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인도에는 근세까지 ‘사티’라는 순장 풍습이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혼자 남은 아내도 남편과 함께 장작더미에 올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풍습이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이 악습은 없어졌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우리가 인도 여성들을 폭력에서 구했다고 자화자찬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여타의 식민지 폭력을 덮으려고 한다. 반면 인도인들은 여성들의 사티 선택은 그들의 자발성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폭력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인도출신의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영국이나 인도의 주장 모두에서 사티의 제물이 된 여성의 목소리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제 2의 성(Le Deuxième Sexe)’을 출판한 것은 1949년이다. 이 해는 프랑스에서 여성참정권이 시행된지 5년이 지난 뒤였다. 여기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18세기 말 프량스 혁명기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꿈틀대던 페미니즘이 ‘제 2의 성’에 와서 묵직한 논쟁을 사회에 던져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0년 뒤 68혁명기에 보부아르는 이론가에서 페미니즘 실천가로 활동을 시작한다.기독교 여성신학의을
독일의 인류학자 한스 페터 뒤르의 ‘음란과 폭력(최상안 옮김, 한길사)’은 음란과 폭력의 관계, 다시말해 성폭행을 다룬 책이다. 성폭행이란게 그렇듯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게 대부분인지라 세계 여러 지역의 사례를 통해 인간본능과 충동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이다. 단 한 개의 챞터에서만 여성이 남성을 향해 저지르는 성폭행을 다룬다.이 경우 성행위를 할 수 있는 남성의 신체적 변화가 생리적으로 가능한지가 의문으로 남는데 한스 페터 뒤르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협박 앞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연구가 대부분 증언에 의한
요즘 AI로 놀아보는 게 유행이다. AI가 어디까지 갈지 몰라 불안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현재 수준은 놀이터(playground) 단계다. 텍스트를 그림으로 바꾸어주는 여러 AI중에 Stable Diffusion AI(SDAI)에게 “하나님, 창조, 물고기, 빛(너무 만화처럼은 말고)”을 명령어로 줬더니 그들의 ‘놀이터’에서 이런 그림이 만들어졌다. 사람에 대해 어떤 명령어를 주면 SDAI에서는 손가락이 6개거나 잘못 처리되는 단점이 있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이 물고기에는 꼬리가 없다. AI가 창조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지 놀이터
1970년대 경제성장으로 늘어난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교회 유입이 늘어나자 여러 선교단체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기성 교회는 갑자기 성장한 이들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을 교회로 유인하는데 성공한 ‘온누리’, ‘사랑의 교회’ 등은 아직 나타나기 전이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 , 대학생 선교회(CCC), 구원파 등은 1960년대에는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지 못하다가 1970년대의 ‘경제성장’과 ‘대학진학율 확대’가 그들의 선교에 좋은 토양이 되어 주었다. .기성 교회는 긴장했다. 젊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많은 젊은
우리 말로 번역은 안되어 있지만 제인 샤버그(Jane Shaberg)의 책 The Illegitimacy of Jesus : A Feminist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Infancy Narratives에서 Illegitimacy는 사생아(私生兒)이지만 Illegal(불법)에서 나온 말이므로 혼외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 혼외자는 사생아에 비해 덜 도발적이지만 저자가 이미 고인이 된 데다가 제목 탓에 번역 출판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반기독교적 서적은 아니고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예수의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낮추어 부르거나 상대방의 부모를 언급하는 경우, 성관계를 암시하거나 동물에 빗대는 경우 등 욕에 동원되는 언어는 세계 어디서나 비슷하다. 이와 달리 종교적 표현을 비속어로 사용하는 예는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나타난다. God Damn, Jesus Christ, by God’s bones 등.1866년 ‘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다. 뇌졸중으로 어눌해진 다른 말과 달리 한 마디 표현은 정확했다. 이것 만큼은 발음이 정확해서 보들레르는 하루 종일
