차리라고"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지라도 항상 명심할 것이 있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없다”는 것을.

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병을 알길 원치 않았고 나도 그녀의 의사를 존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약간씩의 눈치를 채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병을 드러내지 않으려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정신병 환자와 함께 사는 세상은 매우 외롭다. 당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 세상은 절망적이 된다.

 

   
 
  ▲ 이번 심포지움에는 400여 명이 참석해 강당의 통로까지 자리를 가득 메웠다. ⓒ 미주뉴스앤조이  
 

살아남아야 했던 아담

아담에게는 가정이라는 것이 자리 잡을 틈이 없었다. 아담은 친구를 집에 데려와 자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가끔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했지만 앤은 예측불허였다. 결국 아담과 나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름 방학이면 아담을 데리고 호수가로 가 수영도 하고,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기도 했고, 비행접시를 끝없이 주고받기도 했다.

내 부모님은 우리를 도우려고 안달을 내셨다. 앤이 처음 아프고 난 여름 부모님은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아담이 좋아한다며 6살짜리 아이에게 조각칼 세트를 선물로 사주셨고, 아담은 보기 좋게 엄지손가락을 벴다. 아내는 격분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끼인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물론 앤과 인생을 함께 한다는 것은 나에게 철들 것을 강요했다. 사실 지금도 철든다는 게 무엇인지 난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신학자로서 성숙해간다는 점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 버렐이 떠나고 아담과 나는 출석할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노틀담대학의 세크리드하트성당(Sacred Heart Church)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담과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뜨나 자전거를 타고 성당으로 달렸다. 몇 년이 지나자 우리 둘은 교인들 중 가장 열심히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됐다.

아담에게 교회를 가자고 강요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담은 예배의 순간순간을 즐겼다. 처음 출석할 때만 해도 아담은 설교를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담은 예배를 좋아했다. 우리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는 점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환대했다.

내가 가르치던 신학생들이 안수를 받던 날, 우리 가족 모두가 성당에 갔다. 영성체를 받는 시간이 됐다. 나는 아담을 데리고 앞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앤이 아담을 잡아 눌렀다. 다툼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장소였고, 아담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아담에게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노력했다. 아담은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테니스를 즐기던 나는 사람들의 유행을 따라 조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테니스 칠 동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운동을 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난 조깅이 마음에 들었고 매일 정오에 달리기를 했다. 달리기를 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앤은 점점 더 아프기 시작했다. 그녀의 증상이 심해질수록 나는 더 멀리 달렸다. 한 번에 10km에서 16km를 달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나는 달렸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씨가 어떻든 나는 달렸다. 나는 아담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나는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나는 달렸고, 우린 여하간 살아남았다.

* 후속 기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김성회  peace@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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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1723 (69.XXX.XXX.129)
2011-03-06 07:53:11
찬성:4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훌륭한 번역 기사글 감사합니다.
세계적 석학이라 존경 받는 하우워스 교수님의 영성과 신학의 토대가 어디서 부터 시작되었고 비롯되었는지 제 스스로를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뭐 부터 시작해야 할지.. 하워스 교수님을 통해 다시금 배웁니다.
리플달기
(66.XXX.XXX.92)
2014-02-09 03:19:47
찬성:1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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