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의 세 여걸, 그들은 목사 송가수의 딸이었다. 본래 한씨 성이었던 송가수(한국어 표기로 기록, 이하 동일)는 지독한 가난으로 외가 쪽 송씨 집안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그 집도 넉넉치 못해 멀리 미국에 있던 양부모의 친척에게 가서 일손을 보태기로 한다. 거기서 송씨가 된 송가수는 감리교인으로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밴더빌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선교와 사업에 전념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동시에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자주 부딪히면서 민족의식을 쌓아나갔다. 일찌기 미국 교육을 경험한 그는 6남매(3녀 3남)를 두었는
맹인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는데 다행히 나무에 걸려 매달려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손을 놓으면 바로 살 수 있다고 했으나 믿지 못하고 매달려 있었는데 힘이 빠지자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결과는 엉덩방아를 찍는 것이었다. 불교에서 쓰이는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다.사람은 누구나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간격을 느끼는 예민한 분야가 신앙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취미활동에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까지 붙으면 신앙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도 취미생활일 수 있다는 것이
가끔 저에게 어떻게 혹은 무엇을 믿는가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온라인뿐 아니라 저를 좀 아는 오프라인 지인도 묻습니다. 그래서 적어봤습니다. 날자를 굳이 포함한 이유는 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관점이나 근본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을 보면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게 생겼지만, 저는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2주에 한 번씩 설교를 번역하며, 구역 리더이며 십일조도 합니다. 성경 읽기를 인도하며 매일 묵상을 나눕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교회에서 보이는 제 모습은 나름 신실합니다. "믿습니다"하는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
20년 전에 아무런 끈도 없이 시드니로 흘러 들어온 보안 스님을 처음 만났다. 기왕에도 목사 보다는 스님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주저 없이 내가 하는 대화 모임에 참여를 권했었다. 그런데 보안은 한 번 왔다간 다음에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계속 참석을 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온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오지 않기도 했다. 나는 나름대로 포교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권유했고 젊은 스님이라서 기대도 걸고 있었는데 계속 기대에 어그러져서 마지막에는 전화를 해서 "왜 그러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보안은 "제가 사람 관계에 서툴러서 그렇
“Shoot me first!(나를 먼저 쏘세요!)” 지난 11일 미국 휴스턴 남서부에 위치한 레이크우드교회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30-35세 사이의 한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로 들어왔다. 그는 긴 소총을 들고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소총을 난사했다. 때마침 그곳에 있던 비번인 경찰과 다른 기관 소속 요원 하나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여성이 함께 데려온 아이도 총에 맞아 위독한 상태이며 50대 남성 하나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 교회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대형교회로 으로 유명한 조엘 오스틴이 목사로 있는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경쟁의 체제에 돌입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인간은 이기는 것이 진리라는 세상의 복음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은 현실 그 자체다.손자가 지난 일 월 세 번째 생일을 지났다. 녀석은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열중한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자신의 관심을 표하곤 한다. 최근 녀석이 축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축구를 틀어달라고 하여 그것을 얼마간 보더니 빈 물병을 가져다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화장대를 골대라고 하면서 자신이 골키퍼라며 물병을 차라고 한다. 그러는 것이 신기해
적어도 3세기까지는 교회들 간의 어떤 조직이나 연합체 없이도 다른 교회들 간의 긴밀하고 친밀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 서로 얼마나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든지, 또 누구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개척된 교회든지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였다. 그들의 집회는 성도들의 가정이나 셋집, 혹은 야외에서 열렸으며 특별한 건물이 필요하지 않았다.서로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생명과 동일한 성령의 내주를 강조하는, 어떤 조직에 의해서도 서로 통제받지 않는 자율적인 통일성이
겨울과 봄 사이 계절이 되면 교회의 고등학생 아이들과 함께 강원도 태백에 자리한 예수원을 방문한다.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낯선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다.예수원 피정을 가기 위해서는 한 달 전에 미리 방문 예약을 해야 했기에 명단을 작성했다.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알맞게 맞추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 옆에 습관적으로 16이라는 숫자를 매달고는 아차 실수한 걸 발견하고 17로 수정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6과 17은 전연 다른 세계에 속한 숫자다. 16의 아이들이 마냥 예쁘다면
작년 12월 초에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를 잠시 만나 서로의 일상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친구는 문득 너의 정체성은 뭐니라고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내 입에서는 나는 경계인이지라는 대답이 조건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왔다.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내내 경계인이란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실 내 정체성을 경계인이라 정의한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지만 그 경계인이란 정체성은 내 삶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고 그런 변화가운데 고정되지 못하고 흐르는 세월 속에 그저 그렇게 부유하고 있었다.그러다 서경식 선생이 떠나셨다