우리에게는 ‘컨택트(Contact)’로 알려진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6년 영화 원제는 ‘어라이벌(Arrival)’이고 이것은 SF 소설가 테트창의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김상훈 옮김, 엘리)를 각색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을 정도로 테드 창이 아끼는 작품이다. 내용은 SF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문학서에 가깝다. 지구에 외계인을 실은 비행체가 착륙하자 세계는 외계인과의 전쟁 발발 가능성으로 긴장한다. 외계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언어학자 루이즈(에이미
명망있다고 알려진 어느 목사가 윤석열을 요셉과 같은 사람이라고 설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생각했다. 일단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는 류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과의 만남을 단독자와의 만남으로 해석한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에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어도 ‘요셉의 하나님’은 없다. 다시말해 요셉은 내 신학적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아무개 목사가 윤을 요셉과 연결시켰을 때 나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윤의 아내가 어느 매체의 기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은 멜기세덱, 그는 ‘십일조’가 훗날 한국 교회에서 논쟁의 중심에 선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렇지 않다. 멜기세덱의 이야기에서 ‘십일조’만을 콕 집어 낸 것은 목회자들의 작품이다.멜기세덱은 신비의 인물이다. 중세의 탈무드 연구가들이 밝혔듯이 멜기세덱은 성서의 이야기에 갑자기 침입한 인물이다. 요즘 말로 하면 그의 등장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한 사건이다.노아를 설명하기 위해 지루하게 이어지는 아담의 족보에 멜기세덱은 등장하지 않다가 창세기 14장에 와서야 그 이름이 처음 나온다. 창세기 12장부터
“어리석은 망령아! 분노나 다른 감정이 치밀거든 화풀이로 뿔나팔이나 불어라. 이 얼빠진 놈아, 네 목에 걸려있는 줄을 더듬어 보면 네 커다란 가슴에 달려 있는 뿔나팔이 손에 잡힐 것이다.”그런 뒤 내게 말씀하셨다. "놈은 고백하는 것이다. 저 자는 니므롯인데 저놈의 멍청한 생각때문에 세상의 언어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게 되었지. 저 자는 내버려 두고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자. 그의 말을 아무도 못 알아 듣듯이 어떤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 (단테의 '신곡')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31곡에는 니므롯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지
영화 ‘노아(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 2014년)’에서 대장장이의 시조인 두발가인은 노아의 방주에 몰래 탑승한다. 최초의 철기 제품이 무기였다는 점에서 대장장이는 신화적 폭력의 상징이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을 신화적 폭력과 메시아적 폭력으로 나눈다. 신화적 폭력은 지배하려는 폭력이며 메시아적 폭력은 질서를 다시 짜는 희생을 감수하는 폭력이다. 두발가인은 세상을 재편하려는 야훼에 맞서 자신의 폭력을 전승하기 위해 방주에 몰래 탑승한다. 사실 ‘노아’는 매우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영화인데 기독교계가 반대운동한다고 나서 반기독교 운동의 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는다고 동생을 죽인 가인, 이로 인해 유랑의 벌을 받은 그가 길을 떠나면서 두려움에 떨자 하나님은 누구도 그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용서를 한다. 해석하기 참 쉬운 본문이다. 인류학적으로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갈등으로 해석되고, 2인자를 허락안하는 장남과 끊임없이 장남의 자리를 엿보는 차남간의 권력투쟁으로 읽을 수도 있다.이것을 텍스트로 삼는 교회 현장에서도 쉽게 이해되기는 마찬가지다. 제물의 질적 가치와 드리는 자의 마음 가짐에 따른 결과의 차이, 범죄와 용서, 약속과 생명보장 등을 읽다 보
아르메니아 출신 수사 소시스트라토는 기둥 위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는 기둥 수도사 소속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수행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다. 이 중에서도 소시스트라토는 가장 영성이 뛰어난 수사였다. 어느날 마귀로 변장한 방랑 수사가 그를 방문해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안에서 아직도 살아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불쌍한 롯 아내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에 길을 나선 소시스트라토는 소금 기둥 앞에 서게 되고 그의 영성과 기도로 마침내 소금이 녹자 여인은 소금기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자유의 몸이 된 롯의 아내에게 소시