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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장 자리 버리고 르완다로 떠나는 이종흠 장로신한뱅크아메리카 CEO, 가난한 이웃 위한 소액 금융 대출 사역 동참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세상과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의 구별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건물은 누가 더 크게 짓나 경쟁하고, 교인이 제일 많은 교회는 어딘가 하는 방식으로 신경전을 펼친다. 교회가 그렇다보니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를 거스르며 살아야 하지만, 오히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하지만 주변 구석구석을 잘 찾아보면 분명 세상을 거스르며 사는 기독교인이 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아직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종흠 장로는 2월 르완다로 떠난다. 자신의 달란트를 이용해 선교를 하기 위해서다.  
 
잘 나가던 은행장 자리를 버리고, 올 2월 세계에서 최고로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르완다로 떠나는 이종흠 장로(미국 이름 제프리 리). 그도 역시 세상을 거꾸로 사는 사람 중 하나다.

이 장로는 2008년 12월, 4년 동안 일했던 신한뱅크아메리카 은행장직을 내려놨다. 그는 미주 지역에 있는 '신한뱅크아메리카'를 관리하는 CEO였다. 이 장로는 미주에 있는 은행계에서 손바람이 좋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가 은행장을 관둔 이유는 선교하러 떠나기 위해서다. 직장에서 명퇴를 걱정하거나 슬슬 노후를 대비해야 할 50대 초반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월 르완다에 있는 '우르웨고 오퍼튜니티(Urwego Opportunity)' 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우르웨고는 르완다 말로 '사다리'라는 뜻이다. 우르웨고는 신용도 없고, 보증을 서줄 사람도 없는 극빈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다.

르완다는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중 하나고, 1인당 국민 소득이 898달러에 불과하다(2008년 기준). 15년 전인 1994년에는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내전이 벌어져 약 100일 동안 100만여 명이 죽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종족 학살이 벌어졌다.

세계 각국에서 르완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우르웨고 오퍼튜니티도 그중 하나다. 1994년 일어난 인종 학살에서 죽은 사람 대부분이 경제 활동을 하던 성인 남자였다. 남편이 죽고 난 뒤 살아남은 아내들은 경제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래서 우르웨고 같은 은행이 매우 필요하다.

'르완다행은 하나님의 이끄심'

   
 
  ▲ 르완다는 1994년 인종 학살로 인해 약 100만 명이 죽었다. 사진은 르완다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 '호텔 르완다'의 한 장면.  
 
2008년은 이 장로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군대에서 예수를 믿고 거듭난 뒤, 자신도 예수처럼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했고, 신앙생활을 한 지 30년이 됐을 때 어느 자리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3년은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예수가 30세 되던 해에 3년 동안 공생애를 했던 것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2008년 4월에 사표를 냈지만 회사가 적극 반대했다. 또 아내의 일과 딸의 결혼 등 가정 문제가 겹쳐 8개월을 더 연장해 근무했다.

이 장로는 자신의 르완다행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다. 이 장로가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르웨고는 르완다에 있는 'Opportunity International' 등 4개의 크리스천 NGO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2007년 우르웨고에서 연락이 왔다. 기독교 신앙이 있는 은행원이 필요한데, 이 장로가 르완다로 와서 일을 맡아줄 수 없겠다고 제안했다. 은행 쪽에서는 당장 현지로 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 장로는 은행에서 매우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하고 있는 일을 아무리 빨리 마무리해도 3~4개월이 걸렸기 때문에 "아쉽지만 갈 수 없다"고 답했다. 아쉽다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겠다고는 했지만, 르완다는 꿈에도 생각치 않은 곳이었다. 그는 원래 남미 쪽으로 가길 원했다.

그 뒤 이 장로는 은행이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기억에서 잊혀져갈 무렵, 우르웨고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자기 대신 구한 사람이 일은 잘하는데 신앙심이 부족하다며, 르완다로 와줄 것을 다시 제안했다. 아무래도 은행 쪽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은행을 운용하기 때문에 일도 잘하고 신앙심도 좋은 사람이 필요했다. 이 장로는 5~6개월 정도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은행 쪽은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와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던 은행 쪽도 막상 "르완다로 가겠다"고 하자, 검증을 시작했다. 약 4차례에 걸친 인터뷰와 적성 검사 등을 통해 그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었고,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2008년 4월 아내와 르완다를 방문했다. 르완다를 방문하자 그의 마음이 활짝 열렸다.