요셉은 이집트 땅에서 승승장구 하면서 이름을 이집트 식으로 바꾼다. 사브넷바네아 이름 뜻으로만 보면 ‘신이 말씀하신다’이니 일종의 세례명처럼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서 ‘신’이란 배타적 여호와가 아니라 모든 신들의 통칭이다. 게다가 요셉의 아내는 온 종교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다. 요셉은 꿈의 사람, 출세한 사람, 가족을 용서한 사람 등등 무오류의 사람처럼 찬양되는데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용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일제 강점기의 상처를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창씨 개명은 친일의 다른 이
몇 년 전 박윤선 목사님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분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왔다. 나는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으로 어떤 생각이 옳으냐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따님은 아버지인 박 목사님이 일에 경도되어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고발을 한 것이다. 그 말인즉 아버지인 박 목사님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지적이었다.딸의 그런 지적과 그 지적이 담긴 책을 놓고 설왕설래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가족을
늦은 퇴근을 하고 장바구니를 챙겨 마을 중심부에 있는 마트에 갔다. 감자를 듬뿍 넣은 카레를 해 먹을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서 적립을 꼭 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을 잊은 채 계산대를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이 식자재 마트 자리는 원래 갈비탕 집이었고 낚지볶음 집이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사거리에 있는 데다가 널찍한 주차장으로 인해 언제나 대형 체인점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10년 전에 마트가 들어온 뒤, 이 자리는 드디어 제 주인을 만난 것처럼, 사람이 북적이는 광장처럼 변모했다. 주차장으로 활용되었
주님은 선교비와 구제비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을 모았는가로 당신의 몸인 교회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평가 자체를 받지 않는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세상의 그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누구도 그 사랑을 평가할 수 없다.그 사랑에 참여한 이들은 오직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그 부족한 사랑만으로도 이미 기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자랑할 수 없게
주님이 주시는 해방과 구원은 공동체를 통해서 온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과 구원을 분리했다. 그리고 해방을 버렸다. 그 결과 구원은 세상에 있는 동안 피상적인 것이 되어 죽음 이후로 그 시기를 늦춰야 했다. ‘사후 천국’이 교리로 공고화되면서 해방은 더 이상 복음의 요소로서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유명한 프로파일러 배상훈은 인기 팟캐스트 ‘매불쇼’에 나와 마약 사건 신문보도를 접할 때 마약 공급책이 잡혔다는 것을 본 적 있냐고 물었다. 이선균 마약 의혹으로 언론이 도배될 때인데 누구도 그 생각까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공급책이 잡혀도 실제 언론에서는 그런 보도는 매우 드물다. 배상훈은 마약 공급책 뒤에는 이른바 ‘전관’, 즉 고위 판검사를 지낸 변호사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정보가 미리 새나간다거나 잡혀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것이다. 영화 ‘마약왕’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이황순 사건은 1
꿈과 희망이 부풀어야 할 새해에 안타깝게도 오히려 비탄의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관계에 후퇴를 넘어 갈등과 긴장이 한껏 고조되고 있는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우리나라 국회 제1당인 야당 대표가 백주에 피습을 당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부산경찰청 수사본부는 지난 10일 오후 최종 수사 결과 브리핑에서 이를 테러범 개인의 정치 신념에 따른 범행이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직접적인 사주나 배후세력, 공범 등을 밝히지 못했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죽일 듯이 증오하게 만드는 선전선동은 여전합니다.지난 1일 양산
이제는 고인이 된, ‘오스카상 수상자’ 이선균 배우의 마약혐의 수사 관련 보도는 지난해 10월20일부터 시작됐다. 한 지역 신문이 전날 “톱스타 L씨, 마약혐의 내사 중”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고 다음날부터 실명을 밝힌 기사들이 쏟아졌다. 포털 네이버에서 20일 하루 동안 ‘이선균’으로 검색된 ‘마약 혐의 내사’ 관련 기사는 대략 300건 정도였다. 이 기사들은 하나같이 정확한 취재원을 밝히지 않은 채 ‘경찰이 내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는 내용만으로 작성되었다.클릭 경쟁을 벌이는 황색 매체들만 이렇게 많은 기사를 쏟아낸 것은 아
며칠 전 한 목사님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엘 갔다. 아주 작은 카페였고, 나이 드신 여성이 사장이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그분에게 모두 들렸다. 그분이 옆 테이블에 차 한 잔을 들고 와 앉아서 책을 읽다 우리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분의 딸도 우리 딸이 나온 대학을 나왔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목사님의 아내와 그 여사장님과 내게 공통점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얼마 동안 그분과 대화가 이어졌다. 카페에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꽂혀있는 책들은 그분과 그분의 딸이 본 책들이라고 했다. 그분은 자
얼마 전 내 글에 달린 댓글에 “스스로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를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그냥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평생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물론 그것이 지금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누구도 이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이도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복음에 충실하다.“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사실 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