이 나라는 10여 년 전 대학살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곳곳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장로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이쪽으로 인도하기 위해 준비하셨구나" 하고 확신했다.

이 장로가 3년을 십일조로 드리겠다고 약속하면서 △20여 년 동안 금융 쪽에 몸을 담았으니 이 달란트가 낭비되지 않는 곳으로 가도록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길 수 있는 곳에 가도록 기도했다. 르완다에 가서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은행 업무를 보고, 르완다에 있는 작은 자를 섬기게 해달라는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63억의 세계 인구 중 20억 이상이 하루에 1불 정도로 살아요. 3분의 2는 2불 이하로 살고요. 미국에서 가난하다고 하는 사람이 전 세계를 놓고 봤을 때는 전혀 가난한 사람이 아닌 거죠. 4월 르완다를 방문해서 그 나라 사람들을 보는데, '이 사람들이 작은 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군대에서 거듭남

   
 
  ▲ 1월 29일에는 이종흠 장로의 지인들이 모여 식사를 같이 하며 이 장로가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이 장로는 나이가 50임에도 영적인 나이는 30살이라고 했다. 예수 믿고 거듭난 해가 30년이 됐다는 뜻이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다. 대학교 다니면서는 여름과 겨울방학마다 농어촌으로 봉사를 떠났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도 했고, 교회 회지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을 했지만 당시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했다는 얘기다.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되는 것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군대에 가서 거듭났다고 고백했다. 1978년 5월 어느 날, 외박을 나가 동료 군인들과 술을 한잔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음날 주일학교 성경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버스 안에서 사도행전 6장과 7장을 읽고 있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장면이 나왔다. 이 장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스데반 집사라는 사람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겨우 인간인 주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삐딱한 시선으로 성경을 읽다가, 문득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스데반처럼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주변 친구들조차도 불신하는 자신의 가식과 위선을 보고,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군대에서 뜨겁게 거듭남을 체험한 다음, 이 장로 역시 많은 사람처럼 신학을 공부하기 원했다. 스승인 김인수 장로를 찾아가서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김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목사가 되는 걸 원하셨을까. 전부 목사가 되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누가 해야 되나. 좋은 목사도 필요하지만, 좋은 평신도도 필요하다. 목사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나를 이쪽으로 부르셨다는 확실한 소명, 둘째는 남한테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고, 셋째는 사랑의 그릇이 너무 커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김 장로의 말을 듣다보니, 자신은 소명은 있지만, 둘째와 셋째가 부족했다. 그래서 마음을 접었다. 대신 좋은 평신도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김 장로는 세 번째가 부족해서 목사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장로는 앞으로는 자신의 달란트를 이용하는 선교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현지에 가서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그 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 등의 선교도 중요하지만, 비즈니스 선교의 중요성도 부각될 것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아직 비즈니스 선교를 선교라고 제대로 인식하지 않지만, 결국 이런 선교 방식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과 미국에 있는 많은 한인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선교를 하고 있지만, 이런 방식은 아무리 겸손하게 해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당연히 줘야 하지만, 거저 줘서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다. 바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면서 선교를 하는 것, 이 장로는 이게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불교를 믿는 사람들한테 직접 '예수 믿어라' 그러면 안 믿어요. 왜 그럴까요. 그 공동체 안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생계 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이죠. 이런 곳에는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그렇게 생활하면서 예수 믿어도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이 장로는 한국 교회 선교 방식에 대해 쓴소리를 던졌다. 한국 교회가 너무 숫자와 양에 집착한다고 했다. 선교사를 2만 명 파송해서,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2번째로 선교사 파송 수가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은 숫자에 집착하는 분이 아니라며, 숫자에 집착할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지금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데 있다고 했다.

선교 방식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한국 교회는 꼭 해외 선교지로 나가야만 선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고 했다. 뉴욕 맨해튼에 아프간 사람이 5,000여 명 사는데, 이 사람들을 전도하면 꼭 아프간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르완다로 가는 자신에게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이 장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은 해외로 나가지만, 국내에 남아서 선교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장소만 다를 뿐이라고 했다.

이 장로 부부는 3년 동안 르완다에서 생활한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자신도 모른다. 르완다에 가는 것이 자신이 뜻이 아니었듯, 그 뒤의 발걸음도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승규  hanseij@www.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